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원위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3 0%, #DC143C 20%, #DC143C 80%, #9C0013); color: #ece5b6" '''북위 제7대 황제[br]{{{+1 고조 효문제 | 高祖 孝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tgljw.com/201110130832170078562.jpg|width=100%]]}}} || ||<|2> '''출생''' ||[[467년]] [[10월 13일]] || ||[[북위]] [[산시성(산서성)|대군]] [[다퉁시|평성]] 황궁 자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시]]) || ||<|2> '''즉위''' ||[[471년]] [[9월 20일]] || ||[[북위]] [[산시성(산서성)|대군]] [[다퉁시|평성]] 황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시]]) || ||<|2> '''사망''' ||[[499년]] [[4월 26일]] (향년 32세)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곡당원 행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장릉]](長陵) || ||<|4> '''재위기간''' ||'''{{{#ece5b6 북위 황태자}}}''' || ||[[469년]] [[6월 27일]] ~ [[471년]] [[9월 20일]] || ||'''{{{#ece5b6 제7대 황제}}}''' ||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탁발부|탁발(拓跋)]] → [[원(성씨)|하남 원씨]][* 한화정책을 펼치면서 성을 바꾸었다.] || || '''휘''' ||굉(宏) || || '''부모''' ||부황 [[헌문제|현조]][br]모후 문사황후 || || '''형제자매''' ||7남 5녀 중 장남 || || '''배우자''' ||문정황후, 폐후 풍씨, 문유황후, [[문소황후 고씨|문소황후]] || || '''자녀''' ||7남 9녀 || || '''종교''' ||[[불교]] || || '''묘호''' ||'''[[고조]](高祖)''' || || '''시호''' ||효문황제(孝文皇帝) || || '''연호''' ||연흥(延興, [[471년]] ~ [[476년]])[br][[승명]](承明, [[476년]])[br][[태화(연호)|태화]](太和, [[477년]] ~ [[499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7대 [[황제#s-2|황제]]. 묘호는 고조(高祖)였으며,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였다. 휘는 굉(宏)이었고, 제6대 황제인 현조 [[헌문제]]의 장남이었다. == 생애 == === 친정 이전 === 헌문제(獻文帝)의 장남으로 황흥(皇興) 원년(467)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에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 황흥 5년(471) 부황 헌문제가 적모(嫡母)인 문성문명황후 풍씨, 즉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가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에 의해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탁발굉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태황태후 풍씨는 헌문제의 치세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했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祿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중앙재정[* 공조(公調)]과 지방재정[* 조외(調外)]을 분리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에 사망했는데, 당시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5일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4개월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효문제의 실제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 친정 이후 === 490년, 풍태후가 죽자 친정을 시작했다. ==== [[한화#s-3]]정책 ==== [include(틀: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민족 및 문화정책)] [[위진남북조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책 중 하나이다. 역사상 고조 효문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업적이다. 효문제는 '''한화(漢化)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대개혁을 시작했다. 이는 선비족이 적극적으로 한문화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친 이유는, [[선비족]]이 포함된 [[오호#s-2|5호]](선비, [[흉노]], [[저족|저]], [[갈족|갈]], [[강족|강]])는 관료제에 입각한 국가를 경영한 적이 없어서 나라를 세워도 금방 분열되고, 붕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진]]의 약화를 틈타 북중국을 정복할 수는 있었지만, [[문맹]]인 유목민 정복자들이 이전의 한족 왕조들처럼 정교한 관료제를 유지하기는 힘들었고, 결국 이들이 세운 왕조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다가 단명하고 말았다. 특히 북조에서는 한족에 의한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났는데, 이는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이 농업경제에 대한 몰이해로 의도했든지, 의도치 않았든지 간에 지나친 착취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선비족 출신의 효문제는 이런 문제점을 깨닫고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한문을 배우고 유교 및 불교의 소양을 익히게 하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해서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는 유목민족인 5호가 세운 나라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한화된 선비족이자 지역 군벌집단인 소위 [[관롱집단]]은 전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시절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써 500년간 선비족은 중국의 지배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선비족은 당(唐)나라 시대에 이르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스스로 한인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 [[뤄양|낙양]] 천도 ==== 동호계인 탁발선비가 세운 [[대(오호십육국시대)|대나라]]는 '''평성'''(현재의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에 도읍을 두었으나 티베트계의 [[저족]]이 세운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명군 [[부견]]에 의해 멸망했다. [[천하통일]]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한족 왕조인 [[동진]]에게 대패하고 추락하자,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이끄는 선비족이 평성에서 일어나 북위를 건국했을 정도로 평성은 선비족의 기반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문화 수준이 낮은 곳인 데다가, 당시 5호의 이동을 야기한 전 지구적인 한냉기후 때문에 농업이 불가능한 곳이어서 생산력이 미흡하고 교통이 불편해 각종 물자를 내지에서 운반해와야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 화북지방 전체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정통 중화 왕조들이 낙양에 도읍을 정한 것을 본따서 천도를 단행했다. 사실 낙양 천도는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으나[* [[업성]]으로 천도하자는 견해(황하 북쪽에 위치해 있고, 식량과 작물이 많이 생산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이유로)도 있었고, [[태원]]으로 천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효문제는 숙부인 임성왕 탁발징과 한족 관료인 이충의 협력을 받아[* 다만, 이 두 사람은 효문제의 개혁은 지지했지만 남조와의 전쟁은 반대하는 입장이라 나중에 효문제가 전쟁을 하려하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천도 계획을 세우면서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남조를 정벌하러 간다는 핑계를 댄 후, 장마철에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다가 비 때문에 행군이 어렵자 낙양에 잠시 주둔시키면서, 선비족 장수들을 낙양의 화려한 문화생활에 잔뜩 홀리게 만들었다.[* 당시 제나라에 상을 치르고 있어서, 상중불벌이라는 핑계를 삼아 낙양에 자리 잡았던 것이 맞다.] 효문제는 짐짓 다시 남조 원정을 재개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낙양 생활의 달콤함에 취해버린 선비족 장수들은 떠나기 싫어서 그대로 낙양에 머무르자고 청원했고, 효문제는 이런 꾀로 결국 낙양 천도를 이루었다. 낙양은 지형 특성상 방어에 대단히 취약했다.[* 낙양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북쪽으로는 황하가 있고 주변에 적절한 산이 있으며 분지도 어느 정도 되어서 방어하기 좋을 것 같지만, 황하는 건너올 수 있는 곳이 너무 많고, 산은 간격이 넓어서 방어진을 차려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몇 십 년 뒤 [[양(육조)|양나라]]의 명장 [[진경지]]가 낙양을 수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전 [[한고제|한고제 유방]]도 항우를 멸하고 통일한 직후에는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유경]]으로부터 방어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따라서 천도 당시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한 이유는 통일전쟁을 위해서였다. 남조의 물산은 북위에 대단히 탐나는 것이었고, 또한 이때쯤 되면 북위도 중원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갖게 되어 통일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후한]]의 수도이기도 했던 낙양을 수도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한화정책의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정책 목록 ==== * 호한(胡漢) 간 결혼 장려 - 효문제 본인 자신도 혼혈이었다. 모계인 풍태후가 한족이었다. *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 - 북위 황실도 씨족명을 [[탁발]](拓跋)에서 한성인 [[원(성씨)|원]](元)으로 고쳤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으며, 결국 [[북주]] 제3대 고조 무제 [[우문옹]]의 치세때 이르러 한성으로 개변하던 것을 다시 호성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했다.('''호화정책''') * 호속(胡俗)과 호어(胡語) 금지 - 선비족의 고유어와 고유 풍속을 금지하고, 한어와 한족의 풍속을 따르게 했다. 다만 이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 성족분정(姓族分定) - 씨족이 다르면 다르게 살게 했다. 이는 씨족연맹을 형성하여 황권에 도전하려는 것을 방지하려는 중앙집권화정책이기도 했다. * 서교 제천 금지 - 서교 제천은 선비족 고유의 제천의식이었다. 선비족은 한족과는 다른 고유의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효문제는 이런 고유 신앙을 금지했다. 또한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이는 국교를 [[유교]]로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북조는 이후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도 강하게 받게 된다.] * 관제 개혁 - 원래 선비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부족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부족장의 대표에 불과했던 황제는 권한이 미약했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중국(한족)은 전통적으로 황권이 엄청나게 강했고, 투입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선비족이 한족을 모방함에 따라서 황권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북조가 중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효문제는 직접 농사를 시범삼아 지어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비족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은 결과적으로 선비족을 한화 선비와 비한화 선비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고, 낙양 천도로 인해 황제를 따라 이동한 한화 선비족은 중앙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천도를 반대하며 원래 있던 곳에 남아있었던 비한화 선비족은 그만큼 입지를 잃게 되었다. 이와 함께 효문제의 치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문성문명황후 섭정하에 실시된 삼장제와 균전제의 실시였다. ==== 토지 개혁 ==== '''삼장제'''는 황제의 신민에 대한 일신지배를 한데 모아 1당이라는 단위를 설정한 다음 각각 '''인장, 이장, 당장'''을 두어 호구 조사와 조세량 지정 등 행정 업무를 맡기는 제도였다. '''균전제'''는 당시 황폐화된 화북의 토지를 정비하여 국가가 일반 백성에게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하사한 제도였다. 여기에는 '''토지 공유주의와 균분주의'''라는 원칙이 투영되어 있었다. 즉 한족의 전통과 유목민의 전통이 어우러진 이 제도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화북 지방의 토지를 개간하는 한편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시행되었다.[* 한때 균전제에 대해 그 실시 여부에 대한 찬반논란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균전제 시행에 대한 사료는 이안세의 상소문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판 지역과 [[돈황]] 지역에서 균전제 실시에 관한 토지 문서가 발견되어 균전제가 실시되었다는 쪽에 의견이 강하게 실렸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지 않아 귀추가 주목된다.] 균전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일반 성인 남성인 정남에게 환수전인 '''노전'''과 불환수전인 '''상전'''이 지급되었다. 이 점에서 [[정전제]] 이래 중국의 토지 사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남의 [[부인]]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고, 이외에 농우에까지 지급된 것으로 봐서 여자와 가축의 노동력을 중시하는 유목민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노비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 균전제는 [[북제]]와 북주,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까지 지속되었다가 토지 부족 문제로 [[안사의 난]]을 전후에 사라지게 되었다. 점차 인구는 늘어갔고 이로 인해 불환수전도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대체적으로 북위 멸망 이후에 실시된 균전제가 토지 지급에 대한 제한이 걸려 부인이나 가축에겐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관리들에 대한 토지는 일반 정남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균전제의 특성상 노비와 농우를 많이 가진 권세가들이 토지를 더 많이 지급받았으며, 노비와 농우의 세금도 정남에 비해 적었다. 결국 당나라의 중후기가 되면 지급되는 토지는 규정의 절반 이하인 농가가 급증했고, 그 소출로 무장을 해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군역 부담이 커지는 꼴이 되면서 '''도호화''', 즉 토지를 이탈해 숨어버리는 농민들이 증가했다. 그 결과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균전제는 끝을 맺게 되었다. ==== 한화정책의 결과 ==== 이런 한화정책은 단순히 5호 16국시대 이전의 한족 풍습을 복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발달시킨 것이었다. 중국식 고대국가의 완성형이라고 볼 수 있는 당나라의 제도 또한 북위 효문제의 제도에 뿌리가 닿아 있을 정도로, 효문제의 개혁은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의 결과 황제권은 강화되었고, 국가체제는 정비되었다. 하지만 단기적, 장기적으로는 이런 개혁에 동반되는 보•혁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한족의 등용이 늘어나고, 문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일어나자 소외된 무장들과 비한화된 선비족 내 족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496년 실제로 효문제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원순(元恂)이 부황의 한화정책에 반발해 옛 수도였던 [[평성]](平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되었다. 진압 후 효문제는 원순을 폐태자시키고 주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고, 499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효문제가 붕어한 후 누적된 불만은 523년 '''[[육진의 난|육진의 대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이런 한화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지배층인 선비족 내에서 한화 정책파와 전통 고수파와의 상당한 갈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이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5호가 중심이 된 북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이런 한화정책을 지속했으며, 이런 정책에 따르는 보혁갈등으로 [[육진의 난|정]][[동위|치]][[서위|적]] [[북제|변]][[북주|란]]은 있었지만 개혁이 효과를 보면서 정치가 안정되자 더욱 부강해졌다. 결국 수나라 고조 [[문제(수)|문제 양견]]의 치세때 남조의 [[진(남조)|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유일한 패자가 될 수 있었다. == 평가 == 고조 효문제 탁발굉은 북위의 최전성기를 일궜으나 사실상 북위 멸망의 씨를 뿌린 것으로도 평가되는 황제이다. 한족의 입장에서는 중화주의에 입각해서 오랑캐 군주가 중화문명을 받아들여 한화를 한 것을 높게 평가했지만 만주족 군주였던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선조들의 전통을 너무 잊어버렸다고 혹평했다. 이와 같이 효문제는 침투왕조 북위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보여준 군주였다. 강희제는 효문제를 비판했지만, 강희제의 만주족 역시도 북위의 길을 걸었다. 북위와는 달리 민족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만 간신히 지켜내는 상황이라서 그게 그거의 수준이 된 게 현실이다. 인구에서 밀리는 정복민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정복 민족을 장기간 다스리려면 유화정책이나 어느 정도의 동화는 불가피하다. 자신들의 문화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킨다는 목적과 성공적으로 피정복 민족을 장기간 다스리는 걸 동시에 한다는 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느 문화권이든 존재한다. [[인도]]의 경우, [[델리 술탄 왕조]]와 [[무굴 제국]]의 튀르크계 무슬림 지배층 후손들이 현재는 종교만 [[이슬람]]교일 뿐 언어·문화적으로 [[인도인]]에 동화되었고, [[영국]]의 경우 [[노르만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의 [[노르만족]] 지배층 후손들이 현재는 [[잉글랜드]]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반면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던 몽골족의 원나라는 오래 못가서 멸망해버렸다. 원나라 지배층도 바보는 아니라서 이대로는 오래 못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때문에 제5대 [[영종(원, 5대)|영종 게겐칸]]이 한족과 어느정도 동화되려는 노력을 했었지만(영종신정) 몽골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했고([[남파의 변]]), 제11대 [[혜종(원)|혜종 우카가투칸]]과 메르키트 [[토크토아]](탈탈)가 개혁을 시도했지만 승상 [[메르키트 바얀]](백안)이 행했던 한문화 탄압정책으로 이미 한족 백성들의 민심이 악화되어 버스 떠난 뒤에 손흔드는 일이 되어버렸다. 한반도의 신라도 삼국통일 이후 왕들이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동화시키려고 골품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hopeater&logNo=222454723654&referrerCode=0&searchKeyword=%EC%8B%A0%EB%9D%BC|진골 기득권층이 개혁을 엎어버렸고]] 결국 신라는 붕괴하고 [[후삼국시대]]가 왔다. 현대도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로디지아]]의 지배층이었던 백인들은 인종적인 문제로 피지배층인 흑인과 섞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흑인들을 계속 지배하려고 하는 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결국 로디지아는 건국한지 15년만에 흑인들의 저항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흑인이 주류가 된 [[짐바브웨]]가 성립되었다. == 황후 == 효문제는 생전에 두 명의 황후를 두었는데 모두 문성문명황후 풍씨의 조카들이었다. 본래 '''풍윤'''이 입궁하여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피부병에 걸리자 문성문명황후 풍씨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여동생인 '''풍청'''이 문성문명황후의 명령으로 황후가 되었다. 문성문명황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풍윤을 계속 그리워하던 효문제는 풍윤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풍윤을 다시 입궁시킨 후 풍청을 폐위하고 풍윤을 황후로 봉했다. 하지만 풍윤은 고미인을 독살했고,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며 남편인 효문제가 출병할 당시에는 고보살이라는 가짜 환관과 사통까지 했다. 이후 효문제의 누이인 팽성공주 원씨가 효문제에게 풍윤의 사통을 알렸고 이에 풍윤은 폐위되진 않았으나 연금되었다. 효문제는 황후의 악행에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눕게 되었고, 죽을 날이 오자 풍윤을 자신을 따라 순장시키라고 명령한 후 붕어했다. == 여담 == 484년과 488년, 490년에 제24대 [[동성왕]] 치세하의 웅진[[백제]]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 육지로는 [[고구려]]가, 바다로는 [[황해]]가 있어 접근하기도 어려운 백제를, 그것도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왜 침공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성왕]] 항목 참고. 한화정책을 기업 [[한화]]나 [[한화 이글스]]와 엮는 개그가 있다. EBS 수능 세계사 강사 [[류성완]]은 효문제를 다룰 때 암기 방법의 일종으로 자신이 한화 이글스의 팬임을 강조하며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이 [[밈]]으로 통하는 인터넷 방송인 [[케인 TV|케인]]의 팬층도 종종 개그로 쓴다. == 미디어에서의 등장 == <[[뮬란: 전사의 귀환]]>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2018년 드라마 <봉수황>의 마지막회에 등장한다. 우리나라에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편까지 정발된 《만리중국사》 12권에서 나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미소년으로 그려놓고, 나름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이 효문제가 중국을 지배했던 이민족 왕조에서 계속 반면교사의 일종으로 거론되는데,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지배층이 >'효문제와 선비족의 전례가 있소. 한족들과 필요 이상의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펴면 우리 인구가 한족에 열세라서 저들과 완전히 동화되었을 경우, 우리 민족이 아예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질 수 있단 말이오' 라며 지나친 한화정책을 지양하는 걸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이는 유화정책을 필 명분이 되기도 했다. 폭정이나 강경책을 계속 사용하면 인구빨에서 밀리는 이민족 왕조가 장기적으로 한족 백성을 지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족 관료를 등용하거나 강경한 탄압 등을 지양해야 한다는 설득에 힘이 실리기도 하는 걸로 나온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탁발선비]][[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467년 출생]][[분류:499년 사망]][[분류:다퉁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