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장수[br]{{{+1 扈再興 | 호재흥}}}}}}'''}}} || || '''{{{#fff 성}}}''' ||호(扈) || || '''{{{#fff 이름}}}''' ||재흥(再興) || || '''{{{#fff 자}}}''' ||숙기(淑起) || || '''[[주군|{{{#fff 주군}}}]]''' ||[[영종(남송)|송영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扈再興 생몰년 미상. 자는 숙기(淑起)로, 남송의 무장이며, [[가섭]], [[맹종정]]과 함께 남송의 항금명장이다. 체력이 있고, 임기응변에 능하여 매 전투마다 선봉에 서서 용감히 돌진하였다고 한다. == 생애 == 가정 10년(1217), 금군은 양양·조양을 공격하였다. 호재흥과 맹종정(孟宗政), 통제(統制) 진상(陳祥) 등이 3진(陣)으로 나누어 복선하였다. 자영군 중 한 차례를 나와 금군을 복수로 유인하여 물러나는 척하였고 금군이 쫓아가자 맹종정과 진상이 좌우에서 합세함으로써, 금군은 대패하고 만다. 호재흥은 이 공으로 신강군통제를 수여받는다. 11년, 금군 수만 명이 다시 조양을 공격하여 호재흥이 군사를 거느리고 지원하자, 금군은 소문을 듣고 밤새 패주하여 호재흥이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금군이 다시 성을 포위하여 90일을 버티고 있었다. 호재흥이 마름쇠로 적을 막아내었고, 새벽에 마름쇠를 밟은 자는 대부분 죽었다. 금군은 패퇴하고, 호재흥은 군사를 일으켜 15리까지 추격하였다. 그 후 금군이 성 동쪽을 공격하였는데, 박남문(朴南門)의 북쪽 구석을 호재흥(扈再興)과 맹종정(孟宗政)·유세흥(劉世興)이 각각 상대하여 금군은 수십 합의 전쟁을 치르고 크게 패하였다. 12년, 금 원수 완안와가는 체면을 차리고 성을 공격하고, 이에 호재흥과 맹종정이 적을 섭호하고 반도하여 격파하였으며, 또 보를 지키는 장병들을 퇴각시키고, 보를 다투다가 급격격을 가해 금군을 물에 빠뜨렸다.성 아래를 메운 뒤 호재흥은 금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금군을 살상했다. 금군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깃발과 갑옷을 버렸고, 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 후에 또 대전하였는데 금군이 패하였다.호재흥이 박호에 이르러 순검항사예주(巡檢抗師禮酒)와 도감 납란복창(納蘭福昌)을 사로잡아 장정들을 항복시키고 소와 말을 많이 잡았다. 이때부터 맹종정(孟宗政), 유세흥(劉世興)과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14년, 호재흥은 순창현을 격파한 뒤, 말 삼천 필을 빼앗고, 석천진을 격파한 이후, 금군 300인을 죽였다. 말의 층계까지 쫓아가서 성책을 태우고, 패금은 등하(鄧河)에서 호위하고, 다시 등주에 들어가서 머리를 부수고, 패금은 보군 5천, 기군은 5백으로 쌓였다.고두(高頭)에 진을 치고 당주로 진격하였다. 3개 강에 이르러 금의 기병 2천, 보군 7천이 성을 나가 싸우다 호재흥이 이를 패퇴시켜 적을 10대 8로 죽이고 금병을 성 아래로 쫓아내었다.금의 장군은 의로운 자로부터 잔기를 거두어 삼백 분성을 타고 다시 거문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참종하였다. 호재흥은 당주를 포위하여 군사를 나누어 주경을 소탕하고 금군의 귀로를 차단하여 오래도록 진을 치고 대기하였으며, 이후 금의 잔병들을 토벌한다. 이후 공으로 악주부도통이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병사한다. [[분류:송나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