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왕난득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王難得, ? ~ 763년, 자는 미상, 낭야 임기(지금의 산둥성 임기 시) 사람이다. 당대의 외척이자 명장으로, 당 순종 장헌황후의 조부이자 태자빈객인 왕사경의 아들. == 생애 == 생년 미상으로, 왕난득은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 왕사경(王思敬)을 따라 숱한 전투를 치렀고, 벼슬은 태자빈객(太子賓客)에 이르렀다. 왕난득은 용맹하여, 말을 잘 탔다고 한다. 천보 초년 토번 첸뽀[* 이 당시 첸뽀는 치데축찬.]의 아들 낭지도가 전장에서 날뛰자 왕난득이 화를 내며 창을 겨누고 말을 돌진하자 이에 낭지도는 미처 싸우기도 전에 주살당했다. 환군 후 당 현종은 왕난득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 그를 불러 앞에서 말을 타고 창을 겨누고 낭지도를 찌르는 상태를 연출하라고 명령했다.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금포와 금띠를 하사하였다. 748년 [[가서한]]을 따라 적석군에서 [[토번]]을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753년에는 하서구곡 지역[* 당 중종 시기인 710년 넘겨주었던 곳이다. 이를 넘겨받은 토번은 기병들을 쉽게 양성할 수 있어 당을 쉽게 침공할 수 있었다.]을 수복하고 특진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왕난득은 가서한의 뒤를 따라 동관에 출정했다. 그러나 현종과 [[양국충]]의 실책으로 인해 동관은 함락되고 가서한은 포로로 잡혔으며[* 가서한은 757년 안경서가 업으로 도망칠 때 포로로 잡힌 다른 무장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당 숙종이 영무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은 재물이 부족하여 왕난득은 견사 삼천 알, 금은기(金銀器) 등을 바쳤다. 지덕 초년에는 위위경(衛尉卿)과 흥평군사(興平軍使)가 되었고, 봉상도지병마사(鳳翔都知兵馬使)가 되었다. 장안을 탈환한 후 반군에 맞서 싸우던 도중 그의 부하 근원요가 전투가 격렬할 때 낙마하여 왕난득은 난처하게 말을 달려 구해 주었고, 적은 그의 눈썹을 쏘아 맞혔는데, 왕난득의 가죽을 늘어뜨려 눈을 막았다. 왕난득은 스스로 화살을 뽑아 말을 달려 다시 싸우고 피를 흘리며 싸웠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숙종은 그를 칭찬했다. [[곽자의]]를 따라 상주(相州)에서 [[안경서]]를 공격하고 낭사군공( 封邪郡公)에 봉해 영무군사(英武軍使)가 되었다. 보응 2년(763년)에 죽으니 노주(魯州)의 대도독(大都督)에 추증되었다. == 사후 == 원화 원년(806년), 당 헌종은 외조부 가문을 기리기 위해 왕사경을 사도로, 왕난득은 태위(太尉)로, 그의 아들 왕자안은 태사로 추증한다. [[분류:763년 사망]] [[분류:수당시대/인물]] [[분류:당나라의 장수]]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