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순신)]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155호}}}''' || || {{{+1 {{{#fff '''아산 이충무공 유허'''}}}}}} {{{-1 {{{#fff 牙山 李忠武公 遺墟}}}}}} {{{-1 {{{#fff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Asan}}}}}}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48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순절지 || || '''{{{#fff 면적}}}''' || 586,992.8㎡ || || '''{{{#fff 관리}}}''' ||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 || || '''{{{#fff 지정연도}}}''' || 1967년 3월 1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 || '''{{{#fff 링크}}}''' || [[http://hcs.cha.go.kr/cha/idx/SubIndex.do?mn=HCS|[[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2]]]] | [include(틀:트위터 로고, 링크=hcskorea, 크기=22)]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아산 이충무공 유허, 너비=360)]}}}}}}}}} || [[파일:external/mw2.google.com/19322882.jpg]] '''顯忠祠''' / '''Hyeonchungsa''' [[http://hcs.cha.go.kr|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목차] == 개요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이순신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1967년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55호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로 지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충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해당 시설의 한글 명칭 끝 글자가 '~사'로 끝나서 이곳을 [[불교]] [[사찰]]로 오해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현충사의 끝 글자 '사'는 사찰을 뜻하는 [[寺]]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祠]]다. 본래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던 곳이었으나, 1995년 옛 [[온양]]시와 아산군이 지금의 [[아산시]]로 통합되면서 현재 행정 소재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다만 행정구역상, 염치읍이긴 해도 온양온천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온양온천역에서 가도 큰 무리는 없다.]에 있다.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다. 이순신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여수시]]의 충민사(忠愍祠), [[삼도수군통제사|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도]]의 충무사(忠武祠) 등이 그 예이다. 현충사는 그 중 대표격인 형태. == 역사 == === 숙종의 현충사 중건 ===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1598년]](선조 34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1706년]](숙종 32년)에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의 숭고한 호국충절의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년) [[숙종(조선)|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아산시|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충(顯忠)' 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성역(聖域)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은 [[숙종(조선)|숙종]]이 친필 사액으로 직접 내린 것. ===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강점기]]의 수난 === [[1865년]](고종 2년) 어린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대신하여 국왕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 명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현충사도 철폐되어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유생들이 충무공의 충성심에 대한 모독과 패륜 행위를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대원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강화함에 따라 현충사는 이를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한때 사라지기도 했었다.[* 이 때 전국에 설치되었던 이순신을 모신 사당 중 [[고성군(경상남도)|고성]]의 [[충렬사(통영)|충렬사]]을 제외하고는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일제 치하에 충무공 종손(13대 종손 이종옥)이 가난해서 고택과 묘소가 포함된 임야, 현충사 부지가 경매에 넘어갔는데, [[1931년]] 5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뜻 있는 인사들이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청전 [[이상범(화가)|이상범]] 화백이 그렸던 영정으로 종가에서 보관 중 없어졌다는 것이 [[2009년]] 확인되었다. 당시 종부가 암시장에 팔았던 유물을 회수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510121815411&code=115|#]]] 이후 봉안식을 하고 현충사 사적비를 건립한다. === [[8.15 광복]] 이후 ===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 [[이순신 장군]]의 성역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1962년]]에는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다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유물 전시관' 이 개장되었고, [[19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敬域)'을 확장하여 [[1967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본전(本殿)과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봤던 시절 지냈었던 가옥과 활터가 개장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주변에 살던 일부 주민들은 이주해 현충사 옆에 이주단지를 구성했다. 다만, 이 때 건축 양식과 현충사 내 내부 구조 등이 일본식으로 구성되어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http://mnews.jtbc.joins.com/News/Article.aspx?news_id=NB10601676|#]] 특히 원래 숙종 때 지어진 본전이 중심에서 밀려나, 측면에 화장실과 같이 있는 것처럼 조성된 것도 이 때 현충사 경내의 설계를 일본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엔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하여 현충사 안에 [[이순신|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개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 관리 == 현재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가 관리 및 운영을 하고 있으며 '''전 국민 무료 입장'''이다. [[2014년]]까지는 매주 화요일에 휴관했지만, [[2015년]] [[1월 1일]]부터는 매주 월요일에 휴관한다. [[http://hcs.cha.go.kr|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 박정희 현판 논란 == ||[[파일:숙종 현판.jpg]]||[[파일:박정희 현판.jpg]]|| || [[1707년]](숙종 33년), 현충사가 세워질 당시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조선)|숙종]]이 직접 사액한 현판 ||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쓴 현판[* 본전에 걸려 있다.]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2/2018010200205.html|'박정희 현판' 철거 두고 싸움 난 이순신 가문]] 현충사는 정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어[* [[박정희]]는 현충사뿐만 아니라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국립서울현충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 다양한 곳에 서예를 써서 보냈다. 이들은 모두 논란없이 유지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정희]]시절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난 것이 반영되어 종부 최순선[* 이 사람도 문제가 많은게 충무공의 15대 종부로 유물을 암시장에 팔아먹고, 종가 재산으로 사업하다 말아먹고 고택까지 경매에 넘긴 전력이 있다.[* 당연하지만 대부업자들도 담보로 잡은 물건이 이순신 장군 유물인 것을 알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현재 충무공 고택은 경매로 넘어가 충무공파가 소유하고 있지 않다.(충무공파의 상위 종파인 풍암공파가 소유)]은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조선)|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난중일기]]의 전시를 중단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 사무소 관계자는 "역사가 더 깊은 왕실 현판으로 교체하는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조선)|숙종]] 현판의 규격이 현재 현판보다 작아 교체할 경우 잘 안 보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846978#csidx9cd3b53bdf8a9cb86ca9c53e6500cb7|#]]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2018년]]까지도 50년 이상을 박정희가 쓴 현충사 현판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쭉 걸어오고 있었다는 소리다. 현충사가 성역화된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와 같은 현충사를 조성한 인물은 박정희다. 박정희 정부가 이순신과 현충사를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했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다니기도 했다. 또한 [[난중일기]]는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고 원본은 수장고에 있을뿐 아니라, 종부에게는 유물을 개인적으로 옮길 권리가 없다. [[대한민국 법원|법원]]이 유물을 팔아먹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충무공파 종중[* 이쪽도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79&aid=0003051144&sid1=103&date=20180103&ntype=RANKING|박정희는 임금]]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탓에 비판받고 있다.]이 제기한 유물 이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누가 쓴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와 "친일행각을 저지른 [[박정희]]가 쓴 현판을 현충사에 걸어놓을 수는 없다"라로 나뉘었다. 이와 별개로 충무공파 종중에서는 '박정희 현판 철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79&aid=0003051144&sid1=103&date=20180103&ntype=RANKING|기사 참조]] 그러나, 숙종의 현판은 본전의 박정희 현판 교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현충사 '구 본관'에 원래부터 걸려 있었다. 즉, 박정희 현판이 숙종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걸려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국가 관리하에 두지 않은 후폭풍이 전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온전히 관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2018년]] [[2월 21일]]에 당시 [[문화재청]](現 [[국가유산청]])은 신 본전([[1967년]] 건축)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2/21/0200000000AKR20180221178151005.HTML?input=1195m|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숙종(조선)|숙종]] 친필 현판은 1932년 중건된 舊 본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만큼 박정희의 현판이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거꾸로 신 현충사가 [[박정희]] 정부의 작품인 만큼 오히려 현판 철거가 역사성과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현판을 함부로 떼는 과정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한 번 났다간 건물에 손상이 가 버린다. [[박정희]]를 둘러싼 논란(구체적으로는 일제 시대 당시의 행적, 충무공 현양의 정치적 이용)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현충사를 다시 성역화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현판이 논란 끝에 존속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점을 참작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러한 논란을 지닌 곳이 같은 [[충청남도]] [[예산군]]에 자리한 [[충의사]](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라는 곳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이 곳 사당의 현판 역시 박 대통령의 친필이라서 민족주의 성향의 지역시민단체에서 비판하거나 [[|심지어 철거한 일]]까지 벌어졌다.] == 시설 == 현존하는 현충사 건물은 [[일제강점기]] ~ [[광복]] 이후에 지어졌다. 다시 말해서 중건, 복원 형태이므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원형에 비해 유적으로서의 가치는 낮은 편이다. === 충무문(忠武門) === [[http://ilsung.ilsungcondo.co.kr/cheditor/attach/1_copy207.jpg]]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옥 모습의 문으로,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지시에 따라 세워진 관문이다. === 충의문(忠義門) ===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33372635.jpg]] 현충사 본전의 정문으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세워졌다가, [[1967년]] 본전이 확장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개축하여 지어진 관문이다. === 홍살문 === 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문. === 본전(本殿) === [[파일:external/hcs.cha.go.kr/visual_m01_cont.png]] [[1967년]] 현충사 성역화에 따라 확장이전하여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 당시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전통 건축물을 복원하는 관행이 흔했는데, 지금은 없어진 옛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방식의 복원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웃 [[일본]]에서 1950~60년대에 [[시텐노지]]를 복원했을 때도 전통 방식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다.]로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과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영기(令旗)가 보존되어 있다. 옛 본전 위의 자리에 지금의 본전을 신축하여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옥의 티가 있다면 사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나 새로 만든 본전은 팔짝지붕이다. 당연하게도 구 본전은 맞배지붕이다. 참고로 현재 내걸려 있는 한글 현판은 성역화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으로 예전에 걸려있는 현판은 구(舊) 본전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다. 舊 본전은 현충사 한켠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아일보가 현충사를 새로 중건하며, [[1707년]](숙종 33년) [[숙종(조선)|숙종]]이 내려준 현판을 걸고 다시 세운 것이 舊 본전. === 구(舊) 본전 === [[파일:external/hcs.cha.go.kr/visual_m04_cont.png]] [[1707년]](숙종 33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조선)|숙종]]의 어명하에 따라 최초로 지어진 본전이자 예전에 [[이순신|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던 사당. [[숙종(조선)|숙종]]이 직접 하사한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는 영정이 [[1967년]]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본전으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만 남아 보존, 전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1910년]](융희 4년) [[일본 제국|일제]](日帝)의 탄압 등으로 쇠퇴의 기로 및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가 [[1932년]]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들 전국 각지의 모금으로 다시 전면 중건되었고,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규모에 있어서는 처질지 몰라도 역사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가치가 확실히 높은 곳이다. === 고택(古宅) === [[파일:external/hcs.cha.go.kr/visual_m03_cont.png]]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상주 방씨]])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지금의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상술한 종부의 만행 때문에 경매에 넘어갔다가 덕수 이씨 풍암공파[* 풍암공파는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풍암공 이백록의 후손이며, 충무공파는 풍암공파의 분가이다.]에게 낙찰받았다([[http://www.chpri.org/board/content.asp?bCode=7182|기사]]). === 활터 ===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활터로 이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수령 약 500년 이상.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충청남도]] [[보호수]](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있고 충무공이 늘 사용했다는 과녁판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안내 지도원의 안내에 따라 충무공이 사용했다던 과녁을 향해 직접 국궁 체험을 할 수가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가서 체험하길 바란다. === 충무정(忠武井) === 충무공과 가족들이 고택에 살던 시절에 사용했던 우물가로 원래는 이름이 없는 우물가였으나 충무공이 전사하고 '충무(忠武)' 라는 시호(屍號)가 내려지면서 그의 시호를 본따 충무정이라 불렀다. 현재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관람객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 정려 === 충무공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정려로 본래는 마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 성역화 사업으로 위치를 바꿔 옮겨놓았다.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그의 조카인 [[이완(1579)|이완]], 후손인 [[이봉상]]과 이홍무, 이제빈 등 충신 4명과 효자 1명의 정려가 걸려있다. === [[이면(조선)|이면]] 묘소 === 고택과 활터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곳[* 활터와 고택 사이에도 충무공 집안의 묘소가 몇 기 있다.]으로 [[1597년]](선조 34년) 충무공의 외가가 있는 [[아산]]에 각종 해전에서 패해 복수심에 쳐들어 온 왜군을 상대하다 수적열세에 전사한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조선)|이면]]의 시신을 모셔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기 외할아버지([[방진]]), 외할머니 곁에 모셨으므로 왜군에 당한 치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 舊 유물 전시관 === 거북선을 비롯해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 및 유품들을 전시했던 곳으로 성역화 사업 중인 [[1962년]]에 세워졌으나 노후와 등의 이유로 [[2011년]]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건립된 이후에 철거되었고, 그 흔적은 현재 舊 본전 옆에 남아있다. ===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 [[파일:external/hcs.cha.go.kr/visual_m05_cont.png]] [[이순신|충무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이자 국립 박물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기존 '舊 유물 전시관'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새로 지은 건물로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도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원래는 정문인 충무문을 지나 현충사 경내에 자리했었다.], 충무공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 9월부터 전면 개편을 위해 [[https://hcs.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86848&bbsId=BBSMSTR_1073&pageIndex=1&pageUnit=10&searchCnd=&searchWrd=&mn=HCS_05_03|휴관 중]]이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아산_이충무공_유허|한국어 위키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 [[https://ko.wikipedia.org/wiki/현충사|한국어 위키백과: 현충사]]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9394&cid=46622&categoryId=46622|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산이충무공유허]]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7804&cid=46622&categoryId=46622|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충사]]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913026&cid=66498&categoryId=66542|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 이충무공 유허]]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849&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아산 이충무공 유허]]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9&cid=42865&categoryId=42865|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현충사]]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3182&cid=40942&categoryId=33542|두산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 대한민국 사적 제155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1550000,34&pageNo=1_1_1_0|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는 국보76호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보물 1564호 16점 (선무공신교서, 기복수직교서 등) 등이 소장되어 있다. [[분류:이순신]][[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사당]][[분류:아산시의 문화재]][[분류:조선/건축]][[분류:화폐의 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