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바자르오르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원나라의 인물]][[분류:보르지긴 가문]][[분류:1382년 사망]] [include(틀:명사)] [목차] == 개요 == 孛兒只斤 把匝剌瓦爾密 (? ~ 1382년 1월 6일) 보르지긴 바자르오르미는 [[원나라]]의 황족으로, [[쿠빌라이 칸]]의 다섯째 아들인 운남왕(雲南王) 쿠게치[* 한자로는 홀가적(忽哥赤)]의 후예이다. == 생애 == 바자르오르미는 [[양왕]](梁王)에 봉(封)해졌고, 그로 인해 [[윈난성|운남]] 지역을 봉토(封土)로 받게 되어 그의 선조들처럼 운남에 부임하였다. [[혜종(원)|혜종]]이 다스릴 때 나라가 혼란에 빠졌지만 운남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난리를 피할 수 있었는데, 왕은 위엄과 은혜를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었기에 운남 지역은 안정되고 평화로울 수 있었다. 1363년에 [[명옥진]]이 외람되게도 [[쓰촨성|촉(蜀)]]에서 황제를 사칭한 것도 모자라서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운남을 공격해오니 처음에는 왕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서 금마산(金馬山)에 군영(軍營)을 두었다. 그 다음해가 되자 왕이 대리(大理)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격하여 명옥진이 보내왔던 군대를 격파하니 그들이 마침내 달아났다. 오래지않아 혜종이 북쪽으로 달아났고, [[베이징시|대도(大都)]]가 함락되어 나라가 망했다. 중국 내륙에서 원나라의 영토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왕은 오히려 운남을 굳게 지켰으며, 해마다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도망친 혜종에게 사신을 보내어 신하된 자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았다. 머지않아 [[명나라|명(明)]]의 군대가 촉을 평정하여 중국 내륙이 평정되었다. 명의 태조(太祖) [[주원장]]은 촉을 얻은 뒤 운남까지 얻고자 하였지만 운남 지역이 험하고 외진 것을 알았기에 처음에는 무력으로 점령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촉이 망한 다음해(1372년) 정월에 막북(漠北)으로 향하던 왕의 사신이 [[베이징시|북평(北平)]][*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망시킨 뒤 그 수도였던 대도의 이름을 북평으로 바꾸었다.]을 지키던 명의 수장(守將)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주원장은 한림원대제(翰林院待制) 왕위(王褘)를 운남에 사신(使臣)으로 보내서 왕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왕위가 운남에 도착하자 왕은 우선 예의를 갖추어 그를 대접해주었다. 그 뒤에 [[소종(원)|북원(北元)의 사군(嗣君)]]이 보낸 사신 탈탈(脫脫)과 만났는데, 탈탈은 왕위가 후하게 대접받는 것을 보고 왕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엄하게 말을 하니 왕이 결국 왕위를 죽였다. 3년 뒤, 주원장이 호광참정(湖廣參政) 오운(吳雲)에게 북원으로 가려다 붙잡힌 왕의 사신 20여명을 모두 데리고 운남으로 가서 왕을 다시 설득하도록 했다. 오운의 일행이 사당구(沙糖口)에 이르자, 사신들의 우두머리 격 인물이던 지원(知院) 철(鐵)씨가 난리를 일으켜 오운을 붙잡았다. 철씨는 북원에 직접 갔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운남으로 돌아간다면 왕의 처벌을 받게 될 것 이었고, 이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철씨는 자신의 일행을 북원에 다녀온 것처럼 꾸며서 양왕을 속이고자 하였는데, 그에 따라 오운에게 그가 가져온 주원장의 글을 버리고 자신의 지시에 따라 새 글을 쓰도록 협박하였다. 하지만 오운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철씨가 마침내 오운을 죽여버렸다. 양왕은 오운의 죽음을 듣고서 그의 유골을 수습하여 운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촉 땅의 어느 절(寺)에 보내어 그곳에서 매장하게 하였다. 보냈던 사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돌아오지 않자 주원장은 왕에게 항복할 뜻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평화적인 방법을 그만두고 정벌군을 운남에 파견하였다. 1381년 12월에 명군(明軍)에 의해 보정(普定)이 함락되자, 양왕은 사도(司徒) 달리마(達里麻)에게 대군[* 역사서의 기록들에 따르면 10만 대군으로 나온다. 최소한의 수비군을 제외한 모든 군대를 내준 셈이다.]을 내주어 곡정(曲靖)[* 현재의 [[윈난성]] 취징시]에 주둔하게 했다. 달리마는 백석강(白石江)에서 명군을 맞이하여 싸웠지만 패배하여 붙잡혔다. 이전에 양왕은 그의 딸을 대리의 우두머리 단(段)씨[* 당시에 [[대리국]]이 멸망한지 오래되어 단씨 일족이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에게 시집보내어 그의 세력을 얻었었는데, 특히 예전부터 단씨가 거느리는 대리의 병력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왕이 단씨를 의심하여 죽였으므로[* 정황상 단씨가 주원장과 내통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리의 지원은 그때부터 끊기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달리마와 그의 정예병 10여만을 모조리 잃게 되자 양왕은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보녕주(普寧州)로 달아났다. 왕은 그곳에서 여태껏 입어왔던 곤룡포를 불태웠으며, 그를 따라 같이 도망쳐온 처자식들을 쫓아버리고 자신은 전지(滇池)[* 윈난성 최대의 담수호(淡水湖)인 뎬츠(Dīan Chí)호이다.] 속으로 뛰어들어서 자살하니 이날이 1381년 12월 22일[* 양력으로는 1382년 1월 6일]이었다. 왕을 끝까지 모셨던 좌승(左丞) 달적(達的)과 우승(右丞) 여아(驢兒)는 밤중에 인근의 초가집으로 들어가서 같이 목매달아 죽었다. 운남이 온전히 평정되자, 주원장은 왕의 유족들을 [[제주도|탐라(耽羅)]]로 보내 그곳에서 살게 했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