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슈트라흐비츠1.jpg|width=100%]]}}} || || '''이름'''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br]히아친트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카미네츠 백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그로스차우헤운트카미네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 ||<|2> '''출생''' ||[[1893년]] [[7월 30일]] ||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그로스슈트렐리츠 군 그로스슈타인[* Groß Stein, Landkreis Groß Strehlitz. 現 [[폴란드]] 오폴레주 크랍코비체군 고골린읍 카미엥실롱스키 (Kamień Śląski). 이곳이 속한 [[https://de.wikipedia.org/wiki/Gemeinde_Gogolin|고골린]]은 지금도 독일인이 20% 가까이 사는지라 폴란드어와 함께 독일어도 공용어다.] || ||<|2> '''사망''' ||[[1968년]] [[4월 25일]] (향년 74세) || ||[[서독]] [[바이에른]] 주 트로스트베르크 || || '''복무''' ||[[프로이센 왕국군|프로이센 왕국 육군]][br]→ [[국가방위군]] 육군[br]→ [[독일 육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육군]][br]→ [[슈츠슈타펠]] || || '''최종 계급''' ||[[중장]] ,,(나치 독일 육군),,[br][[대령]] ,,(슈츠슈타펠 연대지도자),,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br][[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철십자 훈장|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슈트라흐비츠2.jpg|width=100%]] || ||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차우헤운트카미네츠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 [[독일]]의 [[백작]], 군인이다. '''전차백작'''(„Der Panzergraf“)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명장]]이다. --이름 더럽게 긴데 줄일만한 이름이 없어서 전차백작이 됐다 [[카더라]]-- == 생애 == === 초기 행적 === [[1893년]]에 [[슐레지엔]]의 그로스 슈타인(Gross Stein)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슈트라흐비츠는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후 [[베를린]]으로 보내져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후원을 받은 프로이센 국왕의 호위부대인 의 일원이 되었다.[* 이 부대는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1740년]]부터 이어져 내려 온 역사깊은 부대로 모든 독일육군 중에서 최고명문 부대였다.] 슈트라흐비츠는 입대 후에도 리히터페르데 군사대학에서 공부했다. 또 스포츠에도 열성적이어서 특히 승마와 펜싱, 육상경기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916년]]에 슈트라흐비츠는 예정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이 확실시되었지만 이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지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 그는 [[서부전선]]에 출전해 전공을 세워 [[1914년]]에 [[중위]]로 승진한 후 두 개의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1914년]]말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당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어 게릴라로 의심받아 프랑스 법정에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슈트라흐비츠는 곧 감형되어 프랑스 남부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독일이 패전한 후, 석방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로 귀국했다. === [[국가방위군]] ===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육군에 복귀해 [[1920년]]부터 [[1930년]] 초까지 제7 기병연대의 예비역 장교로 있었다. [[1934년]]에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독일군의 기계화가 요구되자 슈트라흐비츠는 전차부대에 배속을 희망하여 그는 [[1935년]]에 아이제나흐의 파견 제2 전차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소령]]으로 승진해 제1 전차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침공]] 및 [[프랑스 침공]]에 참가한 슈트라흐비츠는 이어서 [[발칸반도]]에서 전투에 참가해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와 함께 [[베오그라드]]로 진격했다. [[1941년]] [[5월]]에 예비역 대령으로 승진한 후 [[1941년]] [[6월]]에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제2 전차연대 제1 전차대대 지휘관이 되어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다. 제2 전차연대는 제16 전차사단의 예하였는데 제16 전차사단은 부크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오토바이 부대를 파견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에 마주치고 말았다. 슈트라흐비츠는 원군을 위해 잠수전차를 사용해 강을 건너 소련군을 기습했다. 이 때 그는 스스로 3호 전차에 올라 타 선두에 서서 군을 지휘했다. 슈트라흐비츠의 전차 및 예하 전차들은 소련군의 차량 300량을 파괴하고 포대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부크 강 교두보 확보에 성공해 부근의 소련군을 소탕했다. 이 공적으로 슈트라흐비츠는 [[1941년]] [[8월]]에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그의 부대는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슈트라흐비츠는 '''전차백작(der Panzergraf)'''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제16 전차사단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던 제6군 예하가 되어 [[1942년]] 말에 [[스탈린그라드]] 부근에서 포위당했다. 당시 슈트라흐비츠는 제2 전차연대의 지휘관으로 승진해 포위망의 북쪽에서 소련군과 싸웠다. 그의 제2 전차연대는 소련군의 T-34 전차 105량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슈트라흐비츠는 비행기로 포위망을 벗어나 후송되었다. 이 공적으로 그는 다시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43년]] [[1월]]에 엘리트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의 전차연대 지휘관으로 복귀한 슈트라흐비츠는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무장친위대]] 제3 SS 기갑사단 토텐코프와 함께 싸웠다. 여기서도 용맹을 떨친 그는 다시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43년]] [[11월]]에 그는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에 사임안을 냈다. 표면상 건강이 사임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사단장이던 발터 헤른라인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가입 === || [[파일:히아친트 친위대.jpg|width=100%]] || || [[슈츠슈타펠|SS]][[소령]] 제복을 입은 모습 || 예비역 [[소장(계급)|소장]]으로 승진한 그는 [[나치당]]에 입당하고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에 의해 [[슈츠슈타펠|친위대]]에도 가입했다. 이것은 힘러가 귀족 등 고위관료들을 친위대로 끌어들이려는 공작때문이었다. [[1943년]] [[11월]]에 '''<슈트라흐비츠 전투단>'''이 편성되어 북부집단군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그는 [[1944년]] [[4월]]에 다시 다이아몬드 훈장이 수여되었다. [[1945년]] [[1월]]에 예비역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구축전차여단인 <오버슐레지엔>의 여단장으로 부임한 슈트라흐비츠는 절망적인 잔황속에서도 용맹을 떨쳐 소련군의 전차 및 차량 100대를 격파했다. === 전후 행적 === [[1945년]] [[4월]]에 전황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슈트라흐비츠는 부하들에게 비인도적인 소련군의 포로가 되느니 [[미군]]의 포로가 되라고 설득했다. 그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결사적으로 탈출해 [[체코슬로바키아]]로 후퇴한 후 다시 바이에른 주의 미군에 투항했다. 미군의 포로가 된 슈트라흐비츠는 1947년 6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한 슐레지엔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어버려 슈트라흐비츠도 돌아갈 고향과 영지를 잃고 말았다. 1947년 7월 노라 폰 슈툼(Nora von Stumm, 1916–2000)이란 여성과 결혼해 2남 2녀를 뒀다. 1949년 [[시리아군]]의 군사고문으로 취임했다가 1951년 [[서독]]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주]]에서 거주하던 슈트라흐비츠는 [[1968년]] [[4월]]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분류:1893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실롱스키에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백작]][[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폐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독일의 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