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우지(성씨)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 [[일본어]] ||[ruby(氏,ruby=うぢ)] || [목차] == 개요 == 고대 [[일본]]에서 널리 쓰였던 성([[姓]]). [[고대]]의 문헌에서는 주로 씨([[氏]])라고 쓴다. 묘지(苗字)와 구분하여 혼세(本姓, 본성)라고도 한다. == 상세 == 오늘날 [[일본의 성씨]]는 묘지(苗字)만 남아있으며, 우지는 묘지와 아주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천황]]이나 [[일본 황실|종실]] 및 그에 준하는 [[백제|다른 나라]] [[부여씨|종실]]이 내려준 성만 우지라고 부른다. 우지 가운데 타타라(多多良)는 천황이 아닌 [[쇼토쿠 태자]]가 하사한 우지라는 전승이 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위덕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뛰어난 활솜씨로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ruby(筑,ruby=つく)][ruby(紫,ruby=しノ)][ruby(國,ruby=くにノ)][ruby(造,ruby=みやつこ)])에게 쿠라지노키미([ruby(鞍,ruby=くら)][ruby(橋,ruby=じノ)][ruby(君,ruby=きみ)])를 내려주었다는데 백제왕에게 받은 우지도 인정해주는 걸로 추측된다. 우지는 카바네(姓)[* 덴노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유력 [[호족]]들에게 우지와 함께 하사하던 성으로, 집안의 유래와 씨족의 등급 등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카바네'라는 단어의 어원은 불분명하나, [[고대 일본어]] 카부네(株根, '혈통의 뿌리') 혹은 카바네([[骨]], '[[골품제|뼈]]')와 연관이 있으리라고 보는 학자들의 추측이 존재한다. [[고구려]] 출신 인물들의 가바네는 '우카라' 혹은 '야카라'로 따로 일컬었다.]와 더불어 고대/중세 일본의 씨성제를 이루는 핵심요소이다. [[신적강하]]도 바로 종친에게 우지를 하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시 말해 종친에게 너는 천황과 다른 겨레로 갈라졌으니 종친도 아니고 제위 계승은 더더욱 안 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종친과 노비를 제외한 양인(良人) 모두가[* 그러니까 귀족 뿐만 아니라 평민도 모두 포함한다.] [[율령제]] 성립 이후에는 우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헤이안 시대]] 초만 해도 우지는 일본에서 보편적인 성씨였다. 우지가 묘지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 성씨 뒤에 격조사 노([[の#s-6.1]])가 들어간다. 그래서 고대 [[인물]] 가운데 성씨가 [[후지와라]],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s-1.1]]인 사람들은 성씨 뒤에 '노'가 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유럽]] 귀족이 성 앞에 de나 [[von]]을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de나 [[von]]처럼 귀족의 출신을 나타내는 조사를 귀족성씨조사(Nobiliary Particle/Prefix)라고 부른다.[[https://en.wikipedia.org/wiki/Nobiliary_particle|영문 위키백과]] 및 [[https://en.dict.naver.com/#/entry/enko/197c8935ecba48da84916ad8cb5e481f|네이버 영어사전]] 참고] [[소가노 우마코|소가__'''노'''__ 우마코]]([ruby(蘇,ruby=そ)][ruby(我,ruby=がノ)] [ruby(馬,ruby=うま)][ruby(子,ruby=こ)]),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카키노모토__'''노'''__ 히토마로]]([ruby(柿本,ruby=かきのもとノ)][ruby(人,ruby=ひと)][ruby(麻,ruby=ま)][ruby(呂,ruby=ろ)]), [[야마베노 아카히토|야마베__'''노'''__ 아카히토]]([ruby(山,ruby=やま)][ruby(部,ruby=べノ)][ruby(赤,ruby=あか)][ruby(人,ruby=ひと)]), [[오토모노 야카모치|오토모__'''노'''__ 야카모치]]([ruby(大,ruby=おほ)][ruby(伴,ruby=ともノ)][ruby(家,ruby=やか)][ruby(持,ruby=もち)]), [[오노노 다카무라|오노__'''노'''__ 타카무라]]([ruby(小,ruby=を)][ruby(野,ruby=のノ)][ruby(篁,ruby=たかむら)]), [[오시코치노 미쓰네|오시코치__'''노'''__ 미츠네]]([ruby(凡,ruby=おほし)][ruby(河內,ruby=かふちノ)][ruby(躬,ruby=み)][ruby(恒,ruby=つね)]), [[타치바나노 모로에|타치바나__'''노'''__ 모로에]]([ruby(橘,ruby=たちばなノ)] [ruby(諸,ruby=もろ)][ruby(兄,ruby=え)]), [[기노 쓰라유키|기__'''노'''__ 츠라유키]]([ruby(紀,ruby=きノ)][ruby(貫,ruby=つら)][ruby(之,ruby=ゆき)]), [[후지와라노 미치나가|후지와라__'''노'''__ 미치나가]]([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ノ)] [ruby(道,ruby=みち)][ruby(長,ruby=なが)]), [[세이 쇼나곤|키요하라__'''노'''__ 나기코]]([ruby(淸,ruby=きよ)][ruby(原,ruby=はらノ)][ruby(諾,ruby=なぎ)][ruby(子,ruby=こ)]), [[다이라노 기요모리|타이라__'''노'''__ 키요모리]]([ruby(平,ruby=たひらノ)] [ruby(淸,ruby=きよ)][ruby(盛,ruby=もり)]),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미나모토__'''노'''__ 요리토모]]([ruby(源,ruby=みなもとノ)] [ruby(賴,ruby=より)][ruby(朝,ruby=とも)])의 성 뒤에 노(の)가 붙는 것도 이 이유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の가 한자의 발음이 아니고 우지 뒤에 붙는 격조사임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 아예 띄어 쓴다.] [[헤이안 시대]] 이후의 인물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우지는 [[미나모토]]] [[오다 노부나가]],[* 우지는 [[타이라]]. 다만 자칭이다.] [[고노에 사키히사]],[* 우지는 후지와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지는 미나모토. 다만 실제로 미나모토의 후손은 아니고 자칭이다.]의 성(姓) 뒤에 노([[の#s-6.1]])가 붙지 않는 것도 그것이 우지가 아닌 묘지이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가 묘지라 부르는 [[일본의 성씨]]와 달리 [[한자문화권]]의 성씨처럼 [[모계 성 따르기]]가 원칙상 허용되지 않는다. 헤이안시대에 칙찬(勅撰)한 씨족지(氏族志)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따르면 모계 성 따르기를 [[사칭]]이라고 적시하였다.[* "어머니의 씨성에 붙어서 츠키모토노키미를 [[사칭]]했다".(附母氏姓'''[[冒]]'''槻本公.) [[https://blog.naver.com/sohoja/50094090488|링크에서 084번 참고]] 무릅쓸 모([[冒]])에는 사칭한다는 뜻도 있으며 특히 모성(冒姓)이라고 하면 성을 사칭한다는 뜻이 되니 묘지와 달리 우지는 [[모계 성 따르기]]가 안 되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찬성씨록에 적힌 대로 모계 성 따르기로 성을 사칭한 츠키모토노키미 이와레([ruby(槻,ruby=つき)][ruby(本,ruby=もとノ)][ruby(公,ruby=きみ)][ruby(石村,ruby=いはれ)])의 경우 손자인 나데마로([ruby(奈弖麻呂,ruby=なでまろ)])·토요나리([ruby(豐成,ruby=とよなり)])·토요히토([ruby(豐人,ruby=とよひと)])가 연력 22년([[803년]])에 [[간무 덴노]]에게 사카타노스쿠네([ruby(坂田,ruby=さかたノ)][ruby(宿禰,ruby=すくね)])라는 우지와 카바네를 받잡고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홍인 4년([[813년]])에 [[사가 덴노]]가 카바네를 아소미([ruby(朝臣,ruby=あそみ)])로 올려줬다. 그리고 또 나데마로의 아들들은 홍인 14년([[823년]])에 성을 바꿀 것을 윤허받아 미나부치노아소미([ruby(南,ruby=みな)][ruby(淵,ruby=ふちノ)][ruby(朝臣,ruby=あそみ)])를 받잡았다.] 또 [[일본후기]] 연력(延曆) 24년 [[11월 19일]] [[갑신]]([[서기]] [[805년]] [[12월 13일]])자 기사에서 키요무라노스쿠네 신케이([ruby(淸,ruby=きよ)][ruby(村,ruby=むらノ)][ruby(宿,ruby=すく)][ruby(禰,ruby=ね)][ruby(晉卿,ruby=シンケイ)])의[* 본명은 원진경(袁晉卿)으로 [[718년]] 또는 [[719년]] 생으로 추정되며 여남원씨(汝南袁氏)라는 얘기가 있다.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이민]]을 가서 음박사(音博士)라 하여 한자음을 가르치는 일을 맡다가 [[당악]]을 연주한 공으로 승진하고 [[사또]]며 오오츠카사노카미([ruby(大學頭,ruby=おほつかさノかみ)])와 호오시마로오도노카미([ruby(玄蕃頭,ruby=ハウシまらひとノかみ)])를 지내고 [[간무 덴노]]에게 키요무라노스쿠네([ruby(淸,ruby=きよ)][ruby(村,ruby=むらノ)][ruby(宿,ruby=すく)][ruby(禰,ruby=ね)], [[淸]]을 [[淨]]으로도 쓴다.)를 받잡았다.] 외손자들이 [[고아]]가 되어 외조부 밑에서 자라며 양자까지 되어서 외가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간무 덴노]]에게 이것을 밝히고 하루시나노스쿠네([ruby(春,ruby=はる)][ruby(科,ruby=しなノ)][ruby(宿,ruby=すく)][ruby(禰,ruby=ね)])를 받잡았는데 이 기사는 우지를 모계로 쓰는 것은 우지를 내려준 [[일본 황실]]에 [[불경죄|무람없는]] 짓임을 시사한다.[* 아직도 모계를 [[역성혁명]]이라며 거부하는 [[일본 황실]]이 내려준 성이 모계로 전해지면 일본 황실의 체통이 뭐가 될까?] * 묘지와 달리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 우지를 바꾸려면 천황이나 종실이 새로운 우지를 하사하거나 자신이 원래 그 우지가 맞다는 근거를 대야 했다. * 종실에서 우지를 하사할 때는 대체로 카바네도 같이 하사해서 우지와 카바네는 붙여서 쓴다. 이때 격조사 노(の)는 우지와 카바네 사이에 붙는다. 가령, [[후지와라]],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s-1.1]]는 카바네가 아소미(朝臣)라서[* '아손(あそん)'이라고도 한다.] 우지와 카바네를 같이 쓰면 후지와라노아소미(藤原朝臣), 미나모토노아소미(源朝臣), 타이라노아소미(平朝臣), 타치바나노아소미(橘朝臣)가 되며 여기에 이름을 그냥 붙여 쓴다. 콘([ruby(金,ruby=コン)])이나 아구리([ruby(余,ruby=あぐり)])나 도리([ruby(刀利,ruby=トリ)])나 사자나미([ruby(樂浪,ruby=さざなみ)])처럼 카바네가 없는 우지도 있다. == 우지의 [[등급]]([[다이카 개신]] 이전) == 당연한 말이지만 우지라고 다 똑같은 우지가 아니었으며, 그 씨족의 위세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다. 이 문단에서는 [[지방]] 연합체 [[국가]]로서의 [[성격]]이 남아있던 [[다이카 개신]] 이전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 오미([[臣]]): 대표적으로 [[소가]]씨족이 오미에 속하며, 카츠라기씨([ruby(葛,ruby=かつら)][ruby(城,ruby=き)][ruby(氏,ruby=うぢ)])[*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이며, 전통적으로 카츠라기의 지배 씨족이다. 특이한 점은 카츠라기가 기기신화의 타카마가하라의 배경으로 지목된기도 한다는 점인데, 주로 카츠라기씨가 국혼(國婚)이 많았다는 점을 증거로 든다.], 헤구리씨([ruby(平群,ruby=へぐり)][ruby(氏,ruby=うぢ)]), 코세씨([ruby(巨,ruby=こ)][ruby(勢,ruby=せ)][ruby(氏,ruby=うぢ)]), 카스가씨([ruby(春日,ruby=かすが)][ruby(氏,ruby=うぢ)]) 등이 속했다. 야마토 지방의 지명을 씨명으로 삼은 것으로 대부분 그 씨족이 전통적으로 지배하는 [[지명]]이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야마토 호족으로 당대 일본의 귀족들 중 최고의 위세를 자랑했다. 쉽게 생각해서 [[전성기]] 때의 [[겐페이토키츠]] 가문들을 생각하면 편하다. *무라지([[連]]): 오오토모씨([ruby(大,ruby=おほ)][ruby(伴,ruby=とも)][ruby(氏,ruby=うぢ)]), 모노노베씨([ruby(物部,ruby=もののべ)][ruby(氏,ruby=うぢ)]), 나카토미씨([ruby(中,ruby=なか)][ruby(臣,ruby=とみ)][ruby(氏,ruby=うぢ)]), 이미베씨([ruby(忌,ruby=いみ)][ruby(部,ruby=べ)][ruby(氏,ruby=うぢ)]), 하지씨([ruby(土師,ruby=はにし)][ruby(氏,ruby=うぢ)]) 등이 이에 속한다. 오미 씨족들이 대왕가와 연합한 야마토 지역 호족들이었다면, 무라지 씨족은 대부분 야마토 내에서도 대왕가의 가신으로서 [[정권]]에서의 관위를 맡은 호족들이었다. 이론상으로 오미보다 낮지만 모노노베씨의 경우 [[불교]]를 두고 소가씨와 싸우기도 하는 등 반드시 아래라고 보긴 어렵다. 오토모 씨의 경우에도 [[6세기]] 신라의 전성기 당시 나라가 혼란해졌을 때 모노노베씨와 함께 무력을 배경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등, 힘을 키우다가 [[가야]]가 [[신라]]에 항복하면서 세력이 급속도로 후퇴, 이후 [[한반도]] 도래인을 지배하는 소가 씨족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토모노 미야츠코(伴造): 하는 일은 무라지와 비슷했지만 주로 특정한 직역(職役)을 맡은 [[조직]]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씨족이다. 유게씨([ruby(弓,ruby=ゆ)][ruby(削,ruby=げ)][ruby(氏,ruby=うぢ)]), 야츠메씨([ruby(矢集,ruby=やつめ)][ruby(氏,ruby=うぢ)]), 하토리베씨([ruby(服部,ruby=はたおりべ)][ruby(氏,ruby=うぢ)]), 이누카이씨([ruby(犬,ruby=いぬ)][ruby(養,ruby=かひ)][ruby(氏,ruby=うぢ)]), 츠키시네씨([ruby(舂米,ruby=つきしね)][ruby(氏,ruby=うぢ)]), 시토리씨([ruby(倭文,ruby=しとり)][ruby(氏,ruby=うぢ)]) 등의 우지나 하타씨([ruby(秦,ruby=はた)][ruby(氏,ruby=うぢ)]), 야마토노아야씨([ruby(東漢,ruby=やまとのあや)][ruby(氏,ruby=うぢ)]), 카와치노아야씨([ruby(西漢,ruby=かはちのあや)][ruby(氏,ruby=うぢ)]), 카와치노후미씨([ruby(西文,ruby=かはちのふみ)][ruby(氏,ruby=うぢ)]) 등 주로 [[도래인]]들에게 주어졌다. 무라치, 미야츠코([[造]]), 아타이([[直]]), 키미([[公]]) 등의 성을 칭했다. * 모모아마리야소노토모(百八十部): 180부란 이름답게 지방 180 부에 있는 토모노미야츠코(伴造) * 쿠니노 미야츠코(國造): 지방 호족의 하나로, 오치씨([ruby(越智,ruby=をち)][ruby(氏,ruby=うぢ)])가 유명하다. 대부분 키미([[君]]), 아타이(直)를 성을 칭했지만 그중에서 오미(臣)를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 아가타노누시(縣主): 쿠니노 미야츠코나 토모노 미야츠코보다도 오래된, 지방 호족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작은 [[단위]]를 지배하는 호족들. [[고훈 시대]] 초기인 3~[[4세기]]에 대부분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야마토 왕권의 행정단위이자 자연적으로 발생한 부락 단위인 현(아가타)를 지배했다. 일본서기에 진무동정 당시 동생 시키를 시키 아가타누시에 임명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참고로 이런 아가타누시는 동일본보다 서일본에 더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동쪽에서 [[에미시]]를 상대하던 동일본보다 [[야마토 왕조]]의 국가 재편이 잘 먹힌 서일본에 더 많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은 율령제 반포 이후에도 존속했으며, 심지어는 현대에도 아가타노누시의 직함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 == [[고대]] 이후의 쓰임 == 이렇게 고대 [[사회]]에서 널리 쓰이던 우지는 [[헤이안 시대]]를 지나면서 잘 쓰지 않게 되었다가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공가]](公家)만 해도 [[후지와라노 다다미치]]가 죽고 아들들이 [[고셋케|섭관가]]를 이루면서 모두 후지와라란 우지를 안 쓰게 되었으니 나머지 집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무가]](武家)는 그래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다른 무가와 달리 우지를 유지했으나 이마저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죽고 대가 끊어지면서 무가조차 우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아주 버린 건 아니어서, 섭관가가 우지를 안 쓰게 된 뒤에도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와 [[후지와라노 요리츠구]]는 여전히 우지로 불리며, 외교문서나 조칙에서는 묘지가 아니라 우지를 썼다. 외교문서의 예를 들자면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자신을 '미나모토노 요시미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義,ruby=よし)][ruby(滿,ruby=みつ)])'라고 썼다든가[* [[아시카가]]는 [[미나모토]]에서 비롯한 가문이다.] [[오닌의 난]]의 핵심 인물들인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조선왕조실록]]에 각각 미나모토노 모치토요와 미나모토노 카츠모토로 기록된다든가 [[유즈야 야스히로]]가 조선의 문헌에서 '타치바나노 야스히로([ruby(橘,ruby=たちばなノ)][ruby(康,ruby=やす)][ruby(廣,ruby=ひろ)])'라고 적혔다든가 징비록에서 [[소 요시토시]]가 '타이라노 요시토시([ruby(平,ruby=たひらノ)][ruby(義,ruby=よし)][ruby(智,ruby=とし)])'[* 왜냐하면 [[소씨#s-2|소씨]]가 타이라노아소미([ruby(平,ruby=たひらノ)][ruby(朝臣,ruby=あそみ)])를 [[사칭|모성]](冒姓)해서 그런 것으로 실제로 소씨는 코레무네노아소미([ruby(惟,ruby=これ)][ruby(宗,ruby=むぬノ)][ruby(朝臣,ruby=あそみ)])에서 비롯한 집안으로 알려졌다.]로 기록된 게 그런 까닭이다. 조칙을 예로 들자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조서]]나 [[칙령]]을 비롯한 [[조정#s-4]]의 공문서에서는 이름을 쓸 적에는 우지와 카바네를 꼭 써야 했다. 다시 말해 천황에게 [[벼슬]]을 받으려면 벼슬에 임명한다는 선지(宣旨)에 대상자의 우지가 꼭 들어가야 했다.[* 상술했듯이 귀족과 평민에게 모두 내려줬으니 우지는 [[주민등록증]]처럼 공민이란 징표고 공민만이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건 오늘날에도 상식이다.] 그래서 우지가 없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는 처음에 [[타이라]]를 일컫다가 아무래도 구라인 게 뻔해서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서 [[후지와라]]를 일컬었으나 이것도 영 모양새가 안 살아서 나중에 [[고요제이 덴노]]에게 아예 도요토미노아소미([ruby(豐,ruby=とよ)][ruby(臣,ruby=とみ)][ruby(朝臣,ruby=ノあそみ)])라는 우지와 카바네를 받잡고 [[관백]]으로 제수되었다. 그렇기에 사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불러야 하지만, 아무래도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지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준다.[* 도요토미는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본인의 출신을 [[아시가루]]라고 말하고 다녔다. 아시가루도 [[무사]]에 속하기는 했지만 말이 좋아 무사지 일반 [[병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체면 상하니까 최대한 높은 신분이라고 말해야 해서 [[구라]]를 친 게 고작 아시가루이니 도요토미의 출신이 얼마나 비천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도요토미가 아무튼 출신이 영 아니라는 것은 [[조선]]에도 알려졌는지 잘못 기록된 것이기는 하나 [[징비록]]에서는 도요토미가 [[중국인]]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주군]]의 [[눈]]에 들어 [[출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 말엽에 [[대마도]]에서 가바네인 아소미(朝臣)까지 적은 공문서를 보낸 적이 있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이 가바네인 줄 모르고 그대로 조정의 신하라 해석하여 공문서의 하자로 인식하였다.[* 당연히 제 나라의 독특한 성씨제도를 설명도 안 하고 무턱대고 쓴 일본의 과오다. 외교란 기본적으로 쌍방 합의가 필수다. 그리고 여태까지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가바네는 빼고 적었다.] 일본에서는 우지와 카바네를 쓰는 [[이름]]을 [[실명]]으로 여겼기에 이것을 [[본명]]으로 삼았다. 우삼동으로 알려진 [[아메노모리 호슈]]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노부키요([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誠,ruby=のぶ)][ruby(淸,ruby=き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실명은 미나모토노아소미 아리토모([ruby(源,ruby=みなもと)][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有,ruby=あり)][ruby(朋,ruby=とも)])고 [[이토 히로부미]]의 실명은 오치노스쿠네 히로부미([ruby(越智,ruby=をち)][ruby(宿禰,ruby=ノすくね)][ruby(博,ruby=ひろ)][ruby(文,ruby=ふみ)])고[* 양자지만 법적으로 무사의 아들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의 양조부인 이토 다케베[* 본래 성씨는 미즈이(水井).]가 이토 씨의 양자로 입적이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 본인도 이토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가쓰라 다로]]의 실명은 오오에노아소미 키요즈미([ruby(大,ruby=おほ)][ruby(江,ruby=え)][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淸,ruby=きよ)][ruby(澄,ruby=ずみ)])고 [[오키타 소지]]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카네요시([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房,ruby=かね)][ruby(良,ruby=よし)])고, [[세리자와 카모]]의 실명은 타이라노아소미 미츠모토([ruby(平,ruby=たひ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光,ruby=みつ)][ruby(幹,ruby=もと)])고, [[야마나미 케이스케]]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토모노부([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知,ruby=とも)][ruby(信,ruby=のぶ)])고 [[오쿠마 시게노부]]의 실명은 스가와라노아소미 시게노부([ruby(菅,ruby=すが)][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重,ruby=しげ)][ruby(信,ruby=のぶ)])다. 물론 이게 진짜냐고 묻는다면 선뜻 수긍하기는 그런 게 애초에 양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둘째 치고 나머지도 본인이나 본인의 [[조상]]이 [[족보]]를 위조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의 [[족보]]는 90%가 위조라는 주장의 근원은 경제학자로 [[한국사]]를 연구한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이고 근거는 바로 일본의 [[상황]]이지만 일본과 달리 [[조선]]이 우지를 버리고 묘지를 쓰는 상황이 온 것도 아니고 [[집성촌]] 문서를 보면 시카타 히로시의 주장은 의문이 든다.] 현대에는 평상시에 쓰는 경우는 없지만, 몇몇 명문가에서 가문 내 문서에 기재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 창작물 == [[동방 프로젝트]]의 [[히에다노 아큐]], [[후지와라노 모코우]], [[모노노베노 후토]], [[소가노 토지코]], [[하타노 코코로]]의 성 뒤에 노가 붙는 것도 성(姓)이 묘지(苗字)가 아닌 우지(氏)이기 때문이다. [[와타츠키노 요리히메]]와 [[와타츠키노 토요히메]]도 마찬가진데 이들의 경우는 실존하는 우지가 아니라 창작한 우지다. [[닌자 핫토리군]]에서 주인공인 [[핫토리 칸조]]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 이 우지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예시로 [[미츠바 켄이치|켄이치 우지]], [[케무마키 케무조|케무마키 우지]] 등.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우지, version=102, paragraph=2)] [[분류:우지(성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