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59년 집정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br]{{{-1 [[라틴어]]: Lucius Cornelius Scipio}}}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아버지)[br][[스키피오 아시나]](형제)[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장남)[br][[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1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 ||<#800080> {{{#ffffff '''참전'''}}} ||[[제1차 포에니 전쟁]] || ||<#800080> {{{#ffffff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임기'''}}} || 기원전 259년 || ||<#800080> {{{#ffffff '''전임'''}}} || [[스키피오 아시나]][br][[가이우스 두일리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br][[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 기원전 280년 [[감찰관]]을 역임하면서 에트루리아, 켈트족, 삼니움족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형제 [[스키피오 아시나]]는 기원전 260년과 기원전 25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261년 [[조영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59년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수행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코르시카에 상륙한 뒤 알레리아 시를 습격하고 파괴한 뒤 섬 전체르 어려움 없이 점거했다. 뒤이어 사르데니아로 건너가 올비아를 포위했지만 강력한 적 함대가 등장하자 포위를 풀고 이탈리아로 철수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코르시카 뿐만 아니라 사르데냐 전체를 장악했다고 하며,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플로루스는 그가 올비아를 공략하고 아프리카 자체를 제외하고는 카르타고인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가 올비아를 공략하는 동안 카르타고 사령관 [[한노(제1차 포에니 전쟁)|한노]]가 전사하자 그를 명예롭게 묻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스키피오 가문에 깊은 동경심을 품고 그들에게 호의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던 [[폴리비오스]]는 정작 기원전 259년 집정관 스키피오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현대 학자들은 공략되었다는 울비아가 이후 기록에도 카르타고의 영역으로 나온 것을 볼 때 올비아는 이 시기에 로마군에게 공략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한 뒤 기원전 258년 [[가이우스 두일리우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고 로마에 폭풍의 신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차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1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1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두 사람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베리아 전역에서 맹활약했으나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최종적으로 종결시킨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그의 손자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