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2차 세계대전/이탈리아 항공기)] [Include(틀:항공병기 둘러보기)] [[파일:Savoia-Marchetti-SM-93-1.jpg]] '''사보이아-마르케티 SM.93(Savoia-Marchetti SM.93)''' [목차] == 프론 포지션 구상 == [[전간기]]부터 뛰어난 기체를 여럿 설계해내어 [[이탈리아]] 최고의 항공기 설계자로 명성이 높던 알레산드로 마르케티(Alessandro Marchetti, 1884~1966)는 [[1942년]] 무렵부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조종사]]가 탑승하는 군용기를 제도판 위에 그려놓고 있었다. 이 항공기는 아직 구체적인 사양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장차 손에 넣게 될 신형 엔진을 장비하고 조종사는 엎드려서 타게 되어 있어 기동시 신체에 걸리는 중력 압박을 잘 견디게 해줄 뿐 아니라 항력 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였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이미 미증유의 전쟁에 뛰어든지 수 년이 지나 경제력이 피폐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케티 기사의 디자인은 드로잉 보드 위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이 [[폭격기]]가 실제로 만들어지게 된 까닭에는 그 무렵 [[지중해]]의 전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 개발 배경 == [[1943년]] 10월 23일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엘 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추축군]]은 이 대반격에 의해 이듬해 5월까지 [[튀니지]]에서 병력의 1/4을 잃었으며, 북아프리카 군단과 함께 [[이탈리아군]]도 눈물을 머금고 전선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추축군은 [[연합군]]의 호송 함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이집트]] 등으로 향해 각 전선에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가 공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보급로에 압박을 가할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즈음 [[동부전선]]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같은 격전을 거듭하느라 이런 부차적인 전선과 전략 목표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1943년 중반 [[지중해 전역]]에서 이탈리아인들은 미영 연합군과 거의 단독으로 남아 싸우고 있었다. 한때 화려했던 [[SM.79]] 스파르비에로 폭격기는 이미 영광스러운 시절을 떠나보내고 구식 무기로 전락해버렸고, 이탈리아 왕립공군의 폭격기는 대부분 [[독일]]에서 구입한 [[슈투카|피치아텔로]]로 대체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6월 10일부터 [[시칠리아]] 방면에서 찔러 들어왔다. 판텔레리아 섬을 차지해 전진 기지로 삼은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을 점령하자 사실상 이탈리아는 지중해의 제해권를 완전히 잃었고 두 번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전황이 지리멸렬해지자 [[두체]]는 실각했고, 뒤이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이탈리아반도]]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을 동원하여 연합군이 아직 함락시키지 못한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게 했다. [[밀라노]] 근교에 본사를 두고 있던 사보이아-마르케티 사도 마찬가지로 독일 점령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항공기 개발과 생산에 관한 권한은 [[제3제국]] 항공성의 관할로 넘겨졌다. 이듬해인 [[1944년]] 1월이 밝아오자, 연합군은 [[안치오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로마에서 불과 30 km 떨어진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면 독일은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잃게 되고 본토 남부는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기 부족은 공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추축군에 하나의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전황이 이런 식으로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탈리아 공군은 새로운 쌍발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지상 [[공격기]] 같은 군용기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반도 북부에 남아있는 각 항공기 생산업체에 시급히 신형기를 개발하도록 채근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진작부터 물자 동원 능력이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어서 항공기 제작에 필수적인 [[알루미늄]] 같은 경금속과 [[니켈]], [[크롬]] 같은 전략물자가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무언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 엔진의 선정 == 알레산드로 마르케티가 이끌고 있던 사보이아-마르케티 사의 개발진들은 이 신형 폭격기의 개념을 슈투카에서 가져왔더라도, 동등한 수준의 성능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개전 초기 [[영국 공군]]에게 풍비박산난 경험을 통해 구식화된 슈투카 정도의 성능으로는 장차 전선에서 생존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폭격기면서도 [[전투기]]와 맞먹는 성능을 가진 새로운 타입의 군용기를 만들어내야만 했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던 항공 엔진으로는 그 같은 성능은 절대 낼 수가 없었다. 설계팀은 출력이 다소 높은 성형 공랭식 엔진도 고려해보았으나, 이미 항력 문제에 대한 답은 나와있는 상태였다. 개발진들은 [[1942년]] 4월에 SM.79에다 [[다임러 AG|다임러-벤츠]]로부터 생산 면허를 받아 [[알파 로메오]] 사에서 만든 RA 1000 RC.41 몬순(Alfa Romeo RA 1000 RC.41 Monsone) 엔진을 이식해서 좋은 성과를 내본 경험이 있었고, 마키(Macchi) 사의 주임 설계자 마리오 카스톨디(Mario Castoldi : 1888~1968)가 [[MC. 202 폴고레]] 전투기와 [[MC. 205 벨트로]] 전투기에 독일제 엔진을 얹어 차원이 다른 성능을 발휘한 전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항공성은 이 고성능 엔진의 물량이 딸려 폭격기에 쓰는 것을 허가해주지 않았던 탓에 액랭 엔진 폭격기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계약자가 독일로 바뀐 데다 전투기보다 폭격기가 더 시급해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개발진들은 다임러-벤츠 DB 605a를 [[피아트]] 사에서 면허 생산한 RA1050 RC.58 티포네(Fiat RA 1050 RC.58 Tifone) 엔진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1943년 여름까지 엔진 선정을 뒤로 미루고 기체 설계에 매달렸다. 이탈리아가 독일제 엔진을 베껴 만든 [[프로토타입]] 엔진은 세부적인 디테일에서 약간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12개의 [[실린더]]가 역V자형으로 배치되고 에틸렌-글리콜 전용 냉각액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5,800 m 고도에서 1,475 마력을 내는 수준이어서 독일제와 동일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 독특한 구조 == 기체의 중요한 특징은 앞서 밝힌 대로 전략물자를 아끼기 위해서 동체와 날개까지 전부 나무로 만들어진 점이다. 이 시대쯤 되면 이미 목재 항공기를 만드는 기술은 스포츠용이나 민간 경비행기 같은 몇 가지 예외를 빼면 넌센스한 짓으로 취급될 정도였으며[* 예외적으로는 [[영국]]의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정도이다.], 실제로 설계와 세세한 공작 및 가공 기술도 잊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무를 깎아 만들어진 SM.93의 뼈대 위에는 기수 앞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캔버스]] 천으로 덮여 있었다. 조종석과 기체 하부의 일부에는 강철제 장갑판이 덧붙여진 것도 이 기체의 특징이었다. 그 조종석은 실로 이채로웠는데, 앞쪽의 조종사는 경사진 침대와 같은 [[매트리스]]에 엎드려 타고 관측수를 겸하는 기총 사수는 후방에 뒤로 비스듬히 누워 타게 되어 있었다. [[테스트 파일럿]]이 침대라고 부르던 이 조종석은 탑승자가 먼저 엎드린 다음 비행기의 앞쪽에서 삽입되는 일종의 패키지 방식으로 타고 내릴 수도 있었으며, 거의 엔진 위에 엎드려 날아가는 형상이었다. 이른바 프론 포지션 콕핏(Prone Position Cockpit)의 조상뻘인 셈이었다. 이 경우는, 항력을 절감해주는 효과보다는 급강하해서 폭탄을 떨구고 재차 급상승을 반복하는 급강하 폭격기의 기본적인 운용 전술에서 조종사의 중력 압박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SM.93의 무장은 모터캐논 방식으로 20 mm [[기관포]]의 포구가 프로펠러 축에서 삐죽 내밀고 있었고, 150발의 탄창이 딸려있었다. 주익에는 각각 12.7 mm 브레다-사파트 중기관총이 350발의 탄약과 함께 수납되었다. 방어 무장 역시 1정의 12.7 mm 기관총으로 구성되었으며, 캐빈 후방의 총가에 거치되었다. SM.93의 동체 하부 파일런에는 최대 800 kg짜리 대형 폭탄을 매달 수 있었고, 좌우 날개에는 각각 2개씩의 무장 파일런이 덧붙여져 있었다. == 테스트 == SM.93의 첫 비행은 1944년 1월 31일에 연합군이 안치오에 상륙하던 것과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바레세(Varese)에 있는 시험비행장에서 개시되었다. 당시 독일 항공성은 슈투카를 대체할 단발 고속 폭격기를 대체하는 데 실패했던 탓에, 동맹국이 만들고 있던 신형 급강하 폭격기에 흥미를 느끼고 테스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은 2개월 동안 16회 / 6시간 40분을 비행하며 각종 분석을 받았고, 채용이 결정되었다. 테스트 말기인 1944년 3월 29일에 기술 평가와 전술 고안을 위해 시험 비행을 받던 SM.93은 급강하 도중 시속 900 km 이상이라는 최대 속도를 달성하여 평가단을 놀라게 했고, 전반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조종성은 나무랄 데가 없었고, 훌륭한 고속 비행특성에 더해 특히 중요한 것은 급강하 기동과 고도를 회복하는 기동성이 아주 뛰어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루프트바페]]가 파견한 시험관들은 더 이상의 평가를 중지하고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런 판단의 배경에 대해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연합군의 급속한 내륙 침공으로 최전선이 다가오고 있는 다급한 전황에 쫓겨 도입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테스트를 받던 시제기는 수리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에 의해 방치되었고, 그 다음 SM.93이 맞은 운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최후 == 추측이지만, 아마도 이 기체는 연합군이 바레세에 공습해왔을 때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944년 4월 25일 아침 8시 29분, 현지인들에게 페라라 마샬 비행장이라고 불리던 바레세 시험비행장에 연합군의 [[B-24]] 중폭격기 29대가 몰려왔고, 19,000피트 상공에서 일제히 500파운드 폭탄의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오전 9시 22분 경 1차 공습이 끝났을 때 이 비행장에는 32.5톤의 폭탄이 명중해서 [[활주로]]는 완전히 벌집이 되고 주기된 기체들의 상당수가 파괴된 상태였다. 오후 12시 52분, 이번에는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18,500피트 상공에서 기지를 덮쳤다. 이들은 2발의 [[톨보이|5톤 폭탄]]을 명중시켜 활주로를 완전히 세 등분내버렸다. 폭격을 성사시킨 제449폭격비행단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볼일을 마치고선 유유히 돌아갔다. 이탈리아측의 기록에 따르면 19대의 아군기가 요격에 나섰으나 기지로 돌아온 것은 겨우 6대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중에 2대는 착륙하다가 활주로의 탄공에 빠지고 아군 대공포의 오사에 얻어맞고 파괴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북새통에서, 테스트를 마치고 비행장 한 구석에 방치되었던 SM.93이 멀쩡했을 것이라고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 날 노천에 주기된 기체는 폭격에 불타버렸을 것이고, 이탈리아가 완전히 해방된 후에야 다른 기체의 잔해와 함께 치워졌을 것이다. == 제원 == 초도비행: 1944년 1월 31일 전장: 10.93 m / 전폭 : 13.90 m / 전고: 3.80 m / 익면적: 31.10 m2 중량: 3,552 kg~5,500 kg 동력: 다임러-벤츠 DB 605A 액랭식 엔진 (1,475 hp) 1기 최대속도: 580 km/h 순항속도: 505 km/h 상승고도: 8,200~10,000 m 항속거리: 1,650 km 무장: 20mm [[MG 151|MG 151/20]] 기관포 1문 / 12.7mm [[M1919 브라우닝#브레다-사파트|브레다-SAFAT]] 중기관총 2정 / 12.7mm [[M1919 브라우닝#브레다-사파트|브레다-SAFAT]] 중기관총(후방 총좌) 폭탄 탑재량: 1,450 kg [[분류:항공기]] [[분류:폭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