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원위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3 0%, #DC143C 20%, #DC143C 80%, #9C0013); color: #ece5b6" '''북위 제10대 황제[br]{{{+1 경종 효장황제 | 敬宗 孝莊皇帝}}}'''}}} || ||<|2> '''출생''' ||[[507년]]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황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즉위''' ||[[528년]] [[5월 15일]]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황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사망''' ||[[531년]] [[1월 26일]] (향년 23세) || ||[[북위]] [[산시성(산서성)|병주]] [[타이위안시|태원군]] 진양현 삼급불사[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타이위안시]]) || || '''능묘''' ||[[정릉]](靜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10대 황제}}}''' || ||[[528년]] [[5월 15일]] ~ [[530년]] [[12월 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원(성씨)|하남 원씨]] || || '''휘''' ||자유(子攸) || || '''부모''' ||부왕 팽성왕 [[원협]][br]모후 팽성왕비 이원화 || || '''형제자매''' ||4남 5녀 중 3남 || || '''배우자''' ||효장황후 || || '''종교''' ||[[불교]] || || '''자''' ||언달(彦達) || || '''작호''' ||무성현개국공(武城縣開國公)[br]→ 장락왕(長樂王) || || '''묘호''' ||'''[[경종]](敬宗)''' || || '''시호''' ||무회황제(武懷皇帝)[br]→ 효장황제(孝莊皇帝) || || '''연호''' ||건의(建義, [[528년]])[br]영안(永安, [[528년]] ~ [[530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10대 황제. 묘호는 경종(敬宗)이었고, 시호는 효장제(孝莊帝) 혹은 무회제(武懷帝)였으며, 휘는 자유(子攸)였다. 여러모로 [[후한]] [[헌제]]의 포지션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효장제는 당시의 헌제보다 적어도 10살 정도는 더 많았고 나름 통치력이 뛰어난데다가 자제력도 강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법 훌륭한 자질 탓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헌문제]]의 서자인 [[원협]]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원화(李媛華)이다. 즉위 후 부친 원협을 숙조(肅祖) 문목황제(文穆皇帝)로, 모친 이원화를 문목황후(文穆皇后)로 추존했으나 [[절민제]] 시기 추탈당했다. == 생애 == [[선무영황후 호씨|영태후]] 호씨가 자신을 제거하려던 숙종 [[효명제]](제9대)를 독살하고 [[효명제의 딸]]과 [[원조(북위)|원조]]를 번갈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우자, 미리 효명제의 밀지를 받았던 선비계 글호족 이주부의 군벌 [[이주영(북위)|이주영]]이 발호하여 영태후와 원조 등을 제거하고('''하음의 변''') 효명제의 종숙인 원자유를 옹립했다. 그러나 효장제는 이주영이 기대했던 대로 만만한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실무는 최대한 챙기고, 이주영이 측근을 앉혀달라는 부탁을 넌지시 밀어넣을 때도 대놓고 거부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며, 그러느니 날 폐위하고 이주영 당신이 직접 황제를 하라고 얘기할 정도로 패기가 있었다. 한편 이주영도 꽤 재미있는 행보를 보였는데, 딸 이주영아를 효장제와 결혼시키고, 이후 '''[[육진의 난]]'''을 평정하는 등 권세가 날로 높아져 갔지만 그럼에도 전횡 자체는 어느 정도 삼가기도 했다는 점이다. 또한 효장제는 스스로 >"상도향공(=[[조환|위원제]])이 되느니 [[고귀향공]]이 되겠노라." 고, 즉 무력하게 왕조를 내주느니 차라리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겠다는 말을 했는데, 효장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이주영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이는 아무래도 두 사람 다 [[위(삼국시대)|조위]]나 [[서진]]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각자 [[동탁]]이나 [[한헌제]] 같은 길은 걷지 않으려 조심했던 것이 이유였던 걸로 보인다. 효장제는 장인인 이주영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고, 흡사 한헌제나 고귀향공이 조조나 사마사에게 그랬듯 여러 차례 이주영에게 이 음모가 누설되었는데, 이주영은 이상하게도 그런 음모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효장제는 신하들과 함께 일을 꾸며 이주영을 수도 낙양에서 암살했지만 격분한 [[이주조]], 이주세륭[* 이주영의 사촌동생] 등 이주씨 일가가 군사를 일으켜, 수도 낙양이 함락되었다.('''이주씨의 난''') 이주조, 이주세륭 등은 효장제의 처첩들을 강간하고 효장제의 아들이자 이주영의 외손자인 아이도 때려죽이는 만행을 일삼았으며, 이때 그야말로 낙양에서 학살과 폭행 등을 저질러 이주영조차도 피했던 동탁의 만행을 재현했다. 또한 효장제는 강제로 끌어내려진 다음 진양(晉陽)으로 유폐되었고 얼마 후 삼급불사(三級佛寺)에서 23세의 나이로 교살되었다. 능호는 정릉(靜陵)이었다. 하지만 효장제의 이런 시도가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 이주영의 부하들이 이주영의 복수라면 몰라도 이주씨 일가의 이런 선을 넘은 악행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고, 북위의 전반적인 여론도 이주씨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주조의 개념없는 행태를 보고, 이제는 더이상 이주씨를 섬길 수 없을 것 같다고 발언한 [[고환(남북조시대)|고환]]의 디스가 《[[자치통감]]》에 전해진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탁발선비]][[분류:507년 출생]][[분류:531년 사망]][[분류:뤄양시 출신 인물]][[분류:폐위된 군주]][[분류: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