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서)] [include(틀:역대 한 태황태후)] 孝元昭儀 傅氏 ( ? ~ 기원전 2년) [[전한]] 제11대 [[원제(전한)|원제]]의 후궁으로, 제13대 [[애제(전한)|애제]]의 할머니였다. 본적은 하내(河內) 온(溫).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위군(魏郡) 사람 정옹(鄭翁)에게 재가하여, 이복동생인 정운(鄭惲)을 낳았다. 입궁하여 태황태후인 [[효소황후 상관씨]]의 궁인으로 있다가 황태자였던 유석(원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원제가 즉위하자 첩여(倢伃)가 되었으며 총애가 더욱 극진해졌다. 그녀의 사람됨은 재략을 갖추었고 다른 사람을 잘 섬기어 아래로 좌•우의 궁인들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베풀었다. 자녀로 평도공주(平都公主)와 정도공왕(定陶恭王)[* 애제 유흔의 아버지로 그의 즉위 이후 '''정도공황'''으로 추존되었다가 봉국명인 '정도'를 떼고 '''공황'''이라 했다.] 유강을 두었다. 정도공왕 유강도 재예가 있어 부황 원제로부터 아낌을 받았다. 하지만 [[효원황후 왕씨|효원황후 왕정군]]이 정궁으로서 인덕을 갖추고 버티고 있었으며, 그 소생인 [[성제(전한)|유오]]가 적장자로서 황태자가 되었기에 부씨가 황후의 지위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원제는 부첩여와 정도공왕 유강을 아꼈고, 다른 후궁인 풍첩여(馮倢伃)와 그 소생인 중산효왕(中山孝王) 유흥[* 전한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인 제14대 [[평제]]의 아버지였다.]도 각별하게 여겼기에 두 아들을 제후왕으로 봉함과 동시에 소의(昭儀)로 칭호를 바꾸고 인수를 내리며 지위를 첩여보다 위에 두었다. 그래서 부소의라고도 불린다. 이윽고 원제가 붕어하자 아들 유강과 함께 봉국인 정도국으로 갔고, 정도왕의 어머니였기에 '정도태후'(定陶太后)라 칭했다. 그래서 부태후라고도 불린다. 10년이 지나 아들 유강이 효성황후 [[조비연]]에 대한 상사병으로 승하하고 병약한 손자 유흔이 정도왕으로 즉위하니 훗날의 [[애제(전한)|애제]]이다. 부태후는 손자를 몸소 돌보고 양육했었는데, 성제가 후사를 두지 못한지 오래되자 [[효성황후 조씨]]와 [[외척보정]]이었던 황제의 외숙부 왕근(王根)에게 뇌물을 써서 손자 유흔을 황태자로 삼도록 책동을 일으켜 결국 성취하기에 이르렀다. 정도왕 유흔이 황제로 즉위하자 손자와 자신을 지지하는 관료를 움직여서 태황태후인 [[효원황후 왕씨|왕정군]]에게 맞먹으려 들었다. 결국 황제의 친할머니로서 '''제태태후'''(帝太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 존호가 '''황태태후'''(皇太太后)로 바뀐 뒤에는 그 궁관(宮官)도 태황태후궁과 동일하게 설치하여 거의 왕정군과 대등한 위치까지 올랐다. 또한 선제인 성제 치세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왕씨 일족을 일선에서 밀어내고, 자신의 일족인 부씨를 외척보정으로 들여 제국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서 거리낄 것이 없게 되자, 후궁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잊고는 태황태후(효원황후) 왕정군에게 '할망구'[嫗]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연회 자리에서 태황태후와 같은 자리에 앉으려다가 [[왕망]]에 의해 원제의 후궁이었음을 상기하는 모욕을 당하자 그를 일시적으로 실각시키기도 했다. 또한 같은 원제의 후궁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중산태후 풍씨를 옛 원한을 들어 자살시키는 등 패악을 부리기도 했다. 황태태후 부씨는 원수(元壽) 원년(元年)에 붕어하니 위릉(渭陵)에 합장되었고, '효원부황후'(孝元傅皇后)라 칭해졌으나, 애제 붕어 이후 태황태후로서 평제를 옹립한 왕정군과 그녀의 조카 왕망에 의해 황후로서의 칭호와 태후로서의 존호가 박탈당했다. 또한 부씨 일족도 제거되었다. [[분류:한나라의 후궁]] [[분류:기원전 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