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from=애니악,other1=동명의 유튜버,rd1=애니악TV)]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85px-Eniac.jpg|width=100%]] [목차] == 개요 == {{{+3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 에커트와 모클리의 공동설계로 [[1946년]] [[2월 14일]]에 만들어진 30톤짜리 [[컴퓨터]]이다. 원래의 목적은 '''군용'''으로, [[포탄]]의 [[탄도학]] 계산을 위해 개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병기국 소속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 소장 글래디온 반즈[* [[https://en.wikipedia.org/wiki/Gladeon_M._Barnes|Gladeon M. Barnes]]. [[M4 셔먼]]과 [[M26 퍼싱]]의 개발을 총괄했고 M1 대전차 로켓에 [[바주카]]라는 별명을 붙였다.]의 의뢰로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완성은 2차대전이 완전히 종결된 [[1945년]] [[9월 2일]] 이후이었기에 전쟁에서는 활용되지 못했다. 이후 원래 목적인 탄도 계산뿐만 아니라 [[난수]] 연구, [[우주선]] 연구, 풍동 설계, [[일기예보]]의 수치예보 연구 등의 각종 과학 분야에서 사용되었으며, 초기형 [[수소폭탄]] 시뮬레이션에도 쓰였다. 쉽게 설명하면 '''30톤짜리 [[공학용 계산기]]'''였다. 성능은 kHz에 불과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현재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흔히 쓰는 [[전자계산기]]만도 못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후 기술이 점차 발전하며 [[컴퓨터]]의 시초가 되었고, 넓게 보면 [[정보기술]]의 발달에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제작 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달러]]를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50만 달러 가량이였다고 하는데, [[1946년]]의 50만 달러면 [[2018년]]의 가치로는 대략 645만 달러[* [[2022년]] 10월 기준 한화 약 92억 [[대한민국 원|원]]]쯤 된다. == 상세 == 에니악의 구조는 이후 개발되는 [[폰노이만 구조]]와는 달리 스위칭 소자를 배선으로 직접 이어서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현대의 기준으로는 [[FPGA]]에 가까웠다. 회로 구현에 [[진공관]] 18800개, 캐패시터 1만 개, 기계식 스위치 6천 개, 그리고 메모리 용도로 저항 7만 개를 사용했다. 진공관은 대부분 쌍 삼극관(듀얼 트라이오드)으로, 작동 안정성을 늘리기 위해 원래 6.3볼트로 작동하는 필라멘트를 5.7볼트로 [[언더볼팅]]했다. 이들 진공관은 작동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오프 상태로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진공관 단위에서는 [[2진법]]을 따랐고, 이 진공관으로 구성된 [[10진법]] 링 카운터에 의해 십진법으로 숫자가 구현되었다. 진공관, 스위치와 메모리 저항으로 구성된 모듈 30개에는 기본적인 연산 기능(사칙연산, 제곱근)과 더불어 논리소자와 배선을 통한 프로그래밍 기능이 있었고, 모듈 내부와 외부의 연결을 변경하여 로직을 구현하는 식으로 다양한 목적의 병렬 연산을 수행할 수 있었다. 작동에 필요한 전력량은 총 180kW 가량이었다. [[클럭]]은 현대 기준으로 약 100kHz 가량[* 세계 최초의 민간용 CPU인 [[인텔 4004]]('''740kHz''')보다도 더 성능이 낮다. 물론 4004는 에니악 공개로부터 25년 후인 '''1971년'''에 나온 것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100Khz는 0.1Mhz이며, 현재 나오는 인텔 CPU의 최대클럭이 5.2Ghz이니, 간단히 따져봐도 52,000배 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이었는데,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전자식 컴퓨터였다보니 클럭당 효율(IPC)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1945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이 정도만 해도 기적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에니악이 처음 만들어진 용도인 탄도 계산을 기준으로 할 경우, [[미분방정식]]으로 60초간 포탄이 날아갈 궤적을 계산할 때 [[인간 컴퓨터|계산수]]가 20시간, 일반적인 릴레이 기반 전자기계식 컴퓨터는 15분이 걸려야 겨우 할 수 있는 계산량을 에니악은 30초 안에 처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에니악의 처리 속도는 단순한 계산 횟수만 따져도 인간 계산수의 약 2400배, 전자기계식 컴퓨터의 30배였고, 에니악의 유효 숫자[* 1940년대에는 중요한 성능 지표였다.]가 더 많은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처리 속도는 인간 계산수의 10만배, 전자기계식 컴퓨터의 1000배까지 늘어났다. 에니악의 유효숫자는 '부호가 있는 10자리'인데 비해 [[계산자]]로는 유효숫자 5자리까지가 한계였다. 한번 제대로 세팅되면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연산을 할 수 있었으므로 에니악은 1953년까지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거치면서 활용되었고, 1955년 10월이 되어서야 퇴역하였다. 이런 빠른 속도를 1940년대에 구현한 대가로, 에니악의 구조에는 상당히 많은 병목이 있었다. 첫째는 진공관의 발열과 내구성이었다. 1만 8천개의 진공관이 일제히 내뿜는 열 때문에 에니악이 설치된 방은 작동 내내 에어컨으로 냉각해야 했고, 초창기에는 수시로 진공관이 터져나가면서 가동 시간의 절반이 진공관 교체에 할애되었다. 다행히도 가동 노하우가 쌓이면서 진공관이 터지는 주기는 2일에 1개 정도로 줄어들었고, 교체 시간도 15분 이내로 줄어들었다. 개발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 부분은 매분마다 진공관이 터져나갔다는 풍문과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심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다.[* A. Randall 5th., [[https://www.computerworld.com/article/2561813/q-a--a-lost-interview-with-eniac-co-inventor-j--presper-eckert.html|Q&A: A lost interview with ENIAC co-inventor J. Presper Eckert]], 2006] 둘째는 느린 입력과 출력 속도였다. 아직 자기 코어 메모리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IBM [[천공 카드]]가 유일한 입력 수단이었고, 출력된 수치도 천공 카드에 찍혀야 했다. 천공 카드 출력 속도는 연산 속도의 1/20 정도로 매우 느렸다. 그리고 입력과 출력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계산을 수행할 수 없었다. 셋째는 프로그래밍에 따르는 어려움이었다. 상술한대로 에니악의 프로그래밍은 사람이 스위칭 소자와 배선을 직접 조작해서 구현하는 방식으로[* 현대식으로 비유하면, [[FPGA]] 로직의 합성을 [[베릴로그]]를 통한 자동화 없이 사람이 일일이 소자를 조작해서 하는 것과 같다.], 미리 작성된 프로그램과 연산에 필요한 변수를 하드웨어 수준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만 며칠이나 걸렸다고 한다.[* Alt, Franz (July 1972). ''[[https://dl.acm.org/citation.cfm?id=361528&dl=ACM&coll=DL|Archaelogy of computers: reminiscences]]'', 1945-1947. Communications of the ACM. 15 (7): 693–694.] 이런 어려움은 [[존 폰 노이만]]이 폰 노이만 구조를 주창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 출처: Arthur W. Burks, [[https://archive.computerhistory.org/resources/access/text/2016/06/102724650-05-01-acc.pdf|Electronic Computing Circuits of the ENIAC]], 1947 || ==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가? == 한때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후 소송을 통해서 1973년 10월 19일 미국 법원이 "인류 최초의 전자 계산기는 ABC다"라고 판결 하였다. ABC(어태너소프-베리 컴퓨터)[* 존 어태너소프(John Atanasoff)는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아이오와 주립대학]]의 교수였고, 클리퍼드 베리(Clifford Berry)는 그의 제자다. 1939년 개발에 착수해 1942년에 실험을 거친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였다.]는 1942년에 개발되었다.[* 이것이 잘못된 판결이라는 주장 또한 만만찮다. 모클리와 에커트가 에니악으로 특허를 신청하려고 했을 때 다른 컴퓨터 회사에서 재판에 유리한 증거로 써먹었던 자료에 불과한 것을 기술에 밝지 못한 판사가 엉뚱하게 최초의 컴퓨터로 판결해 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ABC는 컴퓨터라기 보다는 전자계산기의 기술적 가능성을 보여준 정도에 불과하다고.] 이후 세계 최초의 '''실용화된''' 컴퓨터란 자리 또한 1943년에 개발된 [[콜로서스#s-3]]가 가지고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이 독일의 암호를 깨기 위해 사용한 실용화된 컴퓨터.] 에니악보다 등장시기가 빠르지만 전시 기밀이기 때문에 공개가 1975년에 될 정도로 늦어졌으며 공개가 늦어진 탓에 에니악이 최초의 컴퓨터라는 오해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공개가 늦어진 이유는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독립한 예전 식민지 국가들에게 독일의 암호 기계를 넘겨주고, 콜로서스를 계속 가동하면서 암호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1975년에 공개한 이유는 이 즈음에 독일의 암호 체계가 거의 다 도태되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니악이 여전히 컴퓨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클리, 에커트와 [[존 폰 노이만]]은 에니악이 개발중인 1944년에 이미 에니악의 구조적인 불편함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인 EDVAC을 구상하고 있었다. EDVAC의 구조는 1945년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Draft_of_a_Report_on_the_EDVAC|폰 노이만의 1945년 논문]]을 통해 현대에까지 쓰이는 '[[폰 노이만 구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 여담 == * 에니악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모니악]]이란 컴퓨터도 존재한다. * 프로그래밍 용어인 [[버그]]가 에니악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실제로는 1947년 Harvard Mk.2라는 컴퓨터를 다루던 [[코볼]]의 어머니이자 산업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여성 프로그래머로 간주되는 [[그레이스 호퍼]]가 컴퓨터의 오작동 원인을 추적하다가 속에서 타죽은 벌레를 발견해 노트에 기록한 것이 어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