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서출]][[분류:1407년 출생]][[분류:1440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태종의 왕자'''[br]{{{+1 '''혜령군 | 惠寧君'''}}}}}}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혜령군묘.jpg|width=100%]]}}} || ||<-2> {{{#ffd400 {{{-2 혜령군묘 전경}}} }}} || || '''출생''' ||[[1407년]] || || '''사망''' ||[[1440년]] [[8월 1일]]^^([[음력]] [[6월 25일]])^^ (향년 34세) || || '''묘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13-88 || || '''휘''' ||정(𥘺) / 지(祉) || || '''부왕''' ||[[태종(조선)|태종]] || || '''생모''' ||[[선빈 안씨]](善嬪 安氏) || ||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8남 || || '''배우자''' ||낙안군부인 [[무송 윤씨]][br](樂安郡夫人 茂松 尹氏, {{{-3 1405 ~ 1442}}}) || || '''자녀''' ||'''1남 3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예천군 이수(醴泉君 李洙, {{{-3 1422 ~ 1455}}}) 장녀 - [[원주 원씨]] 원맹수(元孟穟)의 처 차녀 - [[신 안동 김씨]] 김수녕(金壽寧)의 처 3녀 - [[원주 원씨]] 원보강(元甫崗)의 처 }}} || || '''작호''' ||'''혜령군(惠寧君)''' || || '''자''' ||선여(善餘) || || '''호''' ||동계(桐溪) || || '''시호''' ||양혜(良惠)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의 8남이자 서4남으로, 어머니 [[선빈 안씨]]에게는 [[장남]]이다. 친남매로는 누이 [[소숙옹주]]와 [[경신옹주]], 남동생 [[익녕군]]이 있다. == 봉호의 발음 == [[태종(조선)|태종]] 아들들의 [[봉호]]는 전부 가운데에 ‘편안할 녕(寧)’ 자가 들어가있다. 그런데 혜령군의 봉호는 ‘녕’이 아닌 ‘령’으로 읽는다. 물론 ‘寧’의 원래 발음이 ‘녕’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혜녕군’이 맞다. 하지만 예전부터 '寧'의 앞 글자가 받침이 없는 경우 활음조 현상으로 인해 '령'으로 읽고 썼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혜령군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 둘째 적형(嫡兄) [[효령대군]]과 이복동생 [[희령군]], [[후령군]]의 봉호 발음도 같은 경우이다. == 생애 == 1427년([[세종(조선)|세종]] 9년) 10월에 홍녕군(弘寧君)에 봉해졌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10027_005|#]], 2년 후 [[봉호]]가 혜령군(惠寧君)으로 바뀌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6011_002|#]] 1438년(세종 20년)에는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베이징]]에 가 [[정통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공을 세워 [[안장]]과 [[말(동물)|말]]을 하사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5025_001|#]] == 사망과 이후 == 1440년([[세종(조선)|세종]] 22년) 6월 7일에[* 음력 5월 12일.]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5012_001|#]] 향년 33세.[* [[세는나이]] 34세.] [[무덤|묘]]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있다. == 여담 == * 행실은 별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만하고 방자한 성격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놀기만 좋아했다고. 남의 기생 첩을 빼앗지를 않나, 종학[* 宗學. [[조선시대]]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운 특수 교육기관.]에서도 행패를 부리지를 않나. * 1430년([[세종(조선)|세종]] 12년) 새해 첫날에 열린 [[조회]]에서, 혜령군이 동갑내기 이복형제인 [[온녕군]]과 함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홀#s-7|홀]]로 신의군[*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의 손자. 온녕군과 혜령군의 [[5촌]] 당조카이다.]의 양관(梁冠)[* [[조복#s-4|조복]]을 입을 때 쓰는 금관.]을 때렸고 그러자 화가 난 신의군이 온녕군의 양관을 걷어차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종부시[* 종친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일을 맡던 관서.]에서는 도리어 신의군을 탄핵했다. 아무리 혜령군과 온녕군이 잘못했다해도 당조카가 어떻게 당숙의 관을 걷어찰 수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신의군은 한성 밖으로 쫓겨났고 그의 [[종]]과 [[노비|관노비]], [[하인]]들은 몰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1014_001|#]] * 같은 해 6월에는 종학에서 온녕군과 크게 싸웠다. 종부시에서는 이를 지적했고 [[세종(조선)|세종]]은 그의 직첩과 관노비와 땅을 모두 거둬들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6018_001|#]] 직첩은 몇 달 뒤에 돌려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2114_003|#]] *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마침 근처에 있던 [[문종(조선)|이복조카]][* 나이차이는 7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이 17살에 문종을 낳았고 혜령군은 세종보다 10살 아래였기 때문.]가 구해줘서 살아난 일화가 있다. == 가족과 후손 == 낙안군부인 무송 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큰딸은 원맹수와 혼인했고, 둘째딸은 안동김씨 복창군 김수녕, 셋째딸은 원보강과 혼인하였다. 유일한 아들인 예천군 이수(醴泉君 李洙)는 슬하에 3남을 두었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혜령군파를 이루고 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온녕군, version=4)][include(틀:표절, version=19 ~ 26, source=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