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07년 출생]][[분류:560년 사망]][[분류:후저우시 출신 인물]]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한양장후(漢陽壯侯)[br]{{{+1 胡穎 | 호영}}}''' || || '''작위''' ||한양현후(漢陽縣侯) || || '''시호''' ||장(壯) || || '''성''' ||호(胡) || || '''이름''' ||영(穎) || || '''자''' ||방수(方秀) || || '''생몰''' ||507년 ~ 560년 || || '''출신''' ||오흥군(吳興郡) 동천현(東遷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진(남조)|남진]]의 장수로 자는 방수(方秀). 오흥군(吳興郡) 동천현(東遷縣) 출신. == 생애 == 호영은 용모가 뛰어났고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 호영은 양나라에서 무릉국시랑(武陵國侍郞)까지 이르렀고 동궁직전(東宮直前)을 역임하였다. 또한 번우(番禺)로 출병하여 이동(俚洞)을 토벌했으며, 광주(廣州) 서강독호(西江督護)로 있었던 진패선과 교분을 맺었고 진패선은 호영이 자신과 같은 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호영을 후대하였다. 호영은 뒤에 진패선이 교지(交趾)를 정벌할 때 종군했으며, [[리비|이분]]을 토벌한 뒤 진패선이 개선할 때 서강(西江)에 남았다. 549년, [[후경]]의 난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호영은 진패선이 광주 자사 원경중(元景仲)을 토벌할 때와 채노양(蔡路養), 이천사(李遷仕)를 토벌할 때 모두 공을 세웠다. 뒤에 평고현(平固縣)과 수흥현(遂興縣)의 현령을 역임하였다. 551년, 진패선이 서창(西昌)에 주둔할 때 호영은 파구현령(巴丘縣令)이 되어 대고(大皐)에 진수하며 군량의 수송을 담당했다. 진패선이 예장(豫章)에 입성한 뒤 감예장군(監豫章郡)을 맡았다. 552년,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하고자 백모만(白茅灣)에서 왕승변과 합류했을 때 호영은 유수(留守)를 맡았다. 이후 호영은 [[효원제]]에 의해 가절(假節), 철기장군(鐵騎將軍), 나주(羅州) 자사로 임명되고 한양현후(漢陽縣侯)에 봉해져 식읍 500호를 받았다. 호영은 뒤이어 예장 내사에 제수되었고 진패선과 함께 경구(京口)에 진수하였다. 553년, [[북제]]의 곽원건이 합비(合肥)를 침공하자, 도독 후진이 출병하여 이를 막아내려고 했다. 진패선은 3,000명의 용맹한 병사들을 선별하여 호영에게 주고 후진을 따르도록 명했으며, 동관(東關)에서 곽원건을 물리쳤다. 554년, 진패선이 광릉(廣陵)을 포위할 때 동방광(東方光)이 숙예(宿預)에서 투항하자, 호영을 오원(五原) 태수로 삼고 [[두승명]]과 함께 동방광을 구원하도록 명했으나 북제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뒤에 곡아현령(曲阿縣令)에 제수되었다. 555년, 기병을 거느리고 진패선이 왕승변을 토벌할 때 종군하였고, [[주문육]]을 따라 오흥에서 두감을 토벌하였다. 같은 해, 호영은 가절, 도독남예주제군사(都督南豫州諸軍事), 경거장군(輕車將軍), 남예주 자사에 제수되었다. 556년, 지절(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인위장군(仁威將軍)으로 제수되었고 뒤에 단양윤(丹陽尹)을 겸임하였다. 557년, 진패선이 양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경제(양)|경제]]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고 남진을 건국하여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고조 무황제]]였다. 호영은 좌위장군(左衛將軍)을 겸임했고 나머지는 종전과 같이 받았다. 559년, [[후안도]]를 따라 왕림을 정벌할 때 종군했고 궁정(宮亭)에서 상중애(常衆愛) 등을 물리쳤다. 같은 해에 무제가 붕어하고 진패선의 조카인 임천왕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남진)|세조 문황제]]였다. 호영은 문제가 즉위한 뒤 시중(侍中), 도독오주제군사(都督吳州諸軍事), 선혜장군(宣惠將軍), 오주 자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의흥(義興) 태수가 되었으며, 선혜장군은 종전과 같이 받았다. 560년, 산기상시, 오흥(吳興) 태수로 제수되었고 그 해에 죽었다. 호영은 시중, 중호군(中護軍)으로 추증되고 장(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61년, 진패선의 사당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