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목차] == 개요 == ||||<|1> [[파일:angil.jpg|width=200]] || || 이름 ||<:> 안길(安吉) || || 출생일 ||<:> 1907년 2월 24일 || || 사망일 ||<:> 1947년 12월 13일 || [[일제강점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가. == 일생 == [[함경북도]] [[경원군]] 출신으로 어릴 적 훈춘으로 이주해 룽징 대성중학을 다니다 중퇴했다. [[193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항일 유격대에 참가해 [[정치]] 쪽에 종사했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해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4사단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다. 그해 11월 [[소련]]으로 이주해 이후에도 [[소련]]과 [[만주]]를 오가며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김일성]] 등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다. 다른 동북항일연군 출신들과는 다르게 군이 아닌 주로 정치 쪽에서 활동했다. 1946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원이 되었다. 이후 1947년에 사망했는데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40대 초반의 꽤 젊은 나이였으므로 아마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인물 중 한 명이었으므로[* [[대성산혁명열사릉]] 제일 윗단에 안치된 15명 중 한 명이며 빨치산 시절 [[김일성]], [[최현(북한)|최현]]과 셋이서 찍은 사진도 있다.] 계속 살아 있었다면 다른 빨치산파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당이나 군에서 고위직까지 올라갔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최용건]]이나 [[김책]] 급은 못 돼도 [[김일(1910)|김일]]과 비슷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6.25 전쟁 중에 사망한 [[강건(북한)|강건]]이나 [[김책]]처럼 전쟁 중에 사망한 것도 아니고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7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빨치산파 인물들 중에서는 존재감이 낮다. 1968년 9월 1일, 북한 창건 20주년을 기념하여 [[김책]], 최춘국, [[김경석]], 조정철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 여담 == 2011년 북한에서 나온 소설 총서 <불멸의 력사> 미래 편에서 아주 후하게 좋은 사람으로 나오며 안길이 죽을때까지 [[김일성]]이 항일운동 당시 알려준 노래를 부르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이 이런말도 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길동무! 안길이! 내가 오면 언제나 웃으며 달려나오군 하던 동무가 왜 이렇게 누워만 있소. 산에서 일제와 싸우면서도 죽지 않은 사람이 해방된 조국땅에서 이렇게 가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요. 안길이!...|| 두 아들 안영호와 안영환 형제를 두었는데, 안영환은 총정치국장을 지냈다. == 기타 == *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에 안길의 동상[* 북한에서는 "안길동지 동상"이라고 부른다.]이 세워져 있다. 북한에서 신적인 존재인 김씨 지도자들이나 가족이 아닌 다른 개인의 동상이 홀로 세워져 있는 것은 북한에서 지극히 드문 일이다. 안길 외에는 [[김책]]과 [[강건(북한)|강건]] 등이 있다. * 김일성은 안길이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안길을 1948년 2월 8일에 창설될 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고 한다. 안길이 사망하면서 안길 대신 [[강건(북한)|강건]]이 총참모장이 되었다. * [[함경북도]] [[경흥군]]에는 안길의 이름을 딴 안길리가 존재한다. [[분류:조선로동당 1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분류:1907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경원군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