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배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문희강후(文喜康侯)[br]{{{+1 裴駿 | 배준}}}''' || || '''시호''' ||강(康) || || '''작위''' ||문희현후(聞喜縣侯) || || '''성''' ||배(裴) || || '''이름''' ||준(駿) || || '''자''' ||신구(神具) || || '''생몰''' ||? ~ 468년 || || '''부친''' ||배쌍석(裴雙碩) || || '''출신'''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신구(神駒), 아명은 피(皮).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배씨 출신이다. == 생애 == 배준은 어린 나이에 총명해서 친척들이 기이하게 여겨서 준마라는 뜻의 신구(神駒)라고 불렀으며, 배준은 자를 신구로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경전과 사서를 섭렵했고 글을 잘 지었으며, 품행이 단정했고 예의와 법도가 있어서 고향 사람들이 배준을 매우 공경했다. 445년, 개오(蓋吳)가 관중(關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분음현(汾陰縣) 출신의 [[설안도]]와 설영종(薛永宗)이 개오의 반란에 호응하고 여러 현을 함락시키다가 문희현을 침공하였다. 문희현에는 이를 막아낼 병사들이 없어서 인심이 동요했고 현령 또한 이를 우려해서 아무런 계책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있었던 배준은 이 소식을 듣고 고향의 호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법에 의하면 임금이 위험해지면 신하가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하오. 우리의 현이 지금 역적의 핍박을 받고 있으니 지금이 우리가 절개를 다하여 죽을 때요. 여러분이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배준의 말을 들은 호족들은 서로 분발하여 배준과 함께 갈 것을 청했고, 배준은 이에 100명의 인원을 선발했다. 반군은 구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어 물러났으며, 자사는 이를 칭찬하여 조정에 상주문을 올렸다. 이후 [[태무제]]가 직접 개오를 토벌할 때 배준을 소견했는데, 배준의 의견이 태무제의 뜻과 들어맞아서 태무제는 이에 기뻐하고 [[최호(북위)|최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준은 당대의 재능을 지녔고 그의 충의도 칭찬할 만하다. 배준은 이후 중서박사(中書博士)가 되었다. 최호 또한 배준을 매우 중시해서 배준을 삼하(三河)의 영축(領袖)으로 평가하였다. 이후 배준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전임되었다. [[송(남조)|유송]]의 [[효무제(유송)|효무제]]가 명승호(明僧暠)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배준은 재능과 학식을 인정받아 임시로 급사중(給事中),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어 명승호를 맞이하였다. 이후 468년에 죽어서 평남장군(平南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 문희현후(聞喜縣侯)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68년 사망]][[분류:하동 배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