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서양음악사)] ||||<#f5f5f5,#050505> '''{{{+1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br]Johann Jakob Froberger''' || |||| [[파일:external/www.gemeinde-lampertswalde.de/froberger.jpg]] || ||<|2> '''세례일''' ||1616년 5월 19일|| ||[[슈투트가르트]]|| ||<|2> '''사망''' ||1667년 5월 7일 (향년 50세) || ||[[프랑스 왕국]][*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ann-Jakob-Froberger|Johann Jakob Froberger: German composer]]",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 '''직업''' ||작곡가, 건반악기 연주자|| || '''사조''' ||[[바로크 음악]]|| [목차] [clearfix] == 소개 == [youtube(Gzl4oGzBo10)] 피에르 앙타이(Pierre Hantaï)의 연주. 독일의 작곡가, 건박악기 연주자. 바로크 중기의 건반악기의 대가이며 중요한 건반음악을 다수 남겼다. 음악사적으로 프로베르거는 유럽 각지의 춤곡을 바탕으로 한 바로크 모음곡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 세대 후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두 세대 후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독일 바로크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생애 == 프로베르거의 유년 시절을 알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후 20세였던 1673년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빈(오스트리아)|빈]]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기록되어있다. 그후 [[페르디난트 3세]]의 후원으로 [[로마]]로 4년여간 유학을 가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를 사사했다. 그후 1645년부터 이탈리아와 벨기에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며 1652년 [[파리(프랑스)|파리]]를 거치는데, 여기서 [[샹보니에르]]나 [[루이 쿠프랭]], 자크 갈로와 드니 고티에 등 당시 프랑스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분산양식(style brise)에 영향을 받았고 1653년 빈으로 돌아왔다. [[요한 마테존]]의 전기에 따르면 프로베르거는 1657년에 [[드레스덴]]에서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2세가 주관한 건반악기 경연에 참가하였다.[* 당시 선제후는 부상으로 [[사슬]]을 걸었다.] 상대는 드레스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마티아스 베크만이었으며 이후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 음악세계 == 프로베르거의 토카타, 리체르카레 같은 작품은 [[이탈리아]]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반면에 프로베르거의 건반 모음곡들은 당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프로베르거의 음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뿐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의 스타일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건반악기를 위한 춤 모음곡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프로베르거 본인은 알르망드 – 쿠랑트 – 사라반드 형식을 주로 작곡했고 후에 알르망드 뒤에 지그를 끼워넣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지그가 맨 뒤로 가게 된다. 작품번호는 FbWV로 표기한다. [[분류: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분류:1616년 출생]][[분류:1667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