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렌 졸리오퀴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1 ''' [[노벨상|{{{#cd9f51 노벨}}}]][[노벨화학상|{{{#cd9f51 화학상}}}]] {{{#cd9f51 수상자}}} [br] ''' }}} || ||<-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width=100px]] || ||<-2> [[노벨화학상/수상자#s-2.4|{{{#cd9f51 1935년}}}]] || || '''이렌 졸리오퀴리'''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 ||<-2> '''{{{+1 이렌 졸리오퀴리}}}[br]Irène Joliot-Curi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rène_Joliot-Curie_(1897-1956),_c._1935_(4406405158).jpg|width=100%]]}}} || || '''본명''' ||이렌 퀴리[br]Irène Curie|| ||<|2> '''출생''' ||1897년 9월 12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 ||<|2> '''사망''' ||1956년 3월 17일 (향년 58세)|| ||[[프랑스 제4공화국|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 || '''직업''' ||물리학자|| || '''모교''' ||파리 대학교|| || '''가족''' ||어머니 [[마리 퀴리]][br]아버지 [[피에르 퀴리]][br]여동생 [[이브 퀴리]]|| || '''배우자'''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1926년 결혼)^^|| || '''자녀''' ||[[엘렌 랑주뱅졸리오]][br][[피에르 졸리오]]||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장녀]]이다. 결혼 전 이름은 이렌 퀴리 (Irène Curie). == 생애 == 이렌 퀴리는 어머니 마리의 제자이자 퀴리 일가의 추종자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프레데리크 졸리오]]와 결혼했는데 프레데리크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퀴리라는 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자신의 성 졸리오에 퀴리를 이어 붙이도록 했다. 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탔다.[* 최초의 모녀 수상. 마찬가지로 부자 수상도 있는데 바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보어다. 둘 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피에르 퀴리 역시 아내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부녀 수상이기도 하다.] 그녀는 핵분열 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는데, 검출된 원소들이 핵분열 생성물이 아니라 초우라늄원소라고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2번째 노벨상을 놓치고 말았다.[* 참고로, [[엔리코 페르미]]도 같은 실수를 했다.]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오토 프리슈[*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로 구성된 베를린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자 땅을 쳤다고. 이를 통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렌이 활동한 파리 연구팀과는 달리 베를린팀은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이 각각 방사화학 및 분석화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는 핵분열 후 검출한 원소의 화학 분석에 도움이 되었다. [[http://www.kps.or.kr/141028| 이를 다룬 한국물리학회 사이트의 연재글]]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그녀와 남편은 프랑스에 남았으며, 퀴리 연구소에서 종전까지 머물렀다. 이 연구소에는 나치 관계자들도 드나들었지만, '''나치는 연구소 지하에 [[레지스탕스]]의 무기고가 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단 한 순간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한 것처럼 이렌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여러 번 입후보했지만, 그때마다 떨어졌다.[*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여성의 회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계에 [[성차별]]이 만연했기 때문.] 그러나 이렌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여성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했다. 1946년 [[방사선 피폭|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인해 폴로늄이 이렌의 몸에 침투하여]], 그녀는 이로 인한 건강 악화에 이어 백혈병에 걸렸고, 1956년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프레데리크와의 슬하에 딸인 [[엘렌 랑주뱅졸리오|엘렌]] (Hélène Joliot-Curie, Hélène Langevin-Joliot) 과 아들인 [[피에르 졸리오|피에르]] (Pierre Joliot-Curie, Pierre Joliot) 를 두었으며 (나이 순), 두 사람 모두 집안의 전통대로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엘렌은 파리 대학교 핵물리학과의 교수이자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 (CNRS) 의 연구 디렉터이다. 위에서도 나온 그녀의 남편 미셸 랑주뱅[* 재미있는게, 이 사람의 할아버지인 [[폴 랑주뱅]]은 마리 퀴리와 불륜 의혹이 있던 그 사람이다. 참고로 폴 랑주뱅은 그 불륜 스캔들 이후에도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 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도 핵물리학자이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브 랑주뱅은 천체물리학자이다. [[피에르 졸리오]]는 광합성의 산소발생 및 전자전달계 연구를 혁신하여 생물에너지론(bioenergetics)를 개척한 생물물리학자(biophysicist)[* 당시 광합성 연구는 물리학의 주요 분야였다 - 제임스 프랑크, 유진 라비노비치 등 유명 물리학자들도 광합성 연구에 헌신하였다] 이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받은 CNRS 소속 과학자이다. 피에르의 아내인 [[앤 졸리오]]도 생물물리학자로 많은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리 퀴리, version=349, paragraph=3.1)] [[분류:노벨화학상 수상자]][[분류:프랑스의 물리학자]][[분류:프랑스의 화학자]][[분류:1897년 출생]][[분류:1956년 사망]][[분류:파리 출신 인물]][[분류:백혈병으로 죽은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