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유송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13E88 0%, #3F51BA 20%, #3F51BA 80%, #313E88); color: #ece5b6" '''유송 제7대 황제[br]{{{+1 폐황제 | 廢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후폐제(유송).jpg|width=100%]]}}} || ||<|2> '''출생''' ||[[463년]] [[3월 1일]]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쉬저우시]]) || ||<|2> '''즉위''' ||[[472년]] [[5월 11일]]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사망''' ||[[477년]] [[8월 1일]] (향년 14세)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신안사[br](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단양군 말릉현 남교 단서 || ||<|2> '''재위기간''' ||'''{{{#ece5b6 유송의 황제}}}''' || ||[[472년]] [[5월 11일]] ~ [[477년]] [[8월 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유(성씨)|팽성 유씨]] || || '''휘''' ||욱(昱) || || '''부모''' ||부황 [[명제(유송)|태종]][br]모후 창오왕태비 || || '''형제자매''' ||11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강간규]](江簡珪) || || '''아명''' ||혜진(慧震) || || '''자''' ||덕융(德融) || || '''작호''' ||창오왕(蒼梧王) || || '''제호''' ||'''후폐황제(後廢皇帝)''' || || '''연호''' ||원휘(元徽, [[473년]] ~ [[477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육조시대]] [[송(육조)|유송]]의 제7대 황제. 명제 유욱(劉彧)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이름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기 때문에 소(小) 유욱이라 부른다. 폐위를 당한 황제라서 묘호도 시호도 없으므로 폐제라 하는데, 유송에는 폐제가 유욱 이전에 1명 더[* 근데 이 사람은 후폐제의 아버지 유욱의 원수이며, 본인에게는 사촌형이다. 즉 사촌형이 전폐제, 사촌동생이 후폐제이다. 부친끼리 친형제는 아니고 이복형제라 친할머니가 다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친할아버지는 똑같다.] 있었으므로 후폐제(後廢帝)라 하거나, 황제가 되기 전 작위인 창오왕(蒼梧王)으로 불러서 구분한다. 전폐제 [[전폐제(유송)|유자업]]과 함께 폭군이 유난히 많았던 유송의 가장 악랄한 폭군으로 유명하지만, 유자업이 패륜과 근친강간으로 악명이 높다고 할 수 있다면, 이쪽은 말 그대로 중국사 최악의 폭군이자 무의미한 살상과 살육의 쾌락에 맛들릴 대로 맛들린 희대의 '''[[쾌락살인|쾌락살인마]] 겸 [[연쇄살인마]]'''였다. == 생애 == 대명(大明) 7년(463) 정월, 아버지 명제 유욱과 어머니 진묘등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의복을 재단하거나 모자를 만드는 모습을 한 번만 보아도 곧장 만들었고, 한 번도 불어본 적이 없는 악기도 금방 배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높은 장대나 천막 기둥에 기어 올라가길 좋아했으며,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오곤 했으며, 어머니한테서 핀잔을 자주 듣고 종아리까지 맞을 정도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고 한다. 유욱은 겨우 9살이라는 나이에 즉위한 어린아이였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연장을 만들었다. 자기 재능과 열정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게, 끌, 송곳, 망치, 톱 등을 만들어 소중히 다루고 직접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나이대에 흔한, 모험심이 강한 개구쟁이 [[암군]]처럼 보일 것이다. === 잔혹성 === 문제는, 유욱이 이런 식으로 자기가 만든 연장들로 나무나 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썰고, 분해하며 노는 [[쾌락살인]]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 거기에 유욱은 황제 즉위 초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태후와 태비는 물론이고 여러 대신들을 무서워해서 그들에게 멋대로 굴지 못했지만,[* 다만 이럼에도 유욱은 어릴 적부터 불길한 조짐이 보였는데, 인간에 대한 폭행을 즐겨 [[명제(유송)|아버지]]랑 주위의 걱정을 한 몸에 샀다고 한다. 참고로 송 명제도 아들만큼은 아니었어도 매우 음탕하고 잔혹한 폭군이었는데 그런 폭군도 아들의 모습을 보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어린 유욱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심지어 이조차 '''본색을 드러내기 전의 모습이었으니...'''] [[관례|원복(元服)]]을 마친 12세 무렵부터는 안팎에서 통제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절제력이 완전히 결여된 모습을 보였는데, 수레와 두세명의 기병들을 데리고 궁성 밖 10~20리에 있는 시장에 난입하여 상인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거기에 476년 7월에 [[유경소]]가 일으킨 반란이 진압되자 유욱은 더욱 난폭해져, 하루도 빠짐없이 창과 몽둥이를 든 부하들을 대동하여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짧은 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가 '저녁에 나가면 새벽에 돌아오고, 새벽에 나가면 해질 무렵에 돌아왔다'고 하며, 수도 건강의 길가에서 유욱과 마주친 생명체들은 단 하나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유욱이 이런 짓을 하루에 수십 차례나 하다 보니까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상인들은 물건을 팔지 않았고, 길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끊겼으며, 사람들은 날카로운 무기를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고, 작은 것이라도 뜻을 거스른 것이 있으면 즉시 죽여서 '''갈랐다고 한다.''' 거기에 이 소년은 '''[[쾌락살인|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몹시 슬픈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궁궐 안의 사람들은 근심과 두려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먹거나 숨을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477년 6월 22일에 산기상시 두윤문, 사도부의 좌장사 심발, 유격장군 손초[* 아래의 각주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강제로 배를 갈렸다고 와전된 그 사람이다. 차하르족 출신의 귀화인이었다.]가 반란을 모의했다는 보고가 오자 유욱은 호위하는 무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세 사람의 집에 엄습해 이들을 모두 손수 죽인 것도 모자라 톱으로 썰고 해부하였는데, 한술 더 떠서 유욱은 [[연좌제|그들의 가족들에게도 이런 짓을 똑같이 했고,]] 심지어 '''젖먹이 아기'''까지도 유욱의 악행을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심발은 상을 당했던 상황이었는데, 호위 무사들이 도착하자 유욱은 칼을 휘두르며 홀로 심발에게 왔고, 심발은 황제의 뺨을 손으로 때리고 '''너의 죄는 [[걸왕|걸]][[제신|주]]를 뛰어넘는 것이니 도륙되는 것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 후 살해당했다. 거기다 유욱은 이 잔혹한 악행 직후에 반역자 숙청 성공을 기념하는 의미로 죄수들을 대거 사면했다고 한다. 본래 전근대시대에는 군주 본인이나 그 배우자 및 자녀가 병을 완치했다거나, 적군이나 반란군을 토벌하는 등의 경사에는 죄인들을 사면하는 일이 잦긴 했다. 하지만 후폐제의 경우는 그냥 죄없는 사람의 일가족을 도륙내고는, 이를 거국적인 경사랍시고 이런 일을 벌였다. 심지어 이상의 내용들은 야사가 아니라, '''[[자치통감]]에 기록된 엄연한 정사의 내용이다.''' 거기다가 유욱은 거기에 항상 쇠몽둥이를 옆에 끼고 살았는데 매일 그 쇠몽둥이로 사람을 패서 죽여야 밥을 먹고 잠에 들었다고 하며, 시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는 기뻐했고, 목격자 중 살인 광경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부하라도 손수 긴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모반을 꾀한 죄목으로 잡혀온 죄수들을 직접 살해한 후 [[능지형]]에 처하거나, 심지어 불심이 깊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단 것을 증명해 보라며 [[승려]]를 묶어서 몸을 해체한 후 죽을 때까지 끌고 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유욱은 '''매일매일 10명 이상을''' 죽였다고 한다.[* 다만, 차하르족 출신인 손초라는 사람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자 산 채로 배를 갈라 속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확인 결과 마늘은 먹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일화와 심발의 살해가 심발의 집에 있다는 많은 보물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일화는 전술한 내용이 과장 내지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태비는 그런 유욱의 태도에 경악하여 여러 번 훈계를 했는데, 유욱은 자신의 잘못은 전혀 반성조차 하지 않은 채 '''[[패륜|친어머니에게 독주를 먹여 죽이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만류하여 그만뒀다고 한다. 유욱이 받아들였다는 충고의 내용도 경악스러운데, 대략 "태비가 죽으면 폐하는 복잡한 상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놀러 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유욱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에 해당하는 반사회성 인격장애로 추정된다. 실제로 공감능력이나 도덕개념이 아예 결여된 사이코패스들에게 사회적 도덕 관념을 교육할 때, '''도덕 개념을 어겼을 때 본인이 사회적으로 받는 불이익'''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다.]. 그런데도 유욱은 밤에 잘 때에는 다음 아침이 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실 그의 부친 명제 유욱도 이와 비슷한 일로 전폐제에게 살아난 일이 있었는데, 전폐제의 첫 아기가 태어날때가 다가오자 기념으로 유욱을 죽이려고 하다가, 다른 삼촌이자 유욱의 이복동생 유휴인이 전폐제에게 '''아직 황자께서 태어나시지 않았으니 태어난 뒤에 죽이셔야 의미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설득하여 안 죽이고 넘어갔었다. 살아서 풀려나온 유욱이 이후 사람을 시켜 전폐제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 [[출생의 비밀]] === 유욱은 명제 유욱의 장남이라고 하나, 명제가 어느 순간 고자가 되어 불임이 됐기 때문에 친자식이 아니었다. 아버지 유욱이 부인이었던 진묘등을 총애하는 심복 이도아(李道兒)에게 하사했다가 임신하자 나중에 돌려받은 다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고자라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한 듯하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유욱이 즉위한 후 '''''[[자승자박|짐은 이장군(李將軍)이다!]]'''''하고 자칭함으로써 유씨가 아니라 이씨의 혈통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우리로 치면 [[조선 왕조]]에서 왕이 이씨가 아니라 [[고구려 왕조|고씨]]나 [[고려 왕조|왕씨]]라고 스스로 밝힌 수준. 누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도 위험할 판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최대 약점을 밝혔다.] 왕조에서 제왕 자신이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은, 사실상 자신은 황제지만 황실의 혈통과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자기 스스로 정통성을 없애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뇌|하극상 명분을 완벽하게, 그것도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셈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 소도성에 대한 위협 === 이 일로 계양왕(桂陽王) [[유휴범]]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휴범은 폭군 유욱의 정통성을 명분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유휴범은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물론 송서가 남제 때 편찬되었기에 이 일화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우위 장군 [[소도성]]은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킨 뒤 그를 살해함으로써 난을 평정했다. 이어 원휘 4년에 유욱의 폭정을 보다 못한 24세 건평 난왕(建平赧王) [[유경소]]의 난도 소도성이 평정했다. 유경소가 옹립된 이유는 단 2가지였는데, 장성했으며 정신도 멀쩡했기 때문으로 '''더 이상의 조건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소도성은 잇따른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렇듯 소도성이 유휴범, 유경소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 되려 소도성이 찬위의 뜻이 있었다고 보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유송 왕조에 충성심이 남아있던 신하들은 대부분 유경소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소도성)에게는 아무리 황제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정상이지만 [[싸이코패스|유욱은 그 정도의 개념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는 소도성을 질투하여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하고 조각상을 과녁 삼아 시종들과 함께 활을 쏘았으며, 심지어는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그가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놓고는 활로 쏘아 즉사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놀란 주변 내관들이 "이렇게 좋은 과녁을 한번만 쓰고 버리시렵니까?"라고 간언한 덕에 진짜 화살로 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소도성의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 솜씨를 자랑했다. [[잠자는 사자|그러나 이것은 유욱의 파멸을 초래한 최악의 선택이었다]]. 자기가 황제이고 소도성은 그저 장군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욱은 소도성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소도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유욱을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유욱의 밑에 이대로 있다가는 본인도 언젠가 죽게 될거라는 생각에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王敬則)과 힘을 합쳐 양옥부(楊玉夫),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 최후 === 7월 7일 [[칠석]]날 밤, 유욱은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개]]를 훔쳐 삶아 [[술]]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뒤 양옥부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으리라"는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하지만 양옥부는 사전에 소도성에게서 지시를 받은터라 유욱이 깊이 잠들자 유욱이 아끼던 수제 살인 도구를 꺼내들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살해당할 때의 나이는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2학년'''밖에 안되는 고작 '''만 14세'''였다. 유욱을 [[암살]]하고 양옥부는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유욱의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유욱이 이렇게 죽을 거라는 것을 예상 못한 터라 처음에는 놀란 나머지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유욱의 죽음에 기뻐하며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雷次宗)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미덕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 [[왕망]], [[조비]], [[사마염]], [[환현]], [[유유]].]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폐제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정의를 위한 정당한 반란으로 인정하게 했다. 유욱은 죽은 뒤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당연히 그가 죽자 슬퍼해주는 백성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유욱 외에 후대에 [[고려]]에 있었던 폭군 [[충혜왕]]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 평가 == >사신은 말한다. 나라를 잃은 군주는 비록 마지막에 같은 길을 걷더라도 출발은 어떠면 달랐을 것이다. [[전폐제(유송)|전폐제(前廢帝)]]는 천박하게 노늴었고 호사스러웠으며, 전령을 내려서 길을 열었다. 창오왕(蒼梧王)은 옥새를 숨겼고 노닐고 돌아가는 것을 잊었으며,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했고 홀로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떠났다. 목숨을 잃고 제위가 엎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희하(姬夏)의 융성과 비교하면 자질과 문덕이 오히려 달랐으니 망국의 도리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 >― 《[[송서]]》의 <후폐제 본기> 사론 사실 악행의 양과 규모로만 따지면 유욱을 능가하는 폭군들과 독재자들은 많지만, 대부분은 폭정 속에서도 명분이나 목적 의식을 가졌거나 조금의 업적이라도 남겼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다못해 자국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 [[라나발로나 1세]]조차 명분을 전혀 대지 않고 묻지마 학살을 한 것은 아니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백두혈통|김씨 3대]], [[마오쩌둥]], [[폴 포트]]조차 그 명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뿐 어쨌든 학살의 명분을 대긴 했다.] 이에 반해, 후폐제는 재위 기간 내내 무고한 백성들을 '''[[쾌락살인]]'''하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어떠한 치적도 남기지 않았고, 그 악행의 질 역시 몹시 잔혹하였으며, 당연히 인류 역사상 이렇게 아무런 명분 없이 쾌락살인 자체만이 목적이었던 국가지도자는 후폐제가 유일무이하다. 창작물에서도 [[천룡인|디스토피아물의 최종 보스 집단의 지배자]]들 정도가 저지를 만한 악행을 저지른 셈인데, 심지어 이런 악행도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나이에 한 일이니 이 황제가 성인이 되어 오래 집권했다면 그 살인의 질과 규모가 훨씬 커졌을 것이다. 후폐제가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음에도 동정여론은 커녕 큰 비난만 받는 이유도 이러한 질적인 악행의 심각성에 있다. 가히 같은 유송의 [[유자업]]과 [[제(남조)|남제]]의 [[소보권]], 머나먼 후대 사람인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우간다]]의 [[이디 아민]]과 함께 정신이상자가 국가원수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인 셈이다. 가뜩이나 건국 당시부터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던 유송에 더더욱 피냄새를 짙게 만든 원흉인데, 유욱 이전의 황제들이 실로 여러 가지 방향성에서 그 악랄함과 미친 짓으로 후세인과 당대 정상인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지만 유욱처럼 살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고 유욱만큼의 잔혹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상술한 유자업과 소보권, 응게마 같은 유욱과 비견되는 자들조차 누군가를 사랑할 최소한의 정신은 있었다. 물론 그 사랑도 제정신은 아니긴 했으나, 유자업은 고모인 신채공주를, 소보권은 반숙비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으로 여겨지며, 응게마도 3번 결혼하는 와중에도 2명의 내연녀를 사귀는 등 불륜을 일삼았으나, 이를 역으로 보면 응게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최소한의 애정은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욱은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애정 따위는 일절 없었고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이 단지 불특정 다수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만이 남은 희대의 [[사이코패스]]였을 뿐이다. 후세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유욱의 행동에 치를 떨었으며, 심지어 어느 사관은 소도성이 제위를 찬탈하고 황족이었던 유씨를 멸족한 것에 대하여 "'''유욱 때문에 유씨가 황제 행세할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유송을 멸망시킨 남제에서조차 건평왕 유경소, 중서령(尚書令) 원찬(袁粲), 상서 유병,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沈攸之)를 신원하고 예로서 그들을 다시 안장했다.[* 그 가운데 유경소는 심지어 '''남제 건국자 소도성이 직접 죽인 사람이다.''' 원찬, 유병도 유욱이 죽인 게 아니라, 소도성이 황제가 되려는 것을 막다가 소도성에게 죽었다. 이 신원 회복은 정치적 목적에서의 민심 수습책이기도 했지만, 유송이 망해야 할 나라이기는 했어도 황제들이 문제였지 유경소는 잘못 없고 정당한 황제였다고 유송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유경소에게 효난황제(孝[[난왕|赧]]皇帝)라는 사시를 올렸다. 참고로 제왕의 시호란 효O황제라고 붙이는게 기본이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유욱,version=50)] [[분류:송(남조)/황제]][[분류:463년 출생]][[분류:477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분류:팽성 유씨]][[분류:쉬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