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스즈키 미키사부로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센구미)] ---- ||<-2> {{{#fff '''신센구미 9번대 조장[br]{{{+1 스즈키 미키사부로}}}[br]鈴木三樹三郎'''}}}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스즈키 미키사부로.jpg|width=100%]]}}} || ||<|2> {{{#FFFFFF '''출생'''}}} ||[[1837년]] [[7월 15일]]|| ||[[히타치|히타치국]] 니하리군 (現 [[이바라키현]] 카스미가우라시) || ||<|2> {{{#FFFFFF '''사망'''}}} ||[[1919년]] [[7월 11일]] (향년 83세) ||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정 (現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 || {{{#FFFFFF '''묘소'''}}} ||조묘지 {{{-2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 ||<|2> {{{#FFFFFF '''재임기간'''}}} ||<#f5f5f5,#2d2f34>[[신센구미]] 9번대 조장 || ||1865년 ~ 1867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FFFFFF '''부모'''}}} ||아버지 스즈키 센에몬(鈴木専右衛門) || || {{{#FFFFFF '''형제'''}}} ||형 [[이토 카시타로]](伊東甲子太郎)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센구미]]의 9번대 조장. == 생애 == 시즈키 번의 무사 스즈키 덴에몬 다다아키(鈴木專右衛門忠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 마을의 한학 학원에서 형인 '''[[이토 카시타로]]'''와 함께 공부하다가 학원을 이어받을 정도로 학문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에 나와 형의 도장에서 수업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데라우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쫓겨난 뒤 미키 고지로로 개명했으며, 신센구미 시절에는 미키 사부로로 바꾸었다. 이후 본래의 성을 되살려 스즈키 미키사부로로 다시 개명했는데, 이는 유학자 라이 미키사부로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겐지 원년(1864년), 카시타로가 신센구미에 가입했을 때 동행하여 [[이노우에 겐자부로]]의 3번대에 배속된 적이 있으며, 여름의 편성에서는 9번대 조장이 되었다. 이때 친형인 이토 카시타로는 신센구미의 참모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존왕파 노선을 고집하는 카시타로가 좌막(佐幕)[* 막부 지지.]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 신센구미를 이탈, 고메이 천황의 능지기인 고료에지(御陵衛士)로 활동할 때도 [[형제애|함께했다.]]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 일파가 카시타로와 고료에지의 잔당들을 유인하여 습격했을 때, 미키사부로는 탈출에 성공해서 사츠마 번의 저택으로 피신했다. 아부라노코지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이사미가 이끄는 신센구미에게 형을 잃고[* 1867년 11월 18일날에 암살당했다.] 쫒긴 악연은 미키사부로에게 원한이 되었다. [[토도 헤이스케]] 등과 함께 시체 수습을 하러 간 곳에서 신센구미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곳을 탈출하여, 다음 해에 이토의 시신을 개장했다. 이후 12월 18일 그는 교토에서 후시미로 귀환 중이던 이사미를 저격하여 부상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이어진 도바 · 후시미 전투에서 미키사부로는 사츠마 군의 일원으로 후시미 부교쇼(奉行所)[* 막부의 행정관이 파견되어 있던 후시미의 관청.]에 주둔하던 신센구미를 공격했고, 근왕파 공가(公家)[* 조정의 귀족.]의 지시에 따라 교토를 방어하는 병력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반(反)막부파 민병대인 세키보타이(赤報隊)[* 적보대라고 읽는다.] 결성에도 참가했는데, 조직원들의 과격성이 문제가 되어[* 그 밖에도 위관군 사건 때문에 세키보타이에서 추방됐다고 한다.] 신정부에 의해 교토로 소환되어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사면되어 [[무진전쟁]] 시기 동안 근왕파로 신정부군의 편에 섰다. 신정부군이 아이즈를 점령한 뒤 교토로 귀향할 때 원정군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유신 후, 스즈키 미키사부로는 경찰과 관련된 각종 공직에 올랐다. 메이지 12년(1879년), 야마가타 현 사카다 경찰서의 서장이 되었고, 메이지 14년(1881년)엔 천황의 행차 때 인근을 경호하는 지휘장을 맡기도 했다. 만년에는 경찰서장을 역임, 은퇴하여 이바라키 현 이시오카 시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 때 신센구미를 증오했었지만, 노년에는 신센구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시노하라 다이노신과 서찰을 주고받는 등, 과거의 동지들과 앙금을 청산하고 추억을 회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람의 사위인 오노 케이지로(1869-1952) 는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후에 한국의 수많은 영어 참고서들의 아버지가 된 오노 영문법을 1925년에 펴냈다. [[분류:에도 시대/인물]][[분류:신센구미]][[분류:1837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카스미가우라시 출신 인물]][[분류:보신 전쟁/군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