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샤를 10세 (r4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프랑스 국왕(부르봉 왕조))] ||<-2> '''{{{#white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7대 국왕[br]{{{+1 샤를 10세}}}[br]Charles X}}}'''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rlos_X_de_Francia_(François_Gérard).jpg|width=100%]]}}} || || '''이름''' ||샤를필리프 드 프랑스[br](Charles-Philippe de France) || ||<|2> '''출생''' ||[[1757년]] [[10월 9일]] ||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2> '''사망''' ||[[1836년]] [[11월 6일]] (향년 79세) || ||[include(틀:국기, 국명=오스트리아 제국)] [[노바고리차|괴르츠]] || ||<|2> '''재위''' ||<(><#E7E7E7,#424242>[[프랑스 왕국]]의 왕 || ||[[1824년]] [[9월 16일]] ~ [[1830년]] [[8월 2일]] || || '''배우자'''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1773년 결혼),, || || '''자녀''' ||[[루이 19세|루이 앙투안]], 소피, [[샤를 페르디낭]], 마리 테레즈 || || '''아버지''' ||[[루이 페르디낭|프랑스의 도팽 루이]]|| || '''어머니''' ||[[작센 선제후국|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 || '''형제''' ||마리 제피린, [[루이 16세]], [[루이 18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엘리자베트]]|| || '''종교''' ||[[가톨릭]]|| || '''서명''' ||[[파일:샤를 10세 서명.svg|width=150px&bgcolor=#fff]] || [목차] [clearfix] == 개요 == >'''"[[윌리엄 4세|영국의 왕]]과 [[입헌군주제|같은 조건]]으로 왕을 하느니 차라리 숲에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낫다."'''[* 그의 절대왕정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그는 입헌군주정 전환을 통보받자 주저않고 퇴위해버렸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 '''[[https://fr.wikipedia.org/wiki/Louis_de_France_(1751-1761)|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와 [[루이 16세]](1754 ~ 1793)와 [[루이 18세]](1755 ~ 1824)의 동생이다. 즉위하기 이전에는 아르투아 백작(comtes d'Artois)[* 결혼 이전], 앙굴렘 공작(Duc d'Angoulême), 베리 공작(Duc de Berry)[* 2개의 공작위는 결혼 이후. 전자는 1773년, 후자는 1776년]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오베르뉴 공작(Duc d'Auvergne)도 받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앙굴렘 공작이었지만, 최초로 받았던 작위인 아르투아 백작으로 주로 불렸다.] 정통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그의 자손 2명이 명목상의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골수 왕당파 외에는 그들을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 생애 == === 왕위에 오르기 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unt_of_Artois_in_1773.jpg|width=400]] 혁명 이전의 샤를 10세(당시 아르투아 백작) 형제 중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활달한 성격이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스캔들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혼 후 형들과 달리 즉시 결혼 의무도 해내서 아들을 얻었을 때는 마리가 길에서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시비를 듣고 울기도 했다. 이 스트레스로 왕비가 한창 놀 때 끼가 넘치는 아르투아 백작이 끼어 놀았던 것은 그들 사이의 소문을 부추겼지만 결혼 생활에 불성실한 아르투아는 여러 애인이 있었고 왕비와의 소문은 사실무근.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 [[루이 16세]]가 혁명파에 굴복한 것에 실망하여 가장 먼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우리 혁명 났으니까 침공해 주세요'''라고 청하는 일명, 필니츠 선언을 하며 혁명 반대를 외쳤으나 딱히 자신이 나서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 무렵 레오폴트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사이에서 [[폴란드 분할]]에 대한 얘기만 오갔었는데, 이때 샤를 10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프랑스 침공이 일어난다.]] [[1795년]] 프랑스의 키브론 섬에 왕당파의 군대와 함께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취소하고 대신 1개의 칼을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나폴레옹을 암살하기 위해 왕당파를 지원하고 자객을 프랑스에 보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이 실패하면서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정복고|왕정복고기]]에는 프랑스로 귀환했고 자식이 없는 루이 18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복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공화주의자와 혁명주의자에게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1820년에는 그가 아끼는 차남 [[샤를 페르디낭|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암살]]당하기도 했다.[* 당시 공화파들에게 샤를 10세의 즉위는 재앙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차라리''' 루이 18세의 장수를 바랐다는 썰도 나돌 정도. 루이 18세는 생각보다 꽉 막힌 왕이 아니었다. 부르주아를 비롯한 혁명파들의 기준에서야 꽉 막힌 왕이었지 그래도 이전의 루이 14세나 15세, 16세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양보를 한 왕이었다. 특히 루이 18세는 이렇게 양보를 하지 않으면 왕권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 애를 썼다.] === 내치 ===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다만 국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많았는데 67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초기에는 [[루이 18세]]에 비해 뛰어난 언변과 좋은 풍채, 또 정치범들을 사면시켜 주는 등의 유화 정책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강경 왕정주의자(ultraroyaliste)이자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즉위한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왕당파가 무려 400석 이상, 자유주의자들은 겨우 17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 1825년 5월 절대왕정 시절 전통을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 대관식에서부터 [[기름 부음|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의식을 했다.]] 연주창이라고 하여 목 주변의 [[림프선]]이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이 있다. 이 연주창은 손길이 닿을 경우 부어오른 부위가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현상이 일어나며, 중세기에는 이를 성유로 축복받은 왕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의 즉위식에서는 연주창 환자들에게 왕이 직접 자신의 손을 환자의 목에 갖다 대는 식전이 있었다. 당장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거짓 왕이라는 증거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연주창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을 치르고, 강경 왕정주의자 조제프 드 빌렐(Joseph de Villèle) 백작을 수상으로 임명하는 등 강력한 복고 정책을 시행한다. 빌렐 내각은 1822년부터 신문 검열법(loi de tendance)을 통과시키고, 전제왕정에 적대적인 신문사들을 대거 매수하거나 없애려 한다. 또 [[가톨릭]]의 부흥을 앞세워 정교분리 원칙을 번복하고 프랑스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1825년부터는 수도회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를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의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 또한 손목을 절제한 후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 극단적인 형법을 복원한다. 극단적인 복고주의 정치로 1826년부터 의회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 빌렐은 복고주의자들에게마저 버림받았고, 1827년에 치른 총선에서 그를 싫어한 공화주의자들과 중도 왕당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결국 1828년 사임한다. 빌렐의 대안으로 샤를 10세는 중도 왕정주의자 장바티스트 실베르 게 드 마르티냐크(Jean-Baptiste Sylvère Gaye de Martignac) 자작을 출범시킨 정부를 앞세우나, 그는 강경 왕정주의자들과 입헌주의자들을 타협시키는 정책을 내놓는 데 실패한다. 1830년부터는 [[프랑스 혁명]] 중에 살해된 폴리냐크 부인의 아들인 쥘 드 폴리냐크(Jules de Polignac) 공작을 수상으로 삼은 내각을 출범시킨다. 극단적인 전제왕정 복고주의자였던 폴리냐크 공작은 보나파르트주의자들과 [[프랑스 혁명]]에 가담한 공화주의자에게 사적으로 보복을 가하는 [[백색테러]](terreur blanche)를 방치하고,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을 대거 회복시키기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지급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대토지를 상속받은 소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은 국채 매각 대금으로는 도저히 조상 전래의 토지를 매입할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국채 이자로 생활하는 연금 생활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샤를 10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소귀족들을 도시 [[부르주아]]로 재편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당파]]에서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 외치 === 1825년에는 [[아이티 혁명|독립혁명]]을 일으킨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함대를 파견해 '''독립 배상금'''으로 '''1억 5천만 [[금]] [[프랑스 프랑|프랑]]'''을 물 것을 강요했다.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한 아이티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배상금을 9천만 금 프랑으로 깎았다. 2010년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9천만 프랑은 '''400억 달러'''였다. 1년 예산의 80%를 '배상금' 갚는 데 쓴 결과 아이티의 경제는 초토화되었다. [[183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당시 오스만 제국령 알자자이르 총독 후세인 이븐 파샤가 자신을 능멸한 프랑스 외교관 피에르 드발(Pierre Deval)의 뺨을 부채로 때린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후세인 이븐 파샤에 사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당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자자이르를 점령했고 후세인 이븐 파샤는 항복했다. 이로써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토벌되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해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주요 도시인 '알자자이르'의 프랑스어명 '[[알제]]'를 따 '[[알제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통치했다. === [[7월 혁명]]과 폐위 === 1829년 새로 부임한 폴리냐크 내각은 지난 1827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패하고 좌파와 입헌군주파가 승리한 것에 부담을 느껴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다시 선거를 치르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좌파의 의석이 이전보다도 더 늘어나며 왕당파와 입헌파 의석을 줄여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1830년 3월, 샤를 10세는 이에 대응해 폴리냐크 내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처벌하겠다는 연설을 한다. 그러자 의원들과 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다다르고, 의원들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221명의 청원서"를 발표한다. 샤를 10세는 이에 "나의 결정은 완고하다"라고 거부하며 실책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이 반발해,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난다. 1814년의 헌장을 근거로 왕권을 공고히 하는 4가지 왕령[*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부르주와 등 입헌군주제에 호의적인 계급을 선거인단에서 제외하고, 의원을 새로 선출하는 왕령이다. 샤를 10세가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혐오하고 전제군주제'''만'''을 옹호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는 의원들과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샤를 10세는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부대를 보내 시민들에 대한 사격 등으로 강경 진압에 나서긴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정부군도 시민들에게 가담하여 샤를 10세를 배신하였다. 궁지에 몰린 샤를 10세는 의원들이 왕위를 유지하고 싶으면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전제군주에서 이름뿐인 군주가 된다는 통고를 받는다. 이에 샤를 10세는 실권없는 군주가 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하여 [[앙리 5세]]로 즉위시킨 다음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1세|루이 필리프]]를 섭정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그를 증오하는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샤를 10세의 퇴위를 결정하여 결국 폐위된다. 특히 샤를 10세가 임명한 오를레앙 공작은 섭정에 만족할 생각이 없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르봉 왕가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이 왕위에 올랐다. --10새가 된 10세-- === 망명지에서의 사망 === 폐위된 샤를 10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우선 영국으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영국 총리]] [[아서 웰즐리]]의 요구로 퐁티외 백작(Count of Ponthieu)이라는 가명으로 입국하였다. 그에 대한 영국의 여론은 상당히 냉담해서,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가 혐오하던 프랑스 공화국 체제를 상징하는 프랑스 삼색기를 흔드는 [[영국인]]도 있었다. 1833년에는 [[프란츠 2세|프란츠 1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주했으며 [[프라하]]에 있는 프라하 성(Pražský hrad)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식을 프라하 성에서 개최하는 이유로 그는 다시 거처를 테플리츠(Teplitz, 현 체코 테플리체·Teplice)로 옮겼다. 1835년에는 따뜻한 곳에 있고 싶다는 뜻에 따라 한참 남쪽인 괴르츠(Görz, 현 [[이탈리아]] [[고리치아]])에 있는 코로니니 크론베르크 궁전(Palazzo Coronini Cronberg)으로 거처를 옮겼고 [[1836년]]에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들의 왕실 묘당이었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사망한 곳인 괴르츠(현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에 있는 코스타네비차(Kostanjevica) 수도원에 묻혔다.[* 괴르츠는 샤를 10세가 사망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령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괴르츠 백국]]의 영토였으나, 이 지역은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 승전국인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는데 괴르츠 또한 이탈리아에게 넘어가면서 [[고리치아]](Gorizia)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슬로베니아인]] 또한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이스트리아 반도]]와 프리울리 지방 일부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연방]]([[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넘어갔고, 이때 고리치아 중 슬로베니아인이 다수인 고리치아 교외 일부가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가 [[노바고리차]](Nova Gorica)라는 이름으로 신설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 슬로베니아가 독립하면서 노바고리차는 슬로베니아 영토가 되었다. 샤를 10세가 마지막으로 거처하던 곳은 괴르츠 중심가에 있어 현재 이탈리아 영토이고, 샤를 10세가 묻힌 코스타네비차 수도원은 괴르츠 외곽에 있어 현재 슬로베니아 영토이다.] 샤를 10세는 프랑스 밖에 무덤이 있는 유일한 프랑스 군주다. [[슬로베니아]]는 그의 무덤이 자국 영토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2016년 프랑스의 어느 단체에서 그의 묘를 반환하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국경마을인 노바고리차에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었던 군주도 아니었던 관계로 더 이상의 요구는 없었기 때문에, 슬로베니아는 팔자에도 없던 외국 군주의 무덤이 생기게 되었다.[* 1991년 처음으로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조]],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등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탓에 자신들만의 군주가 있었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 왕릉인 관계로, 관광명소가 되어 그때까지는 아무도 찾지 않던 마을 성당에 매년 1만 5천 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찾게 되었다고 한다. == 가족 관계 == || {{{#!wiki style="margin:-5px -10px;"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8/Drouais_-_Marie_Therese_de_Savoie%2C_comtesse_d%27Artois_-_Versailles.jpg|width=100%]]}}}||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1756년]] [[1월 31일]] ~ [[1805년]] [[6월 2일]]) || 아내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3녀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다.[* 또한 샤를 10세의 여동생 [[마리 클로틸드]]는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와 결혼하고, 샤를 10세의 형 [[루이 18세]]도 마리아 테레사의 언니 [[마리아 주세피나]]와 결혼하면서 연이어 [[겹사돈]]을 맺었다.] [[1773년]]에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해서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지만 마리아 테레사는 평생동안 남편인 샤를 10세와 그의 애첩을 피해 별거한 채로 혼자 살았고 결국 샤를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지 못했고 묘지도 남편과 달리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묻혀 있다.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루이 19세|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br]{{{-2 (Louis Antoine, Duke of Angoulême)}}} || [[1775년]] [[8월 6일]] || [[1884년]] [[6월 3일]]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큰아버지 [[루이 16세]]의 장녀로 친사촌이다.] || || '''1녀''' || 소피[br]{{{-2 (Sophie)}}} || [[1776년]] [[8월 5일]] || [[1783년]] [[12월 5일]] || || || '''2남''' || [[샤를 페르디낭|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br]{{{-2 (Charles Ferdinand, Duke of Berry)}}} || [[1778년]] [[1월 24일]] || [[1820년]] [[2월 14일]]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br]슬하 1남 1녀[* 파르마 공작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앙리 5세|샹보르 백작 앙리]] ] || || '''2녀''' || 마리 테레즈[br]{{{-2 (Marie Thérèse)}}} || [[1783년]] [[1월 6일]] || [[1783년]] [[6월 22일]] || || === 후손 === 슬하에 순서대로 장남 [[루이 19세|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원래 샤를 10세는 손자 [[앙리 5세|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장남 루이 앙투안이 멀쩡히 살아있어서, 그를 건너뛰고 왕위를 계승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루이 앙투안이 '''20분 가량''' [[루이 19세]]로 프랑스 왕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봐야 루이나 앙리나 둘 다 왕으로 인정 못 받는 건 똑같다는 게 함정~~], 장녀 소피, 차남 [[샤를 페르디낭|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차녀 마리 테레즈를 낳았지만 소피는 7세에 사망하고 마리 테레즈는 생후 5개월만에 사망하면서 딸들은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아들들은 딸들보다 비교적 오래 살아서 장남인 [[루이 19세|루이 앙투안]]은 [[루이 16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로 자신의 친사촌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했으나 유산 후 자식이 없었다. 차남 [[샤를 페르디낭]]은 암살당했으나 외아들인 샹보르 백작 [[앙리 5세]][*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직 [[유복자|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그가 태어났을 때는 "기적의 아이"라고 부르며 왕당파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정작 앙리 5세의 모친은 루이 필리프의 재위 시절 정권 타도 음모에 연루되었다가 체포되었을 때, 내연남(그것도 한둘이 아닌)의 사생아를 가진 사실이 드러나 정통파의 명분에 타격을 가했고 시가에서도 쫓겨났다. 경솔하고 골이 비었을 뿐(...) 성격 자체는 선량하고 성실했다는 평.]를 낳았다. 그러나 샤를 10세의 손자인 [[앙리 5세]]도 자식을 낳지 못해서 [[부르봉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루이 13세]]의 후손으로 먼 친척인 방계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1세|루이 필리프 1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는 왕위에 접근할 목적으로 아들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시키려 하거나(이 청혼은 왕실에서 까였다), 루이 16세 부부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 인물로[* 정작 본인도 혁명 정부 치하에서 쿠데타에 연루되어 루이 16세 부부와 똑같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샤를 10세나 마리 테레즈 입장에서는 그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에게서도 뒤통수를 맞은 것. 참고로 여계로 갈 경우 부르봉파르마 계통[* [[카를 1세]]의 부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지타 황후]](고손녀)와,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Marie_Louise_of_Bourbon-Parma|마리아 루이사]](고손녀), [[미하이 1세]]의 부인 [[https://en.wikipedia.org/wiki/Queen_Anne_of_Romania?wprov=sfla1|안 드 부르봉파름]](5대손), 룩셈부르크의 [[장(룩셈부르크)|장 대공]](5대손)이 샤를 10세의 부르봉파르마계 후손들이다. 지타 황후와 안 왕비, 그 남편들 모두 본국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호부견자|견부호자]].] 순서로 이어진다. 이 가문의 당주들 중 하나이자 [[스페인]] 카를리스타의 대표인 카를로스 우고(5대손)는 1961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왕정 복고가 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후안 카를로스 1세|후안 카를로스]]와 카를로스 우고 중 하나를 차기 스페인 왕 후보로 지명하려고 했을 때 후안 카를로스가 지명된 것에 앙심을 품었다. 더불어 이 때 프랑코가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가톨릭과도 사이가 벌어지면서, 카를리스 우고는 극우반동주의(+나바라 분리주의)였던 카를리스타를 이끌고 [[스페인 공산당]]과 녹색당에 합류해서 [[좌파연합(스페인)|좌파연합]]을 결성했다. 자세한건 [[보르본 왕조]] 참조. 샤를 10세의 남자 직계는 단절되었지만 손녀이자 [[앙리 5세]]의 누나인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Louise_d%27Artois?wprov=sfla1|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가 [[보르본 왕조]]의 방계이자 파르마-피아첸차 공작인 [[카를로 3세(파르마)|카를로 3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다. 여기서 루이즈의 장남인 [[로베르토 1세]]가 전처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Maria_Pia_of_Bourbon-Two_Sicilies_%281849%E2%80%931882%29?wprov=sfla1|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 후처 [[https://en.wikipedia.org/wiki/Infanta_Maria_Antonia_of_Portugal?wprov=sfla1|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 사이에서 무려 '''24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유럽 왕실들과 통혼하면서 샤를 10세의 여계 자손들은 현재도 꽤 많이 남아있다. 로베르토 1세의 딸들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부르봉파르마 치타|지타]]이며, 아들 중 한 명이 [[룩셈부르크]]의 [[샤를로트(룩셈부르크)|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Felix_of_Bourbon-Parma?wprov=sfla1|펠릭스 공자]]이다. 또한 다른 아들 르네 공자의 딸, 즉 로베르토 1세의 손녀가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의 아내 안 드 부르봉파름, 전처 소생의 장녀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Marie_Louise_of_Bourbon-Parma|마리아 루이사 공녀]]는 [[불가리아 왕국]]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르디난트 1세는 샤를 10세가 퇴위당한 후 프랑스의 왕이 된 [[루이필리프]]의 외손자다. 어머니 [[클레망틴 도를레앙]]이 루이필리프의 4녀이기 때문.] == 기타 == 현재까지 [[콜드플레이]] 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에 하나이자 가장 성공한 싱글 중에 하나로도 기억이 되는 노래 [[Viva la Vida(콜드플레이)|Viva la Vida]]는 샤를 10세의 [[7월 혁명|비참한]] [[부르봉 왕조#s-1.2|최후]]를 담았다.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인 [[오귀스탱루이 코시]][* 현대 한국 고교수학 과정에서는 [[코시-슈바르츠 부등식]]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미분적분학]]의 기틀을 마련하여 현대 수학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이다.]는 샤를 10세가 폐위될 당시에 새 국왕 루이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절 공직 취임이 금지되는 바람에 한동안 [[이탈리아]]로 망명해야 했었다. [각주] [[분류:프랑스 국왕]][[분류:나바라 국왕]][[분류:안도라 공]] [[분류:부르봉 가문]] [[분류:1757년 출생]] [[분류:1836년 사망]] [[분류:퇴위한 군주]] [[분류:베르사유 출신 인물]][[분류:가터 훈장]][[분류:프랑스의 객사한 인물]][[분류:콜레라로 죽은 인물]][[분류:왕위 계승자]][[분류:프랑스 왕위 요구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