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옹주]][[분류:1753년 출생]][[분류:1821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4153e 0%, #94153e 20%, #94153e 80%, #94153e)" '''{{{#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br]{{{+1 화령옹주 | 和寧翁主 }}}}}}'''}}} || || '''{{{#gold 출생}}}''' ||<-2>[[1753년]]^^([[영조]] 29년)^^ [[4월 5일]][* [[음력]] [[3월 2일]]]|| || '''{{{#gold 사망}}}''' ||<-2>[[1821년]]^^([[순조]] 21년)^^ [[9월 28일]][* [[음력]] [[9월 3일]]][br]{{{-2 (향년 69세)}}} || || '''{{{#gold 부왕}}}''' ||<-2>[[영조]] || || '''{{{#gold 생모}}}''' ||<-2>[[숙의 문씨(영조)|폐숙의 문씨]] || || '''{{{#gold 부군}}}''' ||<-2>청성위 [[청송 심씨|심능건]](靑城尉 沈能建) || || '''{{{#gold 자녀}}}''' ||<-2>'''슬하 1남 2녀''' 장남 - 심의장(沈宜長) 장녀 - 이규신(李奎信)의 처 차녀 - 이재교(李在敎)의 처 양자 - 심의관(沈宜寬)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영조]]의 서11녀. 어머니는 [[숙의 문씨]]로 [[동복형제|동복]] 여동생으로 [[화길옹주]]가 있다. == 생애 == 1764년(영조 40) 10월 16일, 삭녕군수 심정지의 아들 심능건이 부마로 간택되었다. 두 달 후, 가례청이 설치되고 혼인을 치렀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 [[숙의 문씨]]가 살아있었기에, 어머니의 보호 아래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화령옹주의 어머니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를 음해한 죄인이라고 매도당했고, 문씨의 친척들도 그동안 저지른 악행들이 알려지면서 죄인으로 전락하고 처벌받았다.[* 화령옹주의 외조모인 숙의 문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노비가 되었고, 외삼촌인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도 가산을 적몰당했다. 또한 화령옹주의 외사촌들인 문성국의 아들들도 전부 유배를 가거나 처벌받았다.] 결국 어머니 숙의 문씨는 폐서인이 되어 유배를 간 뒤 사약을 받아 처형당했다. 동생 화길옹주는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문씨의 살아있는 유일한 자녀는 화령옹주 뿐이었고, 조정에서는 [[효종(조선)|효종]] 대에 [[귀인 조씨(인조)|귀인 조씨]]의 자식들이 처벌받은 예를 들며 화령옹주도 직첩을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 옛날 내가 세 살 때를 기억해 보면, 대행 대왕께서는 화령옹주(和寧翁主)가 나와 말하는 것을 보시고는 나에게 다시는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5월 13일 이 상황에서 정조는 일찍이 영조가 화령옹주와 자신이 놀지 못하게 했던 데는 다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는 말까지 했다.[* 영조가 이런 말을 한 배경은 이렇다. 과거 영조는 이복형제 [[연령군]]과 각별한 정이 있었다. 하지만 연령군 집에 [[명빈 박씨]]의 신주가 있었고, 또 명빈 박씨의 장례를 치를 때 관곽이 좋지 않아 숙종이 관원을 처벌하는 등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연령군 집에 발걸음하지 않았다고 정조를 깨우쳤다. 즉, 숙의 문씨가 있으니 화령옹주와 사사롭게 지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화령옹주까지 연좌제로 폐출시키거나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과거에 똑같이 옹주의 직첩을 빼앗긴 [[효명옹주]]는 어머니 [[귀인 조씨(인조)|귀인 조씨]]와 함께 악행을 저지른 정황이 있었지만, 화령옹주는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악행에 동조한 정황조차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한 정조는 숙의 문씨가 한창 사도세자를 음해했을 당시의 화령옹주는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였을 뿐이라고 보호했다. 이러한 정조의 선처 덕분에 화령옹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화령옹주는 1821년(순조 21)에 사망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장생전[* 국상에 사용할 관곽을 미리 마련하여 보관하는 관청.]의 퇴판 1부를 보내주며, 화령옹주의 장례를 왕실 종친의 예우로 치러주었다. == 가족 관계 == * 부 : [[영조]](英祖, 1694 ~ 1776) * 모 : [[숙의 문씨(영조)|폐숙의 문씨]](廢淑儀 文氏, ? ~ 1776) * 동생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 ~ 1772) * 시부 : 심정지(沈鼎之, 1722 ~ 1791) - 청릉부원군 심강(靑陵府院君 沈鋼)의 9대손이자 [[심의겸]]의 8대손 * 시모 : 증 정경부인 [[경주 김씨]](贈 貞敬夫人 慶州 金氏) - 김흥경(金興慶)의 딸이자, [[화순옹주]]의 올케 * 남편 : 청성위 [[청송 심씨|심능건]](靑城尉 沈能建, 1752 ~ 1817) * 장남 : 심의장(沈宜長) - 요절[* 20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죽었다. ] * 장녀 : 이규신(李奎信)에게 하가 * 외손자 : 도사 이민시(都事 李敏時) * 외손자 : 이민수(李敏樹) * 외손녀 : 서경보(徐慶輔)의 처 * 외손녀 : 유양주(兪陽柱)의 처 * 외손녀 : 원석홍(元錫弘)의 처 * 외손녀 : 정윤수(鄭允秀)의 처 * 차녀 : 이재교(李在敎)에게 하가 * 양자 : 심의관(沈宜寬) - 통덕랑 심능렬(通德郞 沈能烈)의 차남[* 후일 1809년(순조 9) 증광시에서 합격하여 생원이 된다.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09_028407&curSetPos=3&curSPos=1&category=dirSer&isEQ=false&kristalSearchArea=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