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북한의 유적지)] [include(틀:개성역사유적지구)] || [[파일:external/www.kyeongin.com/484693_117623_2513.jpg|width=100%]] || ||<:> 현릉의 현재 모습. || || [[파일:태조 현릉.jpg|width=100%]] ||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1916년의 모습. || ||<:>[include(틀:지도, 장소=왕건왕릉, 높이=250px, 너비=100%)] || ||<:> 지도 || [목차] == 개요 == 顯陵 / Hyeon Rung 500년 [[고려]] 왕조의 건국군주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왕릉(무덤)|왕릉]]. 태조 왕건과 즉위 전부터 아내였던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으로, 실제 즉위했던 고려국왕의 왕릉 중 최초로 지어진 [[고려왕릉]]이다. [[북한의 국보]] 제179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 등재돼있다. == 위치 ==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 > - 권2,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太祖) 26년(943) 5월 고려사 태조 세가 기록엔 송악(松嶽)의 서쪽 언덕(西麓)에 능을 조성했다고 한다. 현재 현릉이 있는 주소는 [[북한]]의 [[개성시]] 해선리. 예전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토성면 여릉리였다. [[개성시|개성]] 시가지의 서쪽에 있으며 먼 후손 [[공민왕]]이 묻힌 [[현정릉]]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https://goo.gl/maps/ma8inNCgN6t]] >---- >현릉 구글 스트리트 뷰 보기 == 능호 == 능호 ''''顯''''은 한자론 '나타나다'란 뜻이고 [[시법]]으로는 '명성이 내외로 떨쳐지다'란 뜻이다.[* 고려의 중흥군주 [[현종(고려)|현종]]의 묘호도 나타날 현(顯) 자이다.]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시대]] 중, 두각을 드러내 수많은 [[호족(한국사)|호족]]들을 포섭하고 제압해 결국 [[후백제|백제]]와 [[신라]]를 흡수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받아들여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왕조 시대를 연 태조에게 걸맞는 능호이다. == 역사 == 태조는 [[음력]] [[943년]] [[5월]] 29일 [[만월대|본궐]] 신덕전에서 붕어했다. 신혜왕후의 사망일은 미상이다. 정윤 [[왕무|혜종]]이 즉위하고 태조는 같은 해 [[943년]] [[6월]] 26일에 왕릉 현릉에 묻혔다. 고려사 기록으로 송악산 서쪽에 왕릉이 만들어졌고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이 이루어졌다. == 구성 == || [[파일:CS_201312_66-1024x677.jpg|width=100%]]|| || 현재 개건된 현릉의 모습 || 지형이나 구성을 보면 조선 왕릉과 유사성이 있다. 완만한 구릉에 봉분이 있고 석물의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앞에는 정자각과 비석이 있다. 태조 왕건의 현릉은 당연히 태조가 죽은 뒤에 조성됐지만 이후 [[거란]]이나 [[몽골 제국]]의 침략 때문에 왕건의 유골은 [[강화도]] 등지로 여러 번 옮겨다녀야 했고 조선 후기인 1867년도에도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므로 나중에 손을 보는 과정에서 조선 왕릉과 비슷해진 것으로 보인다. 봉분이 마치 [[신라]] 왕릉처럼, 다른 고려 왕릉들에 비해 매우 큰 편인데 태조로서 특별하게 예우를 받은 듯 하다. === 내부 === || [[파일:NISI20200115_0015981037_web.jpg]] || || 무덤 내부 사진 || 현릉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연도가 남향으로 나있다. 이 연도를 따라 들어가면 재궁(梓宮)[* 임금의 [[관(장례)|관]]은 재궁이라고 높여 부른다.], 부장품을 안치한 현실(玄室)에 도착한다. 이 현실은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현실 내부 중앙엔 재궁을 올려둘 석판이 있고, 동, 서, 북벽엔 부장품을 올려둘 돌 선반이 있다. 세 벽과 천장엔 전 왕조 [[고구려]] [[무덤]]처럼 벽화를 그렸다. 동벽엔 [[대나무]]와 [[매화나무]], [[청룡]]을 그렸다.[* 청룡 그림은 꼬리만 남아있다.] 서벽엔 [[소나무]]와 [[매화나무]], [[백호]]를 그렸다.[* 백호 그림은 흐릿하게 남아있다.] 북벽은 그림이 크게 훼손돼 그림 흔적만 약간 남았을 뿐이라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북방의 상징인 [[현무]]도가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천장엔 [[매화나무]]와 별자리를 그렸다. 남쪽은 연도가 있어 연도의 벽에 [[주작]] 그림이 있었을 수도 있다. 현릉의 북쪽에서 공사하던 중, 태조 왕건의 140 cm 크기인 청동상을 발견했다.[* 세종대왕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왕건상을 처리하고자 했는데 전 태조 상을 부수긴 좀 뭐하니까 현릉 옆에다 묻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나체인 청동상이 쓴 통천관[* 천자만이 쓸 수 있는 관이다.]엔 도금된 흔적이 있으며 신체 주위엔 천 조각, 옥 조각이 나왔다. 청동상은 고대 삼국에서 전래된 전통숭배신앙이며 나체에 실제 옷을 입히는 것은 고구려의 전통신앙이다. 왕릉의 벽화도 그렇고 청동상도 그렇고 태조의 능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흔적이 많다. == 근황 == 북한에 있는 고려 왕릉들의 관리 상태가 심히 열악한 가운데서도 넷상에 퍼진 사진들로 보나 위성지도로 보나 상당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인 것 같다. 실제 위성지도로 확인해보면 개성 주변의 산들은 북한 다른 곳들도 대부분 그렇듯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인 경우가 많다. 여러 개성 고려왕릉들도 사진을 확인해 보면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산중턱에 외롭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유독 여기와 [[현정릉]]은 왕릉 주변에만 조금 있는 것이긴 하지만 왕릉 근처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봐도 딱 왕릉 근처에만 나무가 있고 먼 곳은 텅 빈 민둥산이다. 구글 등 위성지도로도 확인 가능. 그럭저럭 잘 정비된 모양새도 갖추고 있다. [[북한]] 정권이 그나마 신경쓰는 [[문화재]] 중 하나인 듯 하다. 다만 최근 사진을 보면 [[단군릉]]이나 [[동명왕릉]]만큼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제멋대로 '복원'한 정황이 보이기는 한다. [[2000년대]]에 시행됐던 [[개성관광]] 코스 중 하나였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현릉, version=30)] [[분류:개성역사유적지구]][[분류:태조(고려)]][[분류:고려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