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70000, #670000 20%, #670000 80%, #670000)" {{{#FFD400 '''효령태자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70000, #670000 20%, #670000 80%, #670000); color: #FFD400" '''고려 의종의 왕태자[br]{{{+1 효령태자 | 孝靈太子}}}'''}}} || ||<|2> '''출생''' ||[[1149년]] [[6월 4일]] || ||[[고려]] [[개경]] [[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책봉''' ||[[1153년]] [[4월 20일]] || ||<|2> '''사망''' ||[[1175년]] 이후 (향년 26세 이상)|| ||미상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ffd400 고려 왕태자}}}''' || ||[[1153년]] [[4월 20일]] ~ [[1170년]] [[9월 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홍(泓) → 기(祈) || || '''부모''' ||부왕 [[의종(고려)|의종]][br]모후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 || || '''형제자매''' ||[[의종(고려)#가족관계|1남 3녀 중 장남]] || || '''배우자''' ||태자비 [[개성 왕씨|왕씨]][* [[왕감(강양공)|강양공 왕감]]과 [[덕녕궁주]]의 딸…이라고는 하는데 《고려사》 공주열전에서 덕녕궁주가 '''친남매'''인 [[의종(고려)|의종]]과의 추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그녀의 생물학적 친부가 강양공 왕감이 아니라 의종이라면 효령태자와의 혼인은 '''이복남매 간 근친'''에 해당된다.] || || '''자녀''' ||'''1남'''[br]태손(太孫) [[개성 왕씨|왕씨]] || || '''시호''' ||효령태자(孝靈太子) ||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왕족. [[의종(고려)|의종]]의 [[태자]]였으나 부왕이 [[무신정변]]으로 쫓겨남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 생애 == 의종 3년인 1149년 4월 27일(음력) 의종과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의 [[원자(왕족)|원자]]로 태어난다. 의종 7년인 1153년 1월 홍(泓)이라는 이름을 받는데, 이후 기(祈)로 바꾼다. 같은 해 4월에 태자로 책봉된다. 의종 11년인 1157년 왕이 민가 50여채를 헐어 지은 [[의종 대 별궁|수덕궁]] 대평정의 편액을 어명으로 쓰게 된다. 의종 16년인 1162년 11월 성년이 되어 [[관례#s-2|원복]]이 더해진다. 의종 22년인 1168년 1월 [[왕감(강양공)|강양백 왕감]]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며 의종 24년인 1170년 4월 수성(壽星)이 출현하니 [[복원궁]]에서 초제를 지낸다. 같은 해 9월 [[정중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은관(迎恩館)에 보내졌다가 다음날 바로 [[전라도]] [[진도군|진도현]]으로 유배된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반역열전 정중부 편에 따르면 태자비와의 사이에서 태손(太孫)인 아들이 있었는데 정중부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 평가 == 후일 [[명종(고려)|명종]]이 즉위한 뒤, 의종의 '퇴위'와 동생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해명하기 위해 [[금나라]]에 보낸 표문에 태자가 "어려서는 지혜가 없고, 자란 뒤에도 허물이 많았다."[* 少而無慧, 長且多愆.]라고 묘사했다. [[분류:고려의 왕태자]][[분류:개성 왕씨]][[분류:1149년 출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즉위하지 못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