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include(틀:역대 계동궁 주인)]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F7C22, #6B8E23 20%, #6B8E23 80%, #5F7C22); color: #FFD400" '''계동궁 추존 궁주'''}}}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 '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문서 참조.]의 증손[br]{{{+1 흥녕군 | 興寧君}}}'''}}}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장종의 증손[br]{{{+1 흥녕군 | 興寧君}}}'''}}} || ||<-2> '''[[봉호|{{{#gold 봉호}}}]]''' ||<(> 흥녕군(興寧君)[* 봉호는 [[여주시]]의 옛 지명인 흥양부(興陽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봉호도 마찬가지. 왕자 군이 아닌 종친 군의 [[봉호]]는 보통 생모의 [[본관|관향(본관)]]을 봉호로 삼는다. 흥녕군 형제들의 생모는 [[여흥 민씨]]이다..] || ||||<:> '''[[시호|{{{#gold 시호}}}]]''' ||<(> 정간(貞簡) || ||||<:>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 || ||||<:> '''[[이름|{{{#gold 이름}}}]]''' ||<(> 창응(昌應)[*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이름은 '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조선)|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 '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이인응|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조선)|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 || ||||<:> '''[[자(이름)|{{{#gold 자}}}]]''' ||<(> 유백(裕伯) || ||||<:> '''{{{#gold 양조부}}}''' ||<(> [[은신군]] || ||||<:> '''{{{#gold 양조모}}}''' ||<(>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br](南陽郡夫人 南陽 洪氏) || ||||<:> '''{{{#gold 생조부}}}''' ||<(> 이병원(李秉源) || ||||<:> '''{{{#gold 생부}}}''' ||<(> [[남연군]] || ||||<:> '''{{{#gold 생모}}}''' ||<(> 군부인 [[여흥 민씨]][br](郡夫人 驪興 閔氏) || ||||<:> '''{{{#gold 부인}}}''' ||<(> 군부인 [[임천 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 '''{{{#gold 자녀}}}''' ||<(> 양자 [[완림군|1남]]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809년]] [[7월 16일]] ~ [[1828년]] [[2월 1일]] || ||<:> '''[[태양력|{{{#gold 양력}}}]]''' ||[[1809년]] [[8월 26일]] ~ [[1828년]] [[3월 16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장남]]이자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맏형이다. == 생애 == 1809년 7월 16일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정원군|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남연군|이채중(李采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7살 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의 작호를 받고 왕족으로 편입되면서 이창응 역시 종친이 되었고 1822년 12월 27일 휘경원 수원관(守園官)[* [[정조(조선)|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묘를 지키는 관직]을 지내고 같은 해 13세에 소의대부(昭義大夫)[* 종2품 하의 종친에게 준 관계] '''흥녕군'''에 봉해졌다. 이어 다시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를 관리하는 행 휘경원수(徽慶園守)[* 앞서 나온 휘경원 수원관보다 높은 직책이다. 휘경원 관리직 중 최고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워낙 어릴 때 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1828년 2월 1일 향년 20세로 별세하였다. 참고로 [[참척|사망 당시 그의 부모인 남연군과 군부인 여흥 민씨 내외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 사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1-09-05 12.04.50.jpg|width=100%]]}}} || || {{{#gold '''흥녕군의 묘'''}}} || 조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직후인 1864년(고종 1년) 7월 9일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추증받았고, 1865년(고종 2년) 9월 10일 증 이조 판서 지종정경(知宗正卿)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직이 특별 추증되었다. 다시 1865년 9월 14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명으로 특별히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종정경(議政府領議政 兼 領宗正卿)에 증직되었다. == 여담 == * [[흥선대원군]]이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나 큰형 흥녕군과 둘째형 [[흥완군]]과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다. 사실 흥녕군은 흥선대원군이 9살 때 사망했으니 나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남연군]] 부부가 사망한 이후로는 흥완군이 나머지 형제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다만 흥완군도 꽤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나마 제일 오랫 동안 봐온 68세까지 살았던 셋째 형 [[흥인군]]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 가족 관계 == * 부 :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 1836) * 모 : 군부인 [[여흥 민씨]](郡夫人 驪興閔氏, 1784 ~ 1831) - 민정중[* [[민유중]]의 형, [[인현왕후]]의 백부](閔鼎重)의 4대손 민경혁(閔景爀)의 딸 * 동생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 ~ 1848) * 동생 :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 ~ 1882) * 동생 :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 ~ 1898) * 정부인 : 군부인 [[조씨|임천 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1805 ~ 1871) - 참봉 조재익(趙在翼)의 딸 * 양자 :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 1831 ~ 1891) - 동생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의 아들 == 후손 == 부인은 임천 조씨로, 둘 사이에서 자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1831년 아랫 동생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완림군|완림군 이재원]]이 태어나는 대로 바로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입양]]해 조씨 부인이 키웠다. 조씨 부인은 1871년 6월에 사망했다,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양자 [[완림군|이재원]]은 1889년에 아들 [[이기용(1889)|이기용]]을 얻었으나 2년 뒤인 1891년 사망했으며 사후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받았다. [[이기용(1889)|이기용]]은 여느 [[황족]]들처럼 친일 노선을 타면서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8.15 광복]] 이후 몰락해 가난하게 살다가 1961년에 사망했다. 자식이 없었기에 황적에 올라가지 못한 [[의친왕]]의 자녀들 몇 명을 입양했는데 아들로는 [[의친왕]]의 7남 [[이해청|이광]]을, 딸로는 [[의친왕]]의 1녀 이령, 2녀 [[이해원(1919)|이진)]], 3녀 이찬, 4녀 이숙, 5녀 [[이해경|이공]]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해청|이광]]은 1952년에 [[이기용(1889)|양아버지]], [[의친왕|친아버지]]보다도 먼저 죽었고 그의 후손에 대해선 전해진 것이 없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흥인군, version=137)]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809년 출생]][[분류:1828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