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2> '''친위대 집단지도자[br]{{{+2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br]August von Meyszner'''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마이츠너.jpg|width=100%]]}}}|||| || {{{#FFF 이름}}} ||'''August Edler von Meyszner'''[br] 아우구스트 에들러 폰 마이츠너 || || {{{#FFF 출생}}} ||[[1886년]] [[8월 3일]] [br]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라츠 || || {{{#FFF 사망}}} ||[[1947년]] [[1월 24일]] (향년 60세) [br]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 베오그라드 || || {{{#FFF 신장}}} ||'''193cm''' || || {{{#FFF 복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br] 오스트리아 헌병대 [br] [[슈투름압타일룽]] [br] [[질서경찰]] [br] [[슈츠슈타펠]] || || {{{#FFF 최종계급}}} ||<(>[[슈투름압타일룽]] [[중령]] (상급돌격대지도자) [br] [[질서경찰]] [[중장]] [br] [[슈츠슈타펠]] [[중장]] (집단지도자) || ||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 {{{#FFF 주요 서훈}}} ||<(> [[철십자 훈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마이츠너1.jpg|width=100%]] || [[파일:마이츠너3.jpg|width=100%]]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정치인,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이다. || [[파일:마이츠너4.jpg|width=100%]] || ||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폰 마이츠너이다.[* 왼쪽에서 두번째 [[슈츠슈타펠|SS]][[상급대령]]은 [[콘스탄틴 카머호퍼]]이다.] || == 초기 행적 == || [[파일:마이츠너5.jpg|width=100%]] ||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는 [[1886년]] [[8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귀족 루돌프 에들러 폰 마이츠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폰 마이츠너는 왕립 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으며, [[1914년]] 오스트리아 헌병대에서 복무하기 사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폰 마이츠너는 헌병대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패전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 == 정치 및 경찰 행적 == [[1925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폰 마이츠너는 우익 정치인,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당을 금지하면서 폰 마이츠너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헌병대에서도 강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폰 마이츠너는 [[SA|돌격대]]에 들어갔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만났다. 7월 폭동으로 체포된 폰 마이츠너는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로 도주했고, 동료였던 [[콘스탄틴 카머호퍼]][* 폰 마이츠너처럼 나중에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으로 승진한다.]도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했다. || [[파일:마이츠너6.jpg|width=100%]] || || [[슈츠슈타펠|SS]][[상급대령]] 폰 마이츠너 || || [[파일:질서경찰 마이츠너.jpg|width=100%]] || || [[질서경찰]] 제복을 입은 폰 마이츠너 || 독일에 도착한 폰 마이츠너는 [[슈츠슈타펠|일반친위대]]에 입대 신청을 하여 [[1935년]] [[2월 14일]] [[상급대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또한 [[5월]]에 독일 시민권을 얻었으며 [[질서경찰]]에도 합류했다. 그는 돌격대에서 명예 제대를 했고, 아직 경찰이 친위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10월]] 친위대에서 사임했다. 이후 [[1937년]] [[10월]] 친위대 재입대가 허용되었고 상급대령으로 복귀했다. [[1938년]] [[3월 18일]] 경찰 대령으로 승진했고, [[4월 12일]]부터 오스트리아 질서경찰의 감독관으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배정되었다. 그러나 폰 마이츠너는 칼텐브루너와 충돌했고 결국 [[쿠르트 달루게]]가 개입해야 했다. || [[파일:마이츠너7.jpg|width=100%]] || || 왼쪽부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쿠르트 달루게]],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요제프 피츠툼]]이다. || [[1939년]] [[4월 20일]] 경찰 소장으로 진급한 폰 마이츠너는 [[6월]] 카셀의 질서경찰 감독관으로 [[1940년]] [[9월 10일]]까지 복무했다. [[1940년]] [[4월 20일]]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1943년]]에 입당하여 나치당원이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전쟁이 발발한후 폰 마이츠너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1940년]] 초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에 의해 풀다-베라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임명됐다. [[9월 10일]] [[하인리히 힘러]]는 [[노르웨이]]에서 친위대 대장 [[빌헬름 레디스]]와 협력할 질서경찰 지휘관으로 폰 마이츠너를 지명했다. || [[파일:마이츠너2.jpg|width=100%]] || || [[슈츠슈타펠|SS]][[중장]] 폰 마이츠너 || [[1942년]] [[1월 1일]] 폰 마이츠너는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경찰 중장으로 승진했다. 폰 마이츠너는 [[1942년]] [[1월 24일]]부터 [[1944년]] [[4월 1일]] 세르비아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나는 살아있는 세르비아인보다 죽은 세르비아인이 더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 [[파일:마이츠너8.jpg|width=100%]] || || 폰 마이츠너와 [[아르투어 플렙스]] || 폰 마이츠너는 프린츠 오이겐의 사단장 [[아르투어 플렙스]]와 새로운 사단 형성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었으나 베를린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1944년]] [[4월]] 독일로 돌아와 합병, 점령 지역의 헌병 및 보안경찰 감독관 직을 맡았다. == 전후 행적 == 전후 폰 마이츠너는 [[빌헬름 푹스]] 등과 유고슬라비아에 넘겨졌고 사형을 선고받아 [[1947년]] [[1월 24일]] [[베오그라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분류:1886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그라츠 출신 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군인]][[분류:오스트리아의 정치인]][[분류:오스트리아의 귀족]][[분류:질서경찰/인물]][[분류:나치당원]][[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교수형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