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요한 파헬벨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서양음악사)] ||<-2> '''{{{#fff {{{+1 요한 파헬벨}}}[br]Johann Pachelbe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4.bp.blogspot.com/4735dfdc3cda0filenamejo.jpg|width=100%]]}}} || ||<-2> {{{-1 상상화 (1748)}}} || || '''본명''' ||요한 크리스토프 파헬벨[br]Johann Christoph Pachelbel|| ||<|2> '''출생''' ||1653년 8월 말||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자유제국도시|| ||<|2> '''세례일''' ||1653년 9월 1일 {{{-2 월요일}}}||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2> '''사망''' ||1706년 3월 (향년 52세)||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2> '''장례''' ||1706년 3월 9일 {{{-2 화요일}}}||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 '''직업'''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 '''사조''' ||[[바로크 음악]]|| || '''자녀''' ||6남 2녀|| || '''종교''' ||[[기독교]]([[개신교]], [[루터회]])|| || '''서명''' ||[[파일:요한 파헬벨 서명.svg|width=16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6pICBg0-ls, width=450, height=350)]}}} || || 토카타 C장조. 볼프강 륍잠 연주 || >'''완벽하고 흔치 않은 거장.''' >---- >― 다니엘 에벌린(Daniel Eberlin), 당시 아이제나흐 궁정의 카펠마이스터 [[바로크]] 시대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연도상으로 보면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중간 세대이다. == 생애 == 1653년, [[뉘른베르크]]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파헬벨은 [[와인]]상이었다. 어릴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파헬벨은, 성 제발두스 교회에서 성가대의 수석 성가대원인 음악가이자 음악교사인 하인리히 슈베머에게서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담당한 [[뉘른베르크]] 악파의 중요한 음악가인 게오르그 카스파 베커에게서도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은 오늘날에 와서는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다만 슈베머와 베커는 모두 [[뉘른베르크]] 악파의 창시자로 꼽히는 요한 에라스무스 킨더만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어느정도 있지 않을까 싶다. 파헬벨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기록은 1740년 [[함부르크]]에서 [[요한 마테존]]이 쓴 전기 모음집 《개선문의 기초(Grundlage einer Ehrenpforte)》로, 이 책에 의하면 젊은 파헬벨은 학문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쳤고 매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성 로렌츠 교회의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파헬벨은 1669년, 알트도르프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친의 재정난 때문에 1년만에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을 멈출수 없던 파헬벨은 [[레겐스부르크]]의 김나지움 포티쿰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워낙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라 교수들이 감동을 먹고 학교밖에서 음악을 배우는것도 허락해 줬을 정도였다고 하니 알만하다. 이 시기에 파헬벨에게 음악을 가르친 선생은 킨더만의 [[요한 카스파르 케를]]의 제자인 카스퍼 프렌트로 그에게서 [[이탈리아]] 오페라나 가톨릭 교회 음악을 접하게 된것으로 보인다. === 음악 활동 === 파헬벨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빈(오스트리아)|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 [[오르간]] 연주자로 공식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으며 후에 1677년 아이제나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써 1년 동안 봉직했다. 이후 [[에어푸르트]]로 옮겨가 그 자리에 12년 동안 일했다. 바로 이곳에서 파헬벨은 바흐 가문의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누나 요한나 유디타 바흐의 [[대부]]가 되었고, 형이었던 요한 크리스토프를 3년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이곳에서 결혼했지만 [[흑사병]]으로 부인을 잃었으며 재혼을 해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다. 이후 2년간 슈투트가르트에서, 3년간은 고타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고 말년에는 교향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교회에서 일하다가 1706년에 향년 52세로 선종했다. == 작품 세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Ob3Grs7CuQ, width=450, height=350)]}}} || || 오르간을 위한 샤콘느 f단조. || 음악적으로 보면 파헬벨은 매우 중요한 작곡가로 파헬벨의 코랄 전주곡이나 토카타, 환상곡 같은 오르간 곡들은 정교한 대위법이 적용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북부 독일 양식에 비견되는 남부 독일 양식의 대표적인 표본으로써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파헬벨의 작품은 히데오 츠카모토(Hideo Tsukamoto)의 분류를 따라 T. 번호로 표기한다. 분명 나름대로 다작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어째 대중적인 평가는 [[원 히트 원더]].[* 실제로 파헬벨의 작품번호는 T.500에 육박한다.] * '''[[카논(음악)|요한 파헬벨의 카논]]''' * [[샤콘느]], [[푸가]], 푸게타, 마니피카트 푸가 등 * 다양한 교회 음악들 (오르간용) * 마니피카트 푸가 No.7, D.F.필체커의 [[오르간]] 연주: [[https://youtu.be/O9lw7iZvnDM|#]] === 카논과 지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카논(음악))] 작곡가로서 여러 곡을 남겼지만, 사실 그가 지금도 대중들에게서도 두고두고 화자될 정도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곡은 역시 카논이다. 정확한 이름은 《세 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카논과 지그 라 장조》(독일어: Kanon und Gigue in D-Dur für drei Violinen und Basso Continuo)인데, 사실 상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곡이다. 더 정확히는 이 곡 중 지그를 제외한 초반부가 파헬벨의 카논으로 알려진 것이다. 파헬벨의 카논은 클래식의 주류에서 잊혀졌다가 만들어진지 225년뒤인 1919년에 파헬벨의 음악에 관심을 가진 학자 구스타프 베크만(Gustav Beckmann, 1894~1935)에 의해 악보가 출판되고, 21년뒤 1940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음반을 처음 냈으며, 다시 40년뒤에 아카데미 수상작인 1980년 영화 [[보통 사람들(영화)|보통 사람들]]에 삽입되면서 비로소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즉, 대략 300년 가까이 묻혀있다가 부활한 곡이다. [[분류:독일의 작곡가]][[분류: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분류:1653년 출생]][[분류:1706년 사망]][[분류:독일의 루터교회 신자]][[분류:뉘른베르크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