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황남대총)]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1.jpg]]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2.jpg]] [목차] == 개요 == 皇南大塚 環頭大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제 [[환두대도]] 2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3.jpg]] [[http://blog.daum.net/gijuzzang/8515271|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황남대총]]에서 [[신라]]시대 금은장환두대도 총 10점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순금으로 장식한 [[고리자루큰칼]] 2점이다. 경주 보문리 부부총 순금 삼엽환두대도, 경주 성주 성산리 1호 고분 금제 환두대도, 경북 의성탑리 고분 황금 환두대도와 양식이 비슷하다.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라고 추정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4.jpg]] 황남대총 환두대도에서 황금으로 이루어진 손잡이 부분의 문양이 당시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문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4~5세기 당시 신라인들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아 검을 장식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이 검은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고구려 도검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05463&cid=62008&categoryId=62008|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전강서군금관'을 통해 살펴본 고구려의 정치이념]]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5.jpg]]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6.jpg]]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7.jpg]] [[파일:황남대총 환두대도8.jpg]] 사진 출처 : [[역사스페셜]] 153화 고대사 미스터리, 무덤 속의 칼, 환두대도 또한 이 검들은 동시에 [[백제]] [[무령왕릉]] 금동 단룡환두대도에서 보이는 백제 문화의 영향력 또한 배여 있다.[[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GnZ5&articleno=5548550|무덤 속의 칼, 환두대도]] 먼저 발굴된 무령왕릉 환두대도 환두 안에는 삼엽문양이 있다. 신라의 고유한 문양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백제 왕실이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후 황남대총 환두대도에서 백제의 양식 또한 발견되면서 백제와 신라 두 국가가 서로 동등하게 문화를 교류하며 친밀을 다졌음을 확인하였다. 2008년에는 이 황남대총 환두대도가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의 도검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다.[[http://www.shinmoongo.net/5377|황남대총 환두대도는 '칠지도 의 원형']] [[분류:도검]] [[분류:신라의 금제유물]] [[분류: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분류:경주시의 문화재]] [[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 [[분류:황남대총]] [[분류:환두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