[include(틀:역대 당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11대 황제[br]{{{+1 헌종 신황제 | 憲宗 神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당헌종.webp|width=100%]]}}} || ||<-2> {{{#ece5b6 {{{-2 이순 상상화 (역대고인상찬)}}} }}} || ||<|2> '''출생''' ||[[778년]] [[3월 17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장안궁 동쪽[br](現 [[중국]]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805년]] [[9월 5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 선정전[br](現 [[중국]]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820년]] [[2월 14일]] (향년 41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흥경궁 함녕전[br](現 [[중국]]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경릉]](景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805년]] [[4월 26일]] ~ [[805년]] [[9월 5일]] || ||'''{{{#ece5b6 제11대 황제}}}''' || ||[[805년]] [[9월 5일]] ~ [[820년]] [[2월 1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순(淳) → 순(純) || || '''부모''' ||부황 [[순종(당)|순종]][br]모후 장헌황후 || || '''형제자매''' ||23남 13녀 중 장남 || || '''배우자''' ||[[의안황후]][* 명장 [[곽자의]]의 손녀이자 대종의 딸인 승평공주의 딸이다. 헌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정실의 지위에 있었다. 재위기간에는 귀비(貴妃)로 있었고 아들인 목종이 황제가 되자 황태후가 되었다.], 효명황후 || || '''자녀''' ||20남 18녀 || || '''종교''' ||[[불교]] || || '''작호''' ||광릉군왕(廣陵郡王) || || '''묘호''' ||'''[[헌종]](憲宗)''' || || '''존호''' ||원화성문신무법천응도황제[br](元和聖文神武法天應道皇帝) || || '''시호''' ||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br](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 || '''연호''' ||[[원화(연호)|원화]] (元和, [[806년]] ~ [[820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제11대 황제. 당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태종 이세민, 현종 이융기와 함께 '''당 3대 명군'''으로 불린다. 재위 중 '''원화중흥'''을 통해 당나라를 다시 부흥시켰고, '''당 왕조 마지막 100년을 버틸 힘을 부여한 황제'''였다. == 생애 == === 즉위 이전 === 증조부인 [[대종(당)|대종]] 말년(대력 13년, [[778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덕종(당)|덕종]]이 즉위한 뒤 그의 아버지인 이송이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이순은 자연스럽게 [[황태손]]이 되었다. 이순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황제]]가 될 것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7세 무렵, 덕종은 손자인 이순과 놀아주다가 장난삼아 >"너는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기에 짐의 품 안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이순이 >"제3[[천자]]입니다." 라고 답했다. 즉, 할아버지(덕종), 아버지([[순종(당)|순종]], 이때는 황태자)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히 천자의 장손인 자신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덕종은 놀랐다고 전하며, 정원 4년([[788년]])에 이순을 광릉군왕에 올렸다. 이후 그의 아버지인 순종이 퇴위당한 뒤에 즉위했다.('''영정내선''') === 원화중흥 === 헌종의 치세를 상징하는 말은 '''[[원화]]중흥'''이다. 15년이 안 되는 짧은 치세 동안 헌종은 행정적으로는 번진 난립으로 인해 끊어졌던 중앙과 지방의 행정적인 연계를 회복했으며, 군사적으로는 반항적인 번진들을 물리력으로 박살내고 제국을 재통합시켰다. 비록 그의 사후에 일부 번진들이 다시 반기를 들고, 이를 조정이 제압하지 못하면서 군사적인 업적은 약간 빛이 바랜 감이 있으나, [[대종(당)|대종]] 및 [[덕종(당)|덕종]] 시절처럼 국토의 절반 이상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던 상황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나아진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헌종의 개혁은 당 왕조의 위기 상황 극복을 위한 비상사태용이라 할 만한 것으로, 민중들에게 가혹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기가 끝난 상황에서 다시 재편하기 전에 독살당하면서 결국 당 왕조를 [[안사의 난]] 이전처럼 '정상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결국 '''완성되지 못한 명군으로 남았다.''' ==== 행정적 개혁 ==== 중후기의 당나라를 일컬어 '''재정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기존 왕조의 제민 지배적인 성격이 크게 후퇴한 대신 [[소금]][[전매]]와 <[[중국사/세금 제도#s-11|양세법]]> 등의 도입으로 국가의 유지가 재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까지 국가를 지탱하던 백성 개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이 크게 낮아지고, 대신 국가가 확보한 재정력이 국가를 운영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헌종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 수용했고, 또한 부황 순종이 실현하려한 '''영정혁신'''의 개혁 조치를 따르며 변화속에서 초래된 악폐습을 없애나갔다. 그를 옹립한 구문진 등의 [[환관]]들을 필두로 하는 구세력들은 젊은 나이의 헌종이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헌종은 영정 혁신으로 인해 기용된 신진 인사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계속 유지하면서 이들 구세력들을 견제했고, 이를 통해 강력한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 중후기 시기인 중당, 만당 시기에 헌종처럼 강력하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황제는 드물었다. 행정적 측면에서 그를 보좌한 것은 이손과 배도, 배기 같은 재정가들이었다. 이들은 <양세법> 개편 과정에서 일어난 악폐습을 최대한 개선하고 효율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헌종 시기 당의 중앙 정부에 순응하던 [[번진]]은 8개 번진, 49개 주로, 전체 주(297개)의 20%가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항적인 번진을 제압할 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재정 관리가 필요했고, 헌종이 기용한 재정가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다만 호삼성은 이러한 재정가로써 탁지, 염철 전운사로 재정 확보에 주력했던 이손을 [[덕종(당)|덕종]] 시기에 같은 지위에 있었던 유안과 비교해 '유안은 이로움을 백성들에게 남겨두려 했고, 이손은 거두는 데 힘쓴 것' 이라 평가하며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양세법>의 관리에 중점을 두었다. '''<양세법>'''은 안사의 대란으로 인한 조용조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조치라 할 수 있었다.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통치력에 막대한 손실을 끼쳐, 대란 이후 당나라가 파악한 호수는 일시적으로 약 130만 호까지 감소했다. [[대종(당)|대종]]과 [[덕종(당)|덕종]]의 노력으로 헌종 즉위 직후 당나라가 파악한 호수는 약 300만 호까지 증가(대략 1,700만 명)했지만, [[현종(당)|현종]] 중후반기인 천보 연간의 800만여 호에 비하면 1/3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원화 2년 이길보에 의해 편찬된 《원화국계부》에 따르면 이 시기 당나라의 세호, 즉 '세금을 매기는 호수'는 천보 연간(현종 중후기)의 '''1/4'''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에 군대의 규모는 '''830,000'''명으로, 천보 연간에 비해 규모는 대략 1/3 정도 증가했다. 그만큼 지출은 급증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 대다수는 번진 소속의 병사였기 때문에 중앙 조정의 통제권 밖에 있었다. 즉, 당 조정은 자기 통제권 밖에 있는 병사들에게도 운영비를 대고 있는 꼴이었다. 이는 '''각각의 번진들이 조정으로 조세를 상공하면서 자신들의 운영비를 자의적으로 빼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호수 파악을 통해 부과하는 조용조적 수취 체계만으로는 도저히 국가를 운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나라는 호세와 지세, 청묘전, 지두전 등의 고세율의 수취 제도와 소금 전매의 유지를 통해 국가를 운용했다. 덕종 시기에 이를 하나로 통합, 일괄화하여 1년에 2차례 양세를 매기는 제도를 실행하는데, 이것이 <양세법>이었다.([[중국사/세금 제도]]를 참조) 이는 새로운 농사법의 도입으로 2년 3모작이 보급된 [[화북]] 지역의 생산력 증대 등과 맞물려 적은 인적 자원, 좁아진 영토에서도 이전보다 더 많은 재정 확보를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를 수취할 때 화폐를 사용하게 되자 화폐 가치가 상승했고, 물질 가치가 하락하는 효과도 있어 수취당하는 백성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고 한다. <양세법>으로 인한 평균적인 세율의 경우, 공식적인 세율로는 상당히 고세율인 약 26%였고,[* 출처: 《중국의 역사-수당오대》] 여기에 '''양출세입'''의 원칙[* 나가는 세출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둔다.]을 따랐기에 지속적인 관리가 없다면 필요 세율은 갈수록 증가하고, 또한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인해 정작 필요한 곳에 쓸 돈은 부족해질 수 있었다. 헌종 시기 재정가들은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즉 수취 지역의 현황을 판단하여 지역별 세율을 조정하면서 동시에 필요없는 재정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부정부패로 인한 손실 또한 잡아내 국고를 풍족하게 한 것이다. 또한 정치 분야에서도 이강과 이길보 등의 인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대대적인 관료제 개편을 통해 관리들의 수를 감축하고, 그만큼 세수를 절약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여유가 생긴 국가 재정은 헌종으로 하여금 번진 개혁과 이에 반항하는 번진의 격파가 가능한 강력한 군사력을 제공해 주었다. ==== 번진 개혁 ==== 헌종의 개혁 중 가장 큰 유산이라면 그것은 '''[[번진]] 개혁'''이라 할 것이다. 그는 번진 제도의 개혁을 통해 끊어졌던 중앙과 지방 간의 연계를 회복했고, 번진들의 이빨과 발톱을 뽑았다. 물론 하북 3진처럼 그 후에도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번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헌종 이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였고, 그 세력도 약했다. [[절도사]]들이 지배하는 번진의 구조는 '회부'(會府)와 '지군'(支郡)으로 나뉘었다.[* 이를 '''사부주'''(회부)와 '''순속주'''(지군)로 부르기도 한다.] '''회부'''는 번진의 처소가 위치한 주로 번진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지군'''은 그렇지 않은 주로 회부에서 통제하는 주들이었다. 당연히 지군에 속한 주의 숫자가 더 많았다. 원화 2년(807년)에 저술된 《원화국계부》[* 헌종 원화 연간의 국가 통계를 기록한 책]에 따르면 이 무렵의 번진의 개수는 48개, 전체 주의 개수는 295개였다. 즉 이 시기 중국 전역에는 48개의 '회부'와 247개의 '지군'이 있는 셈이었다. 헌종은 이에 착안해 '지군' 과 번진의 연계를 끊고, 중앙 정부와 더 깊은 연계를 가지게끔 하는 개혁을 착안했다. 이리하면 당 조정은 250여 개의 주를 다시 총괄하게 될 것이며, 1개 주로 유지되는 번진들은 중앙 정부의 힘 앞에 복속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 제1차 번진 개혁(809) ===== 헌종의 [[번진]] 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809년이었다. 이는 3년 전인 806년에 검남서천부[[절도사]] 유벽, 하수절도사 한전의, 진해절도사 이기의 반란을 무력으로 제압한 데서 나온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회부로부터의 '''상공''', 즉 거둔 세금 중 조정으로 올려 보내는 것을 면제했다. 이로써 회부와 조정의 재정적인 연계는 사라졌고, 번진들이 상공을 올려보내는 것을 이용해 조정에서 여러 이득을 챙기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는 번진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었으나, 다른 개혁과 연계되어 오히려 조정에 이득이 되는 개혁이 되었다. * 둘째, 대신 지군에서의 '''송사''', 즉 번진 운영비로 바치는 세금은 번진 경비가 부족한 경우에만 특별히 허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지군에서의 경비를 제외한 모든 세금은 상공으로 규정하여 조정에 올려보내도록 했다. 이는, 비록 예외적인 규정은 있으나, 지군의 조세 체계하에서 번진과의 연계를 끊고, 중앙 정부와 지군 간의 재정적인 연계를 강화한 것이었다. 이는 각각의 번진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었으나, 상공의 면제를 통해 이득을 보는 대신 가져간 것이었기에 번진들도 마냥 이에 반대할 수만은 없었고, 헌종은 반항하는 번진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했다. * 셋째, 상공이나 송사를 표준 가격인 중고에 의해 상정하게 함으로써 번진이 중간 과정에서 농간을 부리며 이득을 챙기는 것을 없앴다. 첫째, 그리고 둘째 개혁 조치를 통해 여러 주를 거느린 대규모의 번진들은 상당한 손해를 입게 되었고, 특히 막대한 인구의 지군을 거느리고 있었던 강회 지역의 번진들은 거의 무장 해제되다시피 했다. 당 조정 측은 이를 통해 상당한 재정 확충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는 당 조정의 명령이 먹히는 번진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북 3진을 비롯해 당 조정에 반항적인 7개 번진들은 이러한 개혁 조치를 무시했고, 비정기적으로 상공을 바치던 20여 개 번진들도 지역에 따라서 먹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 제2차 번진 개혁(819) ===== 제2차 [[번진]] 개혁은 819년, 당 조정에 반항적이던 7개 번진 중 회서 번진과 평로 치청 번진이 무력으로 토벌되고, 이에 여타 번진들이 조정에 복속하면서 번진들의 순지화가 실현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당 중앙 정부의 힘이 중국 대륙 전역에 확인되었고, 번진들은 모두 신종한 상태였기에 좀 더 급진적인 개혁이 가능해졌다. 819년의 제2차 번진 개혁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각각의 번진들이 보유한 군사력 중 회부의 단련병, 외진군, 아중군만을 허가하고, 지군의 단련병, 외진군은 각각의 주 자사가 통솔하게끔 했다. 즉, [[절도사]]가 가지는 군사상 특권은 자신이 속한 주의 아중군을 별도로 키울 권한밖엔 없어진 것이다. 물론 사병 집단인 아중군을 대규모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특권이었으나 개혁 이전의 절도사들의 군사력에 비하면 그 힘이 많이 약해진 것이었다. * 둘째, 회부에서의 상공이 다시 실시되었다. 회부에서의 상공이 폐지된 명분은 지군에서의 송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군사력을 유지할 재정 확보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는데, 번진들의 군사력 자체가 축소되면서 군사비 지출도 감소했기 때문에 여유분을 축적하여 힘을 키우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첫 번째 개혁 과정에서 지군이 자체적으로 군대를 유지해야만 했기 때문에 상공이 축소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 셋째, 각각의 절도사들이 탁지영전사, 즉 [[둔전]]의 관리를 맡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던 것을 폐지했다. 이는 이 둔전들이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이를 징수하여 재정의 일부로 돌리던 것을 막아 번진들의 재정 상황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헌종은 이러한 개혁을 통해 대부분의 번진들을 다시 당 중앙정부의 관료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이후 당 왕조는 장기간에 걸쳐 지방의 절도사들을 자의적으로 임명했고, 임기를 제한하면서 해당 번진의 병사들과 인적 유대가 형성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원화]]중흥 이후 황소의 대란때까지 하나의 번진에서 6년 이상 재임했던 절도사는, 심지어 하북 3진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번진 개혁은 절도사의 출신도 변화시켰다. 헌종 이후 변방에서 국경 방어를 전담하는 12개 번진을 제외한 나머지 번진의 절도사로 임명된 자들은 모두 문관 및 직업 관료였으며, 변경 번진의 절도사직을 맡은 무관들도 모두 중앙에서 선발되었는데, 신책군 출신이 많았다. 절도사로 임명된 관료들은 대부분 정쟁에서 밀리거나 사임한 [[재상]]인 것이 관례화되었고, 이는 이전처럼 지배층이라 해도 정쟁에서 밀려날 경우 완전한 관직 박탈이나 가혹한 형벌을 받는 대신 절도사라는 매력적인 지방 관직으로 내려갈 수 있었기에 당쟁의 강도가 완화되었다. 물론 [[당쟁]]의 규모는 확대되었지만 그 결과에서 마치 [[스탈린]] 시기와 [[흐루쇼프]] 시기의 정치 투쟁 결과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헌종]]은 이들 절도사들을 [[환관]]을 통해 감독했다. 환관은 이미 이전부터 감군사 제도를 통해 군을 관리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절도사 업무까지 감독하고, 번진의 임시 책임을 맡는 일까지 증가하면서 사실상 절도사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군 통제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동시에 환관의 세도가 너무 커지게 되는 부정적인 경향을 낳았다. ==== 군사적 업적 - 원화삭번 ==== 헌종이 [[태종(당)|태종]], [[현종(당)|현종]] 다음가는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절도사]]들을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당나라는 다시끔 통일왕조로써 유지할 수 있었다. 헌종의 절도사 제압이 없었다면, 당나라는 얼마안가 여러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오대십국시대]]를 90년 정도 뒤로 미룬 정도의 업적'''이었다. ===== 번진 제압의 준비 ===== 헌종의 [[번진]] 개혁이 성공한 것은 당연히 번진들을 무력으로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에 주목하여 '''[[원화]]삭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헌종 즉위 당시 당나라의 영토에는 약 300여 개의 [[주(행정구역)|주]]와 48개의 번진들이 존재했다. 이 중 매년 상공을 바치며 당 조정에 충성하던 번진의 숫자는 8개로, 49주 144만여 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외에 부정기적으로 가끔씩 호구수를 보고하고 상공하던 번진은 약 25개 정도였으며, 호구수를 보고하지도 않고 상공을 바치지도 않는 번진은 15개였다. 그런데 변경 방위를 담당하는 8개 번진은 애초에 호구수 보고와 상공을 면제받고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사실상 조정에 반항적인 번진은 7개였다. 그러나 이런 반항적인 번진들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이정기]]의 평로치청 번진은 이 시기, 12개 주에 약 100,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4진의 난 당시 이정기가 죽고 난 후, 15주 중에서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 조정에 투항하여 3개 주를 상실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당의 중앙군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여기에 더해 서쪽에서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위력을 나누어 배치해야 했기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이런 연합한 번진들보다 약했다. [[대종(당)|대종]]과 [[덕종(당)|덕종]]은 조정에 순응하는 번진들을 움직여 이들 반항하는 번진들을 제압하고자 시도했지만 아무리 순지번진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군사력을 희생시켜가면서 싸워 이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극적인 작전을 펼쳤고, 거기다 조정 편에서 싸우다가도 상황에 따라 반항하는 번진 측에 붙어버리는 번진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헌종은 이에 대해서 강력한 중앙 [[금군]]의 육성과 금군 주도하의 번진 제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도 덕종 말년에 [[토번]]에 대한 대포위 전략이 성공하면서[* '''이필'''이 주장한 것이었는데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다. 무려 [[아바스 왕조]], [[위구르]], 북인도의 팔라 왕조, 당 왕조가 동맹을 맺고 [[토번]]을 포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덕에 엉성하게나마 이 대동맹이 형성이 되어 790년~810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토번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련의 다굴빵에도 토번이 막아내면서 [[아바스 왕조]]는 한때 [[카불]]과 [[사마르칸트]]까지 토번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팔라도 패배했으며, 당나라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위구르가 토번을 이기고,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당나라가 [[남조(왕국)|남조]]와 연계하여 토번을 패퇴시키면서 토번의 국력은 약화되었다.] 서쪽에서의 위협이 감소했기에 방위 병력을 돌릴 수 있었으며, 여러 재정가들이 재정적, 행정적으로 이를 뒷받침했기에 헌종은 최종적으로는 150,000명에 달하는 신책군을 금군으로 육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헌종이 장수들을 불신한 나머지 이들 금군의 지휘권을 자신이 믿는 [[환관]]들에게 맡기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이는 후에 환관들의 전횡이 심각해지는 피해를 낳았다. 특히 [[절도사]]들이 약해짐에 따라 환관들은 당 왕조 내에서 최강의 군사권을 휘두르게 되었으며, 당문종때의 '''감로의 변'''과 같은 '''환관들이 황제를 유폐시키고 감시하며, 이에 반항하는 여타 세력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 제1차 번진 제압전 - 중소 번진 토벌(806~807) ===== [[번진]]들을 제압하기로 결심한 헌종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검남서천[[절도사]] '''유벽'''이었다. 그는 헌종이 즉위하자마자(806년) 검남서천절도사, 검남동천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직을 겸임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강요했다. 이는 [[쓰촨 성|사천]]의 대부분 지역과 [[형주]] 서쪽 일부를 장악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헌종은 이를 거부하고 토벌령을 내렸으며 좌신책행영절도사 고숭문[* 황소의 난 당시 [[최치원]]의 상관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고병]]의 할아버지이다.], 신책경서행영병마사 이원혁을 토벌군으로 편성하여 산남서도절도사 엄려와 협조해 유벽을 토벌하도록 했다. 유벽의 반란 평정은 빨랐다. 유벽은 그리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가 아니었기에 아직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지지 않은 [[금군]]만으로도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다. 관군은 험지를 기반삼아 곳곳에 관문을 쌓고 버티는 유벽의 군대를 연파하여, 9월에 [[청두|성도]]를 함락시키고 유벽을 잡아 물에 빠트려 죽였다. 유벽이 이때 그나마 있는 군대를 10,000명 단위로 나누어 놓았기에 평정이 빨랐다. 또한 하수절도사 한전의를 압박해 입조하게 했고, 그의 생질인 '''양혜림'''이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독립하려 하자 하동절도사와 천덕군절도사를 움직여 이를 토벌했다.(806년) 이 소식을 들은 다수의 번진들이 장안에 들어가 조현하기를 요구하면서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았다. 진해절도사 '''이기''' 또한 그중 한 명으로, 807년 여름,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청을 했다. 그러나 이기는 실제로는 입조할 생각이 없었다. 입조를 환영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온 칙사와 유후판관 왕담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얼마 안가 병을 청하며 연말에 입조하겠다는 연기 청원을 했다. 이에 헌종은 조서를 내려 그의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이에 이기는 반란을 계획했다. 이기는 결국 10월, 왕담을 죽이고 칙사를 협박한 데다가 명목상의 이유로 조정에서 임명한 6개 [[주(행정구역)|주]]의 [[자사]]를 제거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헌종은 어사대부 이원소를 진해[[절도사]]로, 회남절도사 왕악을 초토처치사로 삼아 여러 번진의 병사들을 규합해 이기를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 토벌전은 시작부터 향촌의 자제들이 이기의 부하들을 습격해 죽이는 등 진해 번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1개월이 채 안 되어 이기 자신까지 부하들에게 잡혀 [[장안]]에 압송된 후, 아들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지면서 마무리되었다. 다만 [[연좌제]]에 걸린 건 그의 아들뿐이었고, 그의 사촌이나 형제들은 모두 이전에 공을 세운 자들[* 이기는 엄연한 [[당나라|당 왕조]]의 '''[[황족]] 중 한 명'''으로, 그의 선조는 [[태종(당)|태종]] 이세민의 숙부인 이신통이었다. 그는 황족일 뿐만 아니라 조카인 태종의 목숨도 구한 적이 있었고, 당나라 건국시에도 여러모로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회안정왕'의 [[시호]]를 받았다. 거기다가 이기는 [[안사의 난]] 도중에 당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국정의 아들이기도 했다. --[[호부견자]]?--]이었기에 관직을 깎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헌종은 이로써 즉위하자마자 3개 번진의 반항을 차례로 제압했다. 이에 부정기적으로 상공하면서 눈치를 보던 다수의 번진들이 당 조정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후 제2차 번진 제압 시도가 이루어지는 809년까지 헌종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금군을 확충했으며, 이는 2차, 3차 번진 토벌 기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15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금군인 '''신책군'''을 구축하게 되었다. ===== 제2차 번진 제압전 - 성덕 번진 토벌(809~810) ===== 809년(원화 4년) 3월, 하북 3진 중 하나인 성덕 [[번진]]의 [[절도사]]였던 왕사진이 죽고, 부대사였던 '''왕승종'''이 그 뒤를 이어 유후직에 올라 절도사 업무를 대행하면서 절도사 승계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같은 해 7월, 노룡절도사 유제와 위박절도사 전계안, 회서절도사 오소성이 모두 병이 들어 절도사직의 부자 승계를 요구했다. 과거 [[덕종(당)|덕종]]은 4진의 난과 주차-이회광의 난 이후 이러한 요구를 모두 승낙하면서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었기에 이들로써는 자연스러운 요구였다. 그러나 헌종은 조부인 덕종과는 달랐다. 제1차 번진 토벌의 성공과 튀르크계 [[사타족]]의 귀부(808년), [[금군]]의 증강으로 자신감을 얻은 헌종은 하북 3진(성덕, 노룡, 위박) 및 회서 번진의 절도사들이 중병이 들었다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토벌할 의도를 내비쳤다. 여러 학사들은 이에 반대했고, 꼭 토벌해야 한다면 하북 3진보다는 그 세가 약한 회서 번진을 제압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헌종은 성덕 번진을 목표로 삼았으며, 왕승종이 두 개 [[주(행정구역)|주]]를 바칠 테니 용납해 달라고까지 청원했으나 헌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9월 7일, 헌종은 왕승종을 성덕절도사·항주·기주·심주·조주[[관찰사]]로 삼고, 왕승종이 넘기겠다고 한 2개 주를 관할하는 보신군 번진을 새로이 창설해 왕승종의 사위였던 설창조로 하여금 보신군절도사·덕주·체주관찰사로 삼았다. 이는 성덕 번진의 영역(6개 주)을 쪼개 새로운 번진을 창설하여, 성덕 번진을 견제하고 그 세력을 약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이에 왕승종이 사위인 설창조를 억류하자 헌종은 설창조를 풀어주라고 압박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자 왕승종 토벌을 결심하고 [[환관]] 토돌승최를 좌·우신책·하중·하양·절서·선흡등도행영병마사·초토처치사로 임명했다. 이는 환관이 최초로 행영병마사 겸 초토처치사에 임명된 것이었으며, 행영절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환관이 여러 번진군을 아우르는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었다. 이에 여러 학사들은 >'''환관이 군을 감시하는 감군이 된 적은 있어도 총사령관이 된 적은 없다.''' 며 강하게 반발했고, 간관과 어사들 또한 토돌승최에게 지나치게 큰 관직을 내린다며 반발했지만, 헌종은 토돌승최의 병마사 작위를 선위사로 내리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고, 실질적으로는 끝까지 총사령관 직위를 맡겼다. 모인 병력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최대 200,000명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고, 들어간 비용은 700만여 민(통화의 단위)에 달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토벌군이 여러 번진들의 연합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소의절도사 노종사는 조정에 가장 먼저 성덕 번진을 토벌하자고 주청하여 이 토벌군 결성에 크게 기여해 놓고는 막상 토벌에 들어가자 성덕 번진과 은밀히 손을 잡고 식량 보급을 훼방놓으면서 이득을 챙기려 했으며, 4진의 난 과정에서의 반목으로 인해 토벌군에 참여한 노룡 번진[* 엄연히 하북 3진 중 하나이며, 위박 번진, 회서 번진, 평로치청 번진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니 이는 꽤 뜻 밖의 일이라 하겠다.]도 몇개 성만을 빼앗고는 주저앉았다.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받은 위박 번진도 형식상 1개 주를 점령한 상태로 멈추어 섰다. 거기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환관인 토돌승최가 직접 지휘하는 신책군 및 하동·하중·진무·의무 4개 번진 연합군은 성덕 번진 군대를 정면으로 공격했다가 자기 군대만을 아끼려 한 절도사들의 비협조로 인해 연전연패했고, 제1차 토벌전 당시 유벽을 사로잡았던 공적이 있는 좌신책대장군 여정진까지 전사해 버렸다. 비록 소의절도사 노종사가 뒤로 손을 잡은 것을 눈치채고 체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나라]]로써는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 결국 원화 5년(810년) 7월, 1년에 걸친 토벌전은 별 소득도 없이 실패로 끝났다. 왕승종은 형식상 사죄하고 공물과 부세를 바치겠다며 용서를 빌었고, 이사도 등의 번진 세력들이 왕승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헌종은 별수 없이 용서한다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봤을 때, '''헌종의 제2차 번진 제압전은 최초의 패배였다.''' 이에 토돌승최는 책임을 지고 좌천당했다. 그러나 헌종은 계속 토돌승최를 신뢰했기에 얼마 안가 복직시켜줬고, 환관들의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 ===== 위박 번진의 귀순 ===== 제2차 번진 토벌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헌종은 이길보와 이강을 중용하여 [[관료제]]를 개편하고, 지속적으로 정치를 정비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지출을 감축하고, 그것을 신책군에 모두 쏟아부어 추후를 기도했다. 812년, 위박 [[번진]]의 [[절도사]]였던 전계안이 급사하고 그의 어린 자식인 '''전회간'''이 뒤를 이었다. 이에 헌종은 처음에는 위박 번진 토벌을 생각했지만 이강의 조언을 받아들여 토벌을 포기하고, 대신 절도사로서의 공식 임명장을 내려주는 것을 연기하면서 위박 번진 내의 여러 제장들을 충동질하는 공작을 시도했다. 이러한 정치 공작은 성공하여 위박 번진의 절도사 사병 집단인 아중군이 봉기하여, 전회간을 죽이고 그의 사촌이자 숙장인 전흥전을 세웠다. 전흥전은 이후 자신의 지위 안정화를 위해 조정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여 환대받았다. 당 조정에서는 150만 민을 하사하여 이들을 우대했다. 하북 3진(위박, 노룡, 성덕 번진)과 회서 번진, 평로치청 번진은 서로 친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당 조정에 40여 년간 대항해왔다. 그러나 4진의 난 당시의 일로 노룡 번진과 성덕 번진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아지면서 이러한 연계는 위태로워지게 되었다. 그런 두 번진의 연계를 중간에서 잇고 있었던 것이 위박 번진과 평로치청 번진이었는데 이때의 사건으로 위박 번진이 싸우지도 않고 조정에 귀순한 것이었으니 조정으로서는 한숨 돌렸다고 할 수 있었다. ===== 제3차 번진 제압전 - 회서, 성덕 번진 토벌(814~817) ===== 제3차 [[번진]] 토벌은 번진 제압을 위한 [[전쟁]] 중 '''가장 기나긴 토벌 작전이었으며, 사실상 번진 제압의 분수령이 된 전쟁이었다'''. 제3차 번진 토벌 작전은 814년 윤 8월, 회서[[절도사]] 오소양이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소양은 제2차 번진 토벌 직전 사망한 오소성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지배하는 회서 번진은 비록 3개 [[주(행정구역)|주]]만을 보유한 작은 번진이었으나 최대의 번진 세력인 평로치청 번진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순치 관계에 있었다. 때문에 제2차 토벌전 때도 회서 번진을 치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오소양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인 '''오원제'''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단지 병이 들었다고만 보고하며 스스로 군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소양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조정에 들어가 조현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모두 무시하며, 충고한 사람을 잡아 죽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헌종은 오원제 토벌 준비에 들어갔다. 9월, 헌종이 마지막으로 오원제를 떠보기 위해 보낸 칙사를 거부한 오원제는 먼저 선공을 걸었다. 그는 무양([[하남성]] 무양현), 섭([[하남성]] 섭현), 노산([[하남성]] 노산현), 양성([[하남성]] 양성현)을 공격했고, 심지어 동도 '''[[낙양]]까지 공격'''했다. 먼저 한방 맞은 헌종은 오원제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고 엄무를 신·광·채주초무사에 임명, 총사령관으로 삼고, 이를 감독할 인물로 내상시지성사 최담준(환관)을 임명해 토벌령을 내렸다. 또한 신책군과 더불어 충무절도사 이광안, 하양절도사 오중윤, 선무절도사 한공무, 수주[[자사]] 이문통에게 엄수를 따라 회서 번진을 토벌하라고 명령했으며, 상서좌승 여원응을 동도(낙양)유수로 임명했다. 또한 이후에도 근처의 [[관찰사]], 병마사, 절도사들에게 오원제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나의 작은 번진이자 관외군이 채 2 ~ 30,000명 정도에 불과했던 회서 번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진들의 공격을 상당히 잘 버텼다. 이는 역시나 '''절도사, 병마사, 관찰사들이 휘하의 병사들을 아끼느라 몸을 사렸기 때문'''으로, 기껏 이겨 놓고도 방심하다가 야습을 받는다든가, 협조가 잘 되지 않았거나 하는 모습이 많았다. 그나마 충무절도사 이광안과 신책군을 지휘한 유공작 정도가 적극적인 토벌전을 벌여 성과가 있었다. 그래도 워낙에 군사력 차이가 많이 났기에 회서 번진은 차츰 주요 거점을 잃어가면서 몰리게 되었고, 오원제는 필사적으로 성덕 번진과 평로치청 번진에 구원을 요청했다. 815년, 당시의 평로치청 번진의 절도사였던 [[이사도]]([[이정기]]의 손자)는 오원제를 돕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 토벌전은 '''회서, 성덕, 평로의 세 번진 연합과 [[당나라|당]] 조정 사이의 정면 대결'''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는 4진의 난 이래 거진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사도는 오원제와 함께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성덕 번진의 수장인 왕승종과 함께 표문을 올려 오원제를 옹호하면서 자신이 육성한 [[자객]] 및 [[도적]]들을 동원해 하음원에 쌓여 있었던 [[군량미]] 30,000여 곡을 태우고 화폐 30여만 민을 약탈했다. 또한 [[장안]]까지 자객을 파견하여, 헌종을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무원형,[* 이길보가 814년에 사망한 이후 헌종을 군사적인 부분에서 보좌한 인물이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배도를 대상으로 [[암살]]을 시도해 무원형을 살해하고 배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에는 성덕 번진의 왕승종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후에 이사도가 저지른 일임이 확인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사도 자신이 운영하던 낙양의 유후원에 병사들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낙양을 습격하여,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할 계획까지 짰지만 밀고자가 나오면서 실패했고, 이사도가 오원제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었음이 밝혀졌다. 성덕 번진, 평로치청 번진이 회서 번진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토벌군도 나누어질 수밖엔 없었다. 때마침 귀순한 위박 번진, 그리고 성덕 번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노룡 번진, 황해 번진, 의무 번진이 성덕 번진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나섰고, 이쪽으로 파견된 신책군과 함께 성덕 번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최대, 최강의 번진 세력이었던 평로치청 번진을 상대로는 견제성 병력 약간만을 배분할 수밖에 없었다. 제3차 번진 토벌은 816년을 거처 8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회서 번진을 공격하던 토벌군은 90,000명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절도사들이 자기 병력을 아끼느라 오히려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엄무가 고하우로, 고하우가 다시 원자로 교체되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했고, 결국 [[당나라|당]] 조정 측은 성덕 번진과 회서 번진을 동시 공략하려던 기존의 계획을 버리고 회서 번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태자첨사였던 '''이소'''[* [[이성#s-5|이성]]의 아들이다.]로 하여금 원자를 대신하게 했다. 전면에 나선 이소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번에 끝낼 기습을 생각했다. 그것은 회서 번진의 처소가 위치한 채주를 기습해 오원제를 포로로 잡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소는 우선 직속 부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회서 번진을 압박했고, 오수림과 동창령 등 회서 번진의 여러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냈다. 이때문에 오원제는 채주를 지키던 병력까지 전면에 배치했다. 이소의 채주 기습 공격의 준비는 수개월을 끌었다. 포로로 잡힌 장수 중 한 명인 이우를 회유해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산남동도 번진의 정예 병력 3,000여 명을 그의 휘하에 배속시켰으며, 결사대 3,000여 명을 모집해 '돌장' 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준비시키는 등 철저하게 기습군을 준비했으며,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하자 이소는 낭산을 공격해 회서 번진 병력들을 모두 낭산으로 끌어내고는 때마침 채주 근방을 휩쓸던 홍수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사도에게 암살될 뻔 했던 배도가 문하시랑·동평장사·겸창의절도사·회서선위초토처치사로 임명되어 [[전선]]을 총지휘하는 [[원수]]가 되어 토벌군 지휘를 일원화했고, 9월이 되자 홍수도 그쳤다. 817년 10월 15일, 이소는 9,000여 명의 병력을 편성하여, 채주를 급습했다. 때가 겨울이었기에 폭풍과 눈이 흩날리는 혹독한 기후였지만 오히려 이것이 채주로 향하는 당군을 가려주었기에 '''하루 만에 150리 이상을 돌파하는 동안 회서 번진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10월 16일 4고(새벽 3시) 즈음에 성에 도착한 당군은 순식간에 채주성을 장악했고, 오원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른 군대들도 모두 항복했다. 거진 3년 이상을 끈 회서 번진의 반란은 이것으로 평정되었고, 성덕 번진과 평로치청 번진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두 번진은 고립되었으며, 회서 번진과 행동을 같이하던 성덕 번진은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후 이 공으로 이소는 양국공에 산남동도[[절도사]]직을 꿰찼고, 배도는 청의절도사로서 채주 지역을 안정화시켰으며 오원제는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 번진의 왕승종은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덕주와 체주를 헌납하면서 조정에 항복했다. 이 토벌전에 동원된 군대는 총 17~18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 제4차 번진 제압전 - 평로치청 번진 토벌(818~819) ===== 오원제의 회서 [[번진]]이 평정되고, 왕승종의 성덕 번진이 항복하자 헌종은 [[하북]], [[산동]]의 반항적인 번진 중 가장 크고 강력하며 사실상 번진들의 중심축이었던 '''이사도'''의 평로치청 번진을 토벌하고자 계획했다. 평로치청 번진은 [[안록산]]이 최초로 절수직을 역임한 이래로 [[후희일]], [[이정기]]에 이어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진, 조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골수 [[반란]] 세력'''이었다. 거기다가 그 세력은 이정기 생전, 최대 15[[주(행정구역)|주]]에 달했고 이정기 사후에도 12주에 걸쳐 있었으며, 관외병과 아중군만 해도 100,000명에 달하는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화국계부》에 기록된, 조세도 바치지 않는 7개 번진 중 하북, 산동의 5개 번진(하북 3진, 회서, 평로치청)의 관외병, 아중군의 총합이 300,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 1/3이 평로치청 번진 소속이었다. 또한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던 이정기 이래로 평로치청 번진은 [[신라]], [[발해]]와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담당했다. 그 결과, 신라와의 교역 규모가 한층 활성화되면서 평로치청 번진은 부유해졌고, 발해와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다수의 마필을 획득하여 전력을 증강시켰다. [[안사의 난]] 이래로 한동안 하북 일대에는 군마의 씨가 말라서 여러 번진들 중에는 '''기병 대신 [[노새]]를 지급'''하기도 하는 가운데 '''홀로 발해산 마필을 다량으로 유지'''하고, 이를 동맹관계의 여러 번진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면서 전력을 강화한 평로치청 번진의 군사력은 번진들 가운데도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발해와 신라까지 개입된 국제전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물론 평로치청 번진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정기 이래로 평로치청 번진이 조정의 명을 듣지 않고 맞서 싸우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평로치청 번진이 물론 강대한 번진이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북 3진, 회서 번진, 산남동도 번진 등 여러 번진들과 연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헌종의 3차에 걸친 번진 토벌로 인해 위박 번진, 회서 번진, 성덕 번진이 귀순 또는 평정되었고, 노룡 번진과 직접적인 연계가 불가능해져 홀로 고립되었다. 평로치청 번진은 처음 단독으로 당의 토벌군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818년, [[이사도]]는 자신에게 닥처든 위기를 느끼고 기주, 밀주, 해주를 조정에 바치며 헌종의 토벌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사도는 천성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땅을 바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며 군을 동원했다가 다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수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인해 평로치청 번진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토벌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818년 5월, 헌종은 회서 번진 토벌에 공을 세운 충무[[절도사]] 이광안을 의성절도사로 임명하고, 회서절도사로 충임되었던 마총을 충무절도사·진·허·은·채주관찰사로 삼았으며, 7월에는 이소를 무령절도사로 삼고, 배도를 최고 사령관으로 삼아 이사도 토벌령을 발동했다.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번진이 최초 토벌령을 받은 번진이 되었고 신책군 또한 대규모로 종군했다. [[장보고]]가 이 토벌전에 종군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군 소장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령절도사 이소의 휘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헌종은 이사도 토벌을 위한 국제적인 여건 마련에도 힘썼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 약속을 받아냈고[* 이때 신라는 [[헌덕왕]]이었다. 30,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해 파견하겠다고 했지만 이사도 토벌이 끝난 후에야 편성이 완료되었다.] 발해를 회유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발해의 [[선왕]]이 이사도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고, 이후 당나라 측에서 고위 관직을 제수한 데다가 당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밀약이 있었던 듯 싶다. --그러니까 [[고구려]] 유민이고 자시고 국제 관계에선 별 의미가 없다.-- 이사도 토벌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한때 긴밀한 동맹이었던 위박 번진의 군대가 앞장서서 이사도군을 공격해 나갔고, 11월에는 이미 처소가 있는 운주에 40리 거리까지 전진해 보루를 쌓았다. 이사도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연전연패하여 도지병마사를 비롯해 수십 명의 장수들이 사로잡혔다. 무령절도사 이소 또한 11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면서 이사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사도는 처소인 운주의 방위에만 노력하여 여러 주의 구원 요청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819년 2월, 이사도의 도지병마사였던 유오가 이사도에 반기를 들고 휘하의 병력을 움직여 이사도와 그 두 아들을 체포, [[처형]]한 후 목을 잘라 바치고 항복했다. 이것으로 '''최대의 번진 세력이었던 평로치청 번진은 이정기 이래 4대 55년에 걸친 독립 세력으로써의 역사를 마치고 당헌종에 의해 평정되었다.''' 헌종은 평로치청 번진의 평정 소식을 듣고 12개 주를 3개의 번진으로 나누었다. 이사도의 친위 세력이었던 고구려 유민들이 거듭 반항하자 나누어진 번진을 임시로 관장하던 기해연밀도관찰사 조화는 이들 중 주요 인물 1,200여 명을 향연 도중 제거했고, 운주의 주민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켜 뒷처리를 마무리했다. === 말년의 헌종 === 헌종은 역사상 '''원화중흥'''이라 일컬어진 대대적인 [[개혁]]과 이를 통한 힘을 바탕으로 [[번진]]들을 무릎꿇리고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비록 하북 3진은 헌종 사후 다시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으나 이들 번진들도 [[당나라|당]] 조정과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는 헌종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료들을 상당히 후대했고, 서로 불화가 존재하는 관료들을 [[재상]]으로 동시에 임명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하게 조정을 운용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써 그의 권력을 지키는 데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로 헌종 사후 당나라의 [[황제]]들 중 그보다 더 강력한 황권을 보유한 황제는 없었다. 그러나 재위 마지막 해의 헌종은 이러한 균형 감각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파간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존의 관료층을 사족([[문벌귀족]]), 서족(과거로 임용된 문학자 집단)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했으며, 대신 황보박으로 대표되는 재정가들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이로 인해 두 세력은 모두 말년의 헌종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고, 이것이 역사적인 평가로 남아있다(...) 헌종이 변해버린 이유로는 단약 복용을 꼽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편견이 존재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헌종을 [[암살]]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이 최측근인 [[환관]] 세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강력한 황권을 가진 헌종이 뭔가 사람이 변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최측근들에게까지 위험하게 보였다는 데는 딱히 이견이 없는 듯 싶다. 특히 말년의 헌종은 단약의 과도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여기서 헌종은 정신질환이 심각해졌는데 조급증이 심해지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측근들이 황제의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성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헌종이 최측근인 환관들을 대상으로 이유없이 매를 때려 환관들이 가장 심하게 당했기에 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물론 재정가를 재상으로 기용했다는 데서 헌종이 다음 개혁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재정 확보에 주력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하나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헌종은 토돌승최라는 환관을 신임했는데 토돌승최는 또다른 환관 집단의 수장인 왕수징 및 양수경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헌종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이녕이 요절하자 둘째 이운과 셋째 이항 중에 누구를 황태자로 삼는가에 대해 대립했다. 헌종은 환관들의 압력에 못이겨 셋째 이항을 황태자로 내세웠는데 사실은 은밀하게 토돌승최와 모의해 둘째 이운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820년, 헌종은 급사했다. 부황인 [[순종(당)|순종]]처럼 왕수징 일파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무엇보다 왕수징 일파의 입장에선 헌종의 정신질환과 폭력을 견딜수가 없었다.], 토돌승최와 이운은 직후 제거되었다. 헌종은 '''당나라에서 환관에게 독살당한 세 번째 황제였다.''' 원화중흥을 이룩하고, 당나라에 마지막 100여 년을 버틸 힘을 부여했으며, 마지막 해의 변화만 없었다면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었던 황제의 죽음이었다. 제위는 3남 [[목종(당)|목종]] 이항이 계승했다. 목종의 세 아들, 즉 헌종의 손자인 [[경종(당)|경종]], [[문종(당)|문종]], [[무종(당)|무종]]은 차례로 [[요절]]했다. 무종의 뒤를 이은 [[선종(당)|선종]] 역시 그의 핏줄(13남, 서자)이었다. 선종 역시 훌륭한 왕재를 보였으나 결국 말년은 [[암군]]으로 마쳤고, 당나라는 완전한 [[멸망]]의 수순에 이르게 되었다. == 평가 == 헌종은 충분히 고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황제]]이다. 그의 대[[번진]] 정책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보아야 하며, 제도 개혁은 [[당나라]]로 하여금 다시 [[중흥]]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의 대가는 컸다. 10년여에 걸친 전쟁과 이에 필요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 및 재정 확보를 위해 납세자들에게 매긴 중세는 그 부담을 크게 키웠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번진들의 난횡으로 인해 나라의 절반 가까이가 통제밖에 있었다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는 변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헌종은 이러한 '비상사태'가 종결된 직후 얼마 안 가 붕어했고, 그로 인해 [[당나라]]는 비상 상황에서 다시 정상으로 완전히 되돌아오지 못했다. 헌종의 마지막 1년 동안 보인 그의 행보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국가의 정상화를 생각한 정책 전환을 기도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올라갈 것이고 거기에 성공까지 했다면 헌종은 당당히 [[태종(당)|태종]], [[현종(당)|현종]]과 같은 영역에 설 수 있는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미궁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기에 그가 주도한 '''[[원화]]중흥'''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사후 권력은 있으되 의욕과 능력이 턱없이 떨어지거나, 의욕과 능력은 있으되 권력이 약한 황제들만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결과 최종적인 당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황소의 난|황소의 대란]](875~884)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헌종의 치세의 결과로 번진들이 반항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당나라는 87년 후에 멸망했다. == 기타 == * 원화 3년, 튀르크계 [[사타족]]이 [[토번]]을 이탈해 당나라에 귀순했다. [[당나라]]는 귀중한 기병 전력을 보유한 사타족의 귀순을 환영했고, 이들을 받아들인 순지 [[번진]] 중 하나인 영엄 번진은 사타족의 기마 전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번진이 되었다. 이 사타족은 90년 뒤, [[이극용]]과 [[이존욱]]을 배출하고, [[후당]]을 건국하게 된다. * 헌종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당시 조정에서 일하던 [[당송팔대가]]의 일원인 창려 [[한유]]는 불교를 격렬히 싫어했다. 원화 14년에 봉상 법문사에서 부처의 [[사리(불교)|사리]]를 들이려고 했는데, 이때 귀족, 서민을 불문하고 시주하기에 바빠 생업을 폐하고 심지어 파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안 그래도 불교 안티인 [[한유]]의 입장에서는 매우 화가 날 일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논불골표>'''라는 글을 올려 불교를 성대히 까기에 이른다. 요지는 >"'''[[부처]]는 [[중국인]]도 아니고 옛날에 [[황제(중국 신화)|황제]], [[제곡]], [[요(삼황오제)|요]], [[순(삼황오제)|순]] 같은 임금들이 100년씩 살 때는 있지도 않았는데 왜 섬기시나요? [[후한|한나라]] 때 들어오고 나서는 황제들도 일찍 죽고 한나라도 망했는데요? 게다가 [[양무제]]는 [[부처]]한테 세 번이나 몸을 바쳤는데도 나라가 망했는데 부처가 믿을 수나 있는 존재입니까?!"'''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황제의 수명을 걸고 넘어진 부분은 말 그대로 폭언이었다. 헌종도 이것을 걸고 넘어지면서, >"내가 [[부처]]를 섬기는 게 지나치다고 얘기한다면 이해하겠는데, 불교 믿는 황제가 요절했다는 얘기는 왜 하는 건가? '''이게 신하가 할 말이냐?'''" 당장 죽여버리려고 하다가 배도와 최군 같은 신하들이 간언해서 사형은 물리고 조주자사로 관작을 깎아 버렸다. 물론 나중에 [[한유]]는 용서를 빌었고 헌종도 이를 받고는 대충 풀어지면서(...) >"그래도 얘가 나를 사랑해서 한 게 아니겠냐" 는 반응을 보이며 원주자사로 옮겼다. 여담으로, 헌종은 43세의 나이로 [[요절]]한 편이다. * 헌종의 가족 관계 중에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의 17번째 딸인 태화공주(太和公主)는 [[위구르 제국]]으로 시집가 [[화번공주]]가 되었다. 또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로 위구르에는 황제의 친딸이 자주 시집갔는데 그녀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공주(寧國公主)와 함안공주(咸安公主) 등이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각주]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778년 출생]][[분류:820년 사망]][[분류:독살된 인물]][[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