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폭동]] [[분류:말레이시아의 사건 사고]] [[분류:1969년/사건사고]] [Include(틀:사건사고)] [[파일:external/n9kini.com/13-mei-19691.jpg]] [[파일:external/www.pesantrenglobal.com/pawai-KL-1969.jpg]] Peristiwa 13 Mei [목차] == 개요 == [[1969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이 불러일으킨 참극이다. 1964년에도 당시 말레이시아의 주였던 [[싱가포르]]에서 한 번 유사 사태가 발생한 적은 있었으나 이 사건은 그 규모가 훨씬 컸다. 1969년 5월 10일 선거에서 이긴 중국계가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 축하 행진을 하다가 5월 13일 말레이계 지역인 Kampong Baru를 지나갔는데 거기서 말레이계와 충돌이 일어났다. 혹자에 의하면 한 중국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서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계를 쓸어내는 --어그로-- 시늉을 했다는 소리도 있다. 여튼 여기에 빡친 말레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차와 상점을 불태우고 사망자도 났다. 공식적인 사망자의 수는 2백명이지만 언론에선 2천명까지 사망자를 추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폭동은 오로지 [[슬랑오르]] 주에 국한됐고 중국인이 많이 사는 페낭이나 이포 같은 지역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 사건 이후 == 이 사건 이후 말레이시아에서 인종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금기시되었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 인종을 갖고 장난치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서 흔한 편이었으나 이후에는 이마저도 터부시된다. 사건 이후 [[툰쿠 압둘 라만]] 총리는 수습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했고 최후의 선택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민주행동당]](DAP) 등 야권으로부터 독재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뭐 상황이 나빴기 때문에 불가피하기는 했지만... 결국 라만은 1970년에 당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했다. 후임으로 취임한 [[압둘 라작]]이 빠르게 수습했기 때문네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 시기 [[Rukun Negara]]라는 일종의 [[국민의례]]가 제정되었고 말레이인의 권위가 약한 것이 원인으로 판단되어 일명 [[부미푸트라 정책]]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갈등은 만만치 않으며 역으로 중국인의 권력이 세지면서 그나마 잠잠해졌던 [[말레이 우선주의]]가 부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종을 언급하는 것을 지나치게 금기한 결과 사소한 문제로도 "[[인종차별]]"에 휘말리는 심각한 고질병이 남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말레이시아인 모두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사건'''인 셈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