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서)] [include(틀:역대 한 황후)] [include(틀:역대 한 황태후)] [include(틀:역대 한 태황태후)] [[전한]] 제10대 [[선제(전한)|선제]]의 세 번째 황후로, 제11대 [[원제(전한)|원제]]의 정후인 [[효원황후 왕씨]] 정군의 고모였다. 흔히 [[왕망]]의 찬탈을 이야기하면서 효원황후 왕정군을 바탕으로 왕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말하나, 그 단초가 된 계기는 효선황후 왕씨로부터 찾는 편이 타당할 듯 하다. 선조는 [[고제(전한)|고조 유방]] 치세때의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져 대대로 세습했고, 원래 본관이 패(沛)였으나 장릉(長陵)으로 이주했다.[* 이는 전한이 수도 장안을 위시한 경기권을 부양하고, 지방의 강성한 세력을 가까이 두어 제압하려 했던 '강간약지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황후의 부친인 왕봉광(王奉光)은 소싯적 투계(鬬雞)를 좋아했는데, 이를 통해 즉위 이전 민간에 있었던 [[선제(전한)|선제 유병이]]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황후가 10대였을 무렵 나이가 차서 시집보내고자 했는데, 혼처를 정하여 시집보내려 할때마다 상대방이 사망하여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유병이가 선제로 즉위하자 왕봉광의 딸 왕씨를 후궁으로 불러들였고, 금새 첩여(倢伃)가 되었다. 권신 [[곽광]] 사후 그 일족인 곽씨를 멸족시키면서, 곽광의 막내 딸로 [[공애황후 허씨]]를 이어 황후가 되었던 [[효선황후 곽씨]] 성군을 폐위하고, 후궁 중에서 새로운 황후를 세우고자 했는데, 쟁쟁한 다른 후궁들을 물리치고 왕씨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 어머니인 공애황후 허씨를 독살로 잃고 지위가 위태로웠던 [[원제(전한)|태자 유석]]을 양육하게 되었다. 이후 태자 유석이 원제로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고, 손자뻘인 [[성제]] 유오가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조카이자 성제의 어머니인 효원황후 왕정군도 황태후가 되었는데 두 사람이 성이 같아서 호칭에 혼동이 있자, 효선황후 왕씨를 '''공성태후'''(邛成太后)라 불렀다.[* 황후가 된 이후 아버지 왕봉광이 공성후(邛成侯)에 봉해져 일족에게 작위를 전한데서 유래한 칭호로 보인다.] 황후 - 황태후 - 태황태후로서 49년을 재위했고, 영시(永始) 원년에 70대의 나이로 붕어하니 두릉(杜陵)에 합장되었고, 동원(東園)이라 칭했다. [[분류:전한의 황후]][[분류:기원전 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