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youtube(srXvTLHCnmk)] || [[파일:38민주의거1.png|width=100%]] || [[파일:38민주의거2.png|width=100%]] || || 구호를 외치며 시위 중인 [[대전고등학교|대전고]] 학생들 || 시위 중인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를 구타하는 경찰 || || [[파일:3.8민주의거기념탑.jpg|width=100%]] || [[파일:38민주의거기념비1.png|width=100%]] || || 3.8 민주의거 기념탑 || 3.8 민주의거 기념비 || [목차] == 개요 ==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부터 [[3월 10일]]까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불법적 인권침해에 대항하여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자유와 정의,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열정과 용기로 불의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자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역사적 교훈과 가치가 크며 [[대구]]의 [[2.28 학생민주의거|2·28]], [[마산]]의 [[3.15 의거|3·15]]와 함께 [[4.19 혁명]]의 단초이자 기폭제로서 중대한 의의를 새겼다. == 상세 ==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 [[대전시]] [[한밭종합운동장|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야당부통령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와 때를 맞추어 일어났다.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대전고등학교]] 1,000여 명의 학생이 독재 타도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시민들의 환호 속에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다. 원래 대전시내 고교생들이 연대하여 시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사전 발각되어 경찰의 극심한 저지를 받는 가운데 [[보문고등학교(대전)|보문고등학교]]는 [[3월 9일]]부터, [[한밭대학교|대전공업고등학교]]는 [[3월 10일]]부터의 학기말시험[* 당시에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었다.]으로 시위를 봉쇄했으며 또 9일에 경찰에서 [[대전고등학교|대전고]], [[우송고등학교|대전상고]], [[한밭대학교|대전공고]], [[보문고등학교(대전)|보문고]] 등 4개 학교 학생대표 24명을 연행,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일에는 다시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 명이 자유당의 정부통령 선거전략을 규탄하고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학원의 자유를 위한 시위를 감행했다. [[대전여자고등학교|대전여고]], [[공주교육대학교|대전사범학교]], [[호수돈여자고등학교|호수돈여고]] 등은 경찰 감시 하에 교외진출이 저지되었다. 결국 당시 대전고등학교 교장과 학생들이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경찰서장의 제안에 따라 다시는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쓰면서 시위는 끝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합하여 3·8민주의거로 규정하였다. 시위가 진행되면서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수많은 학생이 경찰의 총개머리판과 방망이로 얻어맞았고 교복, 교모, 신발, 소지품 등 잃어버린 물건이 수없이 많았다. 또 논바닥에 가두어 놓은 인분통에 빠지고 넘어져 곤경에 처하거나 상처가 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 달 이상을 피신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도 있었고 부상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 학생도 많았다. 교사가 수갑을 차고 곤봉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며 경찰 방망이로 맞아 고막이 터지고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된 학생도 있었다. 당시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동아]][[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30900209103001&officeId=00020|#]], [[조선일보|조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30900239103016&officeId=00023|#]], [[한국일보|한국]], [[대전일보|대전]], [[중도일보]] 및 [[서울신문]] 등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3·8민주의거는 한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음은 물론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2000년대를 전후하여 3·8의거 주역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점차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9년]] [[10월 9일]], 대전광역시에서 「3·8민주의거」기념일 제정 조례(제3768호)가 공포되었고 [[2013년]] [[4월 29일]], 3·8대전민주의거의 민주화운동 인정 근거마련을 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5월 22일 정부에서 개정 공포하였다. [[2017년]] [[12월 1일]]에는 3·8민주의거기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18년]] [[11월 2일]], 3·8민주의거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공포했다(대통령령 29271호). 이렇게 3·8민주의거는 [[2.28 학생민주의거|2·28대구민주운동]], [[3.15 의거]], [[4.19 혁명]]과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음을 인정받고 있다. == 결의문 ==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의거를 앞두고 작성하여 연설한 결의문으로 전문을 포함해 7개조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우리의 뜻에 배치되는 충남도 당국과 학교의 처사에 대하여 그 잘못을 깨닫고 조속히 학원의 자유보장과 대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강력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자유로운 학생동태를 감시말라.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단호히 배격한다.[* 수 년 전부터 대전고등학교 학생회는 관변언론이었던 [[서울신문]]의 강제 구독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신성한 학원에서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오늘을 기하여 거행함은 다만 학생들의 사기가 왕성한 때문이다. 결의문 작성자인 홍석곤([[대전고등학교|대고]] 40회)은 2012년 10월 4·19 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 기타 == * 대구의 [[2.28 학생민주의거]]나 마산의 [[3.15 의거]]에 비해도,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저평가받고 있는 민주의거이다. [[나무위키]]에서도 [[틀: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의 [[4.19 혁명]] 이전 4개의 의거 중 가장 마지막으로 문서가 작성되었다. * [[2020년]] [[3월 8일]]에는 3.8 민주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대전고등학교]]부터 [[원동(대전광역시 동구)|원동]]네거리까지의 구간이 '3.8민주로'로 명명되었다. 현재 대전고등학교 교문 앞 보도에 3.8민주로 명판이 자리잡고 있다. [[http://www.38.or.kr/38_patriotic4_5.php|#]] * [[http://www.38.or.kr/|3.8 민주의거 기념사업회]] * [[http://www.38.or.kr/38_patriotic4.php|3.8 민주의거 관련 조형물]] *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서로 46-1(선화동) 일원에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약 900평 내외 규모의 전시실, 도서관, 수장고 등을 갖춘 3.8민주의거 기념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개관 예정일은 2024년 3월 8일이다. || [[파일:38민주의거기념관조감도1.jpg|width=360px]] || || 3.8 민주의거 기념관 조감도 || == 관련 문서 == *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 [[2.28 학생민주의거]] * [[3.15 부정선거]] * [[3.15 의거]] * [[3.17 민주의거]] * [[4.19 혁명]] * [[대전고등학교]] [[분류:이승만 정부]][[분류:학생운동]][[분류:한국 민주화운동]][[분류:1960년 시위]][[분류:4.19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