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모용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모용선비/왕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37 0%, #233067 20%, #233067 80%, #000037)" {{{#ece5b6 '''고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전연 황제)] ---- [include(틀:사마진 군공)]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37 0%, #233067 20%, #233067 80%, #000037); color: #ece5b6" '''전연 추존 황제[br]{{{+1 고조 무선제 | 高祖 武宣帝}}}'''}}} || ||<|2> '''출생''' ||[[269년]] || ||[[서진|진]] [[랴오닝성|창려군]] [[진저우시|극성현]][br](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2> '''사망''' ||[[333년]] [[6월 4일]] (향년 64세) || ||[[모용부]] [[랴오닝성|창려군]] [[진저우시|극성현]][br](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ece5b6 제4대 군주}}}''' || ||[[285년]] ~ [[333년]] [[6월 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모용부|모용(慕容)]] || || '''휘''' ||외(廆) || || '''부친''' ||[[모용섭귀]] || || '''형제자매''' ||5남 중 2남 || || '''배우자''' ||부인 단씨 || || '''자녀''' ||10남 1녀 || || '''자''' ||혁락괴(弈洛瑰), 약락외(若洛廆) || || '''작호''' ||요동군공(遼東郡公) || || '''묘호''' ||'''[[고조]](高祖)''' || || '''시호''' ||양공(襄公)[br]→ 무선왕(武宣王)[br]→ 무선황제(武宣皇帝)[* 손자인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이 추존한 것이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휘는 외(廆)로, 본명은 혁락괴(弈洛瑰) 혹은 약락외(若洛廆)였다. [[선비족]] [[모용부]]의 제4대 대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모용선비의 부흥기를 가져온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가 모용부를 통치할 시기 모용외는 중원이 혼란스러워진걸 눈치채고 [[서진]]이 북방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에 모용부를 급속히 성장시켰다. 이후 그의 아들 '''[[모용황]]'''이 아버지가 닦은 기틀을 통해 모용선비 최초의 왕조인 [[전연]]을 건국해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시대]]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한동안 관동, 요서 및 요동 일대를 아우르는 강대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때문에 전연 최초의 황제인 [[모용준]]과 함께[* 모용외때는 아직 왕조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모용황은 칭왕만 했을 뿐 칭제까진 가지 않았다.] 이들 또한 암묵적으로 황제나 그 이상의 영웅으로 추존되는 경향이 강하다. 모용외는 어려서부터 [[미남]]이었고, 몸집이 우람했다고 한다. [[문무겸비|용맹하고 호전적인 정복군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중국의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학식도 뛰어났다.]] 심지어 말년에 들어서는 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몸소 글로 정리하여 집필할 정도로 학구적인 면모를 지녔다. 내정에도 힘을 써서 세력을 일으킨 후에는 전란을 피해 동쪽으로 피난해온 [[한족]]의 인구를 수용하고 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했다. 또한 중국의 사상과 문화 및 관직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토지 개간과 농업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생애 == === 초기 생애 === 269년 [[선비족]] [[모용부]]의 제3대 대인 [[모용섭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자 모용섭귀의 동생인 [[모용내]]가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리고 조카인 모용외를 죽이려하니 모용외는 [[요동]]으로 도망가 2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살았다. 285년 국인([[귀족]])들이 모용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옹립했다. 모용외는 [[우문부|우문선비]]를 공격하기 위해 [[서진]]에 표를 올려 허락을 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화가 난 모용외가 서진의 [[요서]]를 침략해서 살육을 벌였다. 그러자 서진에서 군대를 보내 모용외를 공격하자 모용외가 대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모용외는 서진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285년 동쪽의 예맥계 국가인 [[부여]]를 공격했다. 부여왕 [[의려왕|의려]]는 대책없이 공격당하자 자살했고, 모용외는 그 국성을 함락시킨 후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이때 서진이 가침을 보내 의려왕의 아들 의라를 맞이해 부여 왕으로 즉위시키려고 하자 모용외가 손정을 보내 기병으로 이를 요격했다. 하지만 가침이 이를 막아내고 손정을 베어 부여를 회복시켰다. 결국 모용외는 서진과의 대립 과정에서 힘이 부치자 >“나는 선공 이래 대대로 중국을 받들었으며 또한 화예([[중화(중국)|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다스림이 다르고 강약이 실로 차이나니 어찌 진나라와 더불어 다투겠는가? 어찌 불화하여 내 백성들을 해롭게 하겠는가!” 라며 서진에 사신을 보내 항복했다. 이로써 모용외는 서진에 의해 '선비도독'에 봉해졌다. 이때 모용외가 서진 동이교위부의 하감을 찾아갔는데 하감이 무장을 한 채 그를 맞이하자 그도 [[군복]]을 입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모용외는 >“주인이 예의로써 대하지 않는데 손님 또한 어찌 예의를 차리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 뻘줌해진 하감은 모용외에게 경탄했다. 선비족인 우문부와 [[단부]]는 모용부가 날로 성장하자 모용부와 왕래하며 이를 경계했다. 모용외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해주며 경계를 허물었다. 289년 중심지를 청산으로 옮겼다. 293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그 군세가 매우 강하여 고구려 제14대 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 소형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봉상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봉상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했다. 결국 모용외는 고노자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 [[팔왕의 난]] === 294년에는 대극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뿐만 아니라 내정을 개혁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보급하고 서진의 법제를 도입하는 등 국가의 체계를 정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96년, 모용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제13대 [[서천왕]]의 능[* 고구려의 서천원에 있었다고 한다.]을 도굴했다. 그러자 봉상왕이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했는데, 고노자가 신성 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했다. 301년 서진의 [[연]] 지방([[유주(중국)|유주]])에서 물난리가 나자 모용외가 식량을 보급하여 이를 구제했다. 이에 서진 측에서 관복을 하사하며 사의를 표했다. 서진에서 드디어 [[팔왕의 난]]이 일어났고, 모용외는 이를 틈타 주변 세력을 소탕했다. 대표적으로 302년~303년 우문부의 우문막규가 동생 우문굴운을 보내 서진 변경의 성을 침탈하고, 우문굴운의 별수(별장) 우문소노연이 여러 부를 공략하자 모용외가 직접 이들을 공파했다. 우문소노연이 분노하여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극성은 공포에 휩싸여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이때 모용외가 이렇게 말했다. >“소노연의 우문군이 비록 [[개]]나 [[양(동물)|양]], [[개미]]떼처럼 많이 모였으나 군에 법제가 없고 이미 우리의 계책속으로 떨어졌도다. 제군은 다만 힘껏 싸우면 될 뿐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는 무장하여 직접 성밖으로 달려나가 우문소노연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그들을 100여 리에 걸쳐 추적해 10,000여 명을 참획했다.('''극성 전투''') === [[영가의 난]] === 304년에 남[[흉노]]족의 수령인 [[유연(전조)|유연]]이 자립해 [[전조(오호십육국시대)|호한]]을 세우고, 311년에는 그의 아들 [[유총(전조)|유총]]이 [[영가의 난|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서진에서는 많은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동북쪽의 모용부로 귀부했다. 모용외는 서진에서 귀부하는 한족 유민들을 거부하지 않고 모용부가 성장하는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세자 [[모용황]]을 서진에 입조시켜 선진 학문을 배우게 했고, 서진에서 배우고 온 모용황은 부친인 모용외에게 서진의 학문을 가르쳤다. 모용부는 서진의 문물을 수입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307년~313년 모용외는 선비의 '대[[선우]]'를 자칭했다. 이때 선비족인 소(희)련과 목(환)진이 해마다 요동군을 침탈했다. 이에 많은 한족 유민이 발생하여 모용부에 망명했다. 모용외는 아들 [[모용한]]의 건의로 소련과 목진을 격파하고,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극성으로 옮긴 후 요동군을 복구했다. 317년 4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관직을 내렸으나 모용외는 무시했다. 하지만 318년 3월에는 동진이 모용외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데 성공했다. 316년 11월에 [[서진]]이 멸망하고, 317년 3월에 [[동진]]이 확실히 건국되었으나 요동 등에는 사마씨 진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다.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는 한족 유민들이 자신의 휘하로 오지 않고 모두 모용부로 흘러들어가자 이를 질투하여 고구려, 우문부, 단부와 손을 잡고 모용부를 분할하려고 했다. 319년에 [[고구려]]의 제15대 [[미천왕]]과 우문부 및 단부가 손을 잡고 모용부를 공격하여 수도 극성까지 포위했으나 모용외가 이들을 교란시켜 우문부가 모용외와 한 편인 것처럼 의심하게 해 고구려군과 단부군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했다. 이에 우문부의 대인인 [[우문실독관]]이 단독으로 모용부를 격파하려고 덤벼들었으나 모용외에게 대패했다. 결국 최비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최비는 모용외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그의 승전을 축하했으나 모용외가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 라고 최비에게 경고하자 최비는 혼자서 고구려로 도망갔다. 모용외는 최비가 남기고 간 가족들을 극성으로 옮겼다. === 말년 === 320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했으나 모용외가 격퇴했다. [[미천왕]]과 모용외는 일진일퇴했으나 성과는 없었고, [[고구려]]의 요동 정벌과 전성기는 이렇게 100년을 미루게 되었다. [[단부]]의 [[단말파]]의 세력이 아직 방비가 되어있지 않아 모용외가 세자 [[모용황]]을 보내 단부를 습격했다. 모용황은 단부의 땅인 영지에 침입해 명마와 보물을 약탈해왔다. [[후조]]의 [[갈족]] 군주인 [[석륵]]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모용외는 거절하고 사신을 붙잡아 [[동진]]의 [[건업]]으로 보냈다. 325년 석륵이 분노하여 모용외를 공격했으나 [[모용황]]이 격퇴했다. 모용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옥]][* 獄, [[형벌]]과 [[옥사]]]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인, 군자는 국가의 기초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가색[* 稼穡, [[파종]]과 [[수확]]=[[농사]]]은 나라의 근본이니 (중요하게 다루어) 긴급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색편녕[* 酒色便佞, [[술]], [[여자]] 및 좋은 말로 아첨떠는 것]은 덕을 몹시 어지럽히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유교]]에 대한 견해를 담은 수천 자로 된 《가령》(家令)을 저작했다. 모용외는 33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모용황]]이 자립하여 연왕을 칭했으며, 손자인 [[모용준]]이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 혹은 무선황제로 추증했다. == 한국에서의 인지도 == 역사상 최초로 [[한민족]]이 세운 나라를 침략하여 한민족 vs 북방 유목민족 간 대립구도라는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다. [[대한민국|한국]]에서는 고대사에서 [[부여]]를 대대적으로 말아먹고 [[고구려]]와 충돌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즉 [[선비족]]의 [[부여]] 침략을 시작으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 년이 넘는 '''[[한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질긴 악연'''이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 어디까지나 기록상 최초의 북방 민족과 [[한민족]] 간의 충돌이다. 그 이전 [[고조선]]때 [[유목]]민족과의 충돌이 있었는지는 사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과 [[흉노]]는 [[무제(전한)|한무제]]의 침략 이전에는 동맹관계였던 것 같은데 그 이전 고조선이 동호나 흉노 등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현재로썬 알 길이 없다.] 최근에는 대중매체에도 꽤 등장해서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 <[[광개토태왕(드라마)|광개토태왕]]>등의 사극에서 [[전연]]과 [[후연]]이 각각 조연으로 등장했다. 또한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소설)|고구려]]》에서 모용외가 주인공 [[미천왕]]의 라이벌로 등장하여 인지도가 꽤 상승했다. 그러나, 《가령》이라는 유학서를 저작했다는 모용외의 [[지식인]] 포스를 싸그리 날리고 완벽한 [[야만족]]의 우두머리로 연출하고 있다.[* 우문선비를 몰살시킨다든가 심심해서 낙랑군을 털어버리고 못생긴 여자를 구해오지 못한 사람들을 던져버리며, 툭하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등 개념이란 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미천왕]]과의 삼각관계에서 [[주인공 보정]]에 걸려 시궁창... 대신 아들 [[모용황]]이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 고사유에게 철저히 복수해버리지만, 결국 손자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서는..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269년 출생]][[분류:333년 사망]][[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의 추존 황제]][[분류:모용선비]][[분류:진저우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