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황정연}}}[br]黃正淵'''}}}}}} || || '''본관''' ||[[황(성씨)|장수 황씨]][* 소윤공파(少尹公派)-지례공계(知禮公系)-사정공파(司正公派) 23세 ◯연(淵) 항렬.]|| ||<|2> '''출생''' ||[[1891년]] [[2월 25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아랫한두리[br](現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문경)|산북면]] 대상리 32)[* 인근의 대하리와 함께 [[황(성씨)|장수 황씨]] 집성촌이다.]|| ||<|2> '''사망''' ||[[1955년]] [[1월 10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br](現 [[부산광역시]])||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황옥(1887)|황옥]]과 독립유공자 [[황직연]] 형제는 그의 사촌 형이다.[* 아버지 황의헌(黃義憲)은 본래 황태주(黃泰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이후 7촌 재종숙(再從叔)인 황면주(黃冕周, 이명 황진주黃眞周)에 입양되었다. 황옥·황직연 형제는 황태주의 장남인 황의만(黃義晩)의 차남·3남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황정연에게는 본생가 쪽 사촌 형이 된다.] == 생애 == 1891년 2월 25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아랫한두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상리 32번지)에서 아버지 황의헌(黃義憲, 1852 ~ ?)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협(李協)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의헌은 1891년([[고종(조선)|고종]] 28) 식년시 생원시에 2등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278|입격하고]] 1903년 5월 14일 [[경기전]] [[참봉]](종9품)에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0_05A_14A_00050|제수되었으나]], 이튿날인 5월 15일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0_05A_15A_00060|사직했다]]. 그는 장수 황씨 문중에서 설립한 한두리의 도천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본생가 7촌 재종숙(再從叔)인 황의필(黃義弼, 1866 ~ 1931. 2. 9)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1908년 교남교육회에 평회원으로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뒤 1919년 12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으로 이주하였으며, 1921년 3월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같은 해 그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1881)|박용만]]·[[이회영]]·[[신채호]] 등이 주도 조직한 제2회 보합단(普合團)에서 마침 경리부장을 담당하던 고향 후배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6610|김희중]](金熙重)의 권유를 받고 제2회 보합단 국내지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김희중은 태평양회의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내 각지에 독립단을 결성할 목적으로 그해 8월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희중은 9월 평소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1439|이춘구]](李春求) 등과 모임을 갖고 태평양회의의 개최에 발맞추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며 이를 위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지방의 유력인사들을 모집하고 폭탄 및 무기를 들여와 충청북도 괴산군에 군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임을 알렸다. 이에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조선독립군사령부를 조직키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모의를 계속하였고, 이때 황정연은 [[상하이]]와 [[베이징]], [[경기도]] [[경성부]]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를 오가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7촌 재종숙(再從叔) 황의목(黃義睦, 1871. 5. 24 ~ 1940. 6. 15)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4,000여 원의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말 김희중이 친일경관 [[김태석]]의 밀정 김인규(金寅圭)의 농간으로 체포됨으로써 황정연도 연루, 체포되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http://db.history.go.kr/id/pj_002_0070_0010|#]]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制令)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3&evntId=0034974546&evntdowngbn=Y&indpnId=000000673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복역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고막]]을 상실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출옥 후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로 돌아가 1928년 10월까지 살았으며, 이후 고향인 문경 아랫한두리로 돌아가 [[8.15 광복]] 전까지 요양 생활을 지속했다. 한편, 집안 식구들은 황정연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자 1935년을 전후하여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한다.[[https://m.blog.naver.com/lys0002/70144287322|#]] 8.15 광복 후 집안 식구들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 [[부산시]]로 이주하여 살다가, 195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황정연, version=47)]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문경시 출신 인물]][[분류:장수 황씨]][[분류:1891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