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1~10위)] ||<-2> '''{{{+1 Gerhard "Gerd" Barkhorn}}}[br]게르하르트 "게르트" 바르크호른'''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Barkhorn, Gerhard - Major 1.jpg|width=100%]]}}}|| ||<|2> '''출생''' ||[[1919년]] [[3월 20일]]|| ||[[프로이센 자유주]] [[쾨니히스베르크]]|| ||<|2> '''사망''' ||[[1983년]] [[1월 11일]] (향년 63세)|| ||[[서독]] [[쾰른]]|| ||<|1> '''매장지''' ||[[독일]] [[바이에른]] 테게른제|| ||<-2> '''군사 경력''' || ||<|2> '''복무''' ||<#f5f5f5,#2d2f34>[[독일 국방군]] [[루프트바페]] (1937년 ~ 1945년)|| ||[[독일 연방군]] [[독일 공군|루프트바페]] (1956년 ~ 1975년)|| ||<|2> '''최종 계급''' ||[[소령]] (독일 국방군)|| ||[[소장]] (독일 연방군)|| || '''참전''' ||'''[[제2차 세계대전]]'''|| || '''주요 서훈'''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asisbiz.com/Artwork-Focke-Wulf-Fw-190D9-JG6-(5-+-Gerhard-Barkhorn-1945-0A.jpg|width=100%]]}}}|| ||<#fff,#1f2023> 바르크호른의 [[Fw190|Fw 190 D-9]][* 바르크호른은 Fw 190 D-9과 [[Me 262]]도 탑승했으나 격추 기록은 전부 [[Bf 109]]으로 이루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국방군|독일군]] [[루프트바페]]의 슈퍼 [[에이스]]. 격추 수 1위인 [[에리히 하르트만]]과 함께 전 세계 역사에서 '''300기 이상 격추''' 기록을 가진 단 두 사람 가운데 하나다. 에리히 하르트만과 합쳐서 '''653대'''를 격추했다. == 생애 == 1919년 3월 20일 [[프로이센 자유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937년 11월 18세의 나이로 [[루프트바페]]에 입대, 2차 대전 발발 직후 [[소위]]의 계급으로 [[JG 2]] 제3중대에 배속되어 [[전투기]] 파일럿으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40년 8월 1일에는 [[JG 52]] 제6중대로 전속되었고, 이후 4년반 동안 그는 JG 52 제2비행대에서 지냈는데 바르크호른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선 21차례 작전 비행을 하는 동안 단 1기의 격추도 기록하지 못한 들러리였고, [[독소전]]이 개시되어서야 약체인 [[소련군|소련 공군]]을 상대로 1941년 7월 2일, 자신의 120번째 출격에서 1기를 격추하여, 최초의 스코어를 올린다. 1941년말이 되어서도 그의 격추수는 10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1942년 3월 1일 JG 52의 4 중대장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슬럼프를 탈출, 격추 스코어는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통산 스코어 64기가 되었을 때, 그 공적으로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고, 12월에는 17기의 스코어를 올려 마침내 대망의 100기 격추를 달성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3년 1월 11일 통산 105기를 격추한 시점에서 곡엽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뒤, 9월 1일에는 162기 격추를 달성하고 [[대위]]로 진급함과 동시에 JG 52 제2비행대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einrich Sturm, Gerhsrd Barkhorn, Wilhdlm Batz Otto Fonnekold.jpg|width=100%]]}}}|| ||<#fff,#1f2023> 왼쪽부터 [[하인리히 슈투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빌헬름 바츠]], [[오토 푀네콜트]] || 비행대장이 되어 바쁜 와중에도 바르크호른은 정력적으로 출격을 계속하여 1943년 11월 30일에는 [[Yak-1]]기를 1기 더 격추시켜 통산 200기 격추를 달성한다. 다음해 1944년 1월 23일에는 출격횟수도 1,000회에 달했다. 그리고 2월 13일 [[발터 노보트니]], [[귄터 랄]]에 이어 세번째로 250기 격추를 달성했으며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5월 31일에 통산 272기 격추를 달성한 후 공중전에서 피탄, 부상을 당해 5개월간 전선을 떠나야 했다.[* 에리히 하르트만이 300기 격추를 기록한 게 같은 해 8월 24일이었으니 이 부상이 없었다면 바르크호른이 300기 격추를 최초로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이틀에 1대 꼴로 격추시켰어도 8월 초에 300기가 됐을 테니...] 그해 10월에 겨우 전선에 복귀, 1945년 1월 5일 마침내 [[에리히 하르트만]]에 이어 두번째로 300기 격추를 달성했다. 1월엔 JG 52를 떠나 본토 방공 부대인 [[JG 6]]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고, 이어 4월 15일 [[아돌프 갈란트]] 장군이 이끄는 [[JV-44]]로 스카웃되어 [[Me 262]] 제트전투기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하에서 더 이상의 스코어는 기록하지 못한 채 통산 301기로 종전을 맞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erhard Barkhorn1965.jpg|width=100%]]}}}|| ||<#fff,#1f2023> 1965년의 바르크호른 || 전후 [[서독]] [[공군]]에서 [[소장(계급)|소장]]까지 진급하고 전술 항공군 사령관을 지내고 퇴역한 뒤 1983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기타 == 에리히 하르트만이 항상 고도차이를 이용한 급강하로 일격에 격추시키는 전술을 장기로 삼은 것에 비해, 바르크호른은 전통적인 방법- 즉 도그파이트로 접근전에 의한 격추를 장기로 했다. 즉 바르크호른은 1차대전식 에이스에 가까웠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독일 연방군/인물]][[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1919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교통사고로 죽은 인물]][[분류:독일의 실향민]][[분류:칼리닌그라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