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허재(고려)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사)] ---- [목차] 許載 (1062 ~ 1144) == 개요 == 고려의 문신. 자는 수강(壽康)으로 공암현(孔巖縣, [[서울특별시]] [[양천구]]) 출신이다. == 생애 == 허재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여읜데다 집안은 가난해 홀로 늙은 모친을 부양해야 했다. 허재는 한을 품고 외고조부 삼한공신 [[김긍렴]]의 [[음서]]로 어려서부터 도필리(刀筆吏, 기록 담당 [[아전]]) 자리를 얻는다. [[숙종(고려)|숙종]] 시기 공을 세워 철주(鐵州, [[강원도]] [[철원군]])의 방어판관으로 선발된다. 철주에서 선정을 베풀어 숙종으로부터 내시로 발탁돼 [[개경]]의 궁중에서 일하게 되며, [[예종(고려)|예종]]에게도 잘 보여 크고작은 국가적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9성의 역(九城之役,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는 행영병마판관으로서 [[김의원(고려)|김의원]] 등과 길주관 밖에서 여진족을 공격하여 30여인의 목을 베고 갑옷과 병장기, 우마 등을 노획하였다. 얼마 뒤 중군녹사를 맡아 길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곧 길주성에 여진의 6만 대군이 침입하였다. 허재는 불과 2천 명의 병력으로 병마부사 이관진과 수개월을 수성했으나 곧 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허재 등이 불굴의 의지를 다지며 사졸들을 격려해 겹성을 쌓으니 여진족을 격퇴할 수 있었고, 허재는 이 때의 공으로 감찰어사에 임명되니 이것이 유명한 [[길주성 전투]]이다. 허재는 계속해서 공을 세워 간관인 잡단으로 승진한다. 예종 10년(1115) 왕이 [[팔관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합문 앞에서 잠시 멈추고 신하들에게 창화(唱和, 시를 주고받음)하게 하였다. 창우(倡優)들이 노래하고 춤추기를 삼경(밤 11시 ~ 1시)까지 계속했는데, 허재가 어사대부 최지와 함께 예종 앞에 나아가 간언하니 예종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허재가 여진 정벌에서 보인 군사적 업적 덕분인지 예종 12년(1117) 동북면병마부사 임명을 시작으로 세 번 양계의 병마부사에 임명된다. 병마부사를 마치고 돌아와 [[인종(고려)|인종]] 2년(1124) 동지추밀원사로 임명된다. 허재는 인종 시기 [[척준경]]의 편에 서서 지문하성사, 참지정사를 거쳐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에 이른다. 인종 4년(1126) 5월 이자겸이 몰락한 뒤에는 같은 붕당으로 간주돼 대간의 공격을 받는다. [[척준경]]의 비호를 받아 처벌을 피했으나 이 해 6월에 허재는 지풍주방어사로, 허재의 아들 허순은 전주방어판관으로 좌천된다. 허재는 풍주(豊州, [[황해도]] [[송화군]])에서 성을 수리하고 기계를 제작하며 인근 도(道)와 주군에서 [[군량미]]를 확보해 전쟁에 대비한다. 풍주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병부상서 관직을 받는다. 이자겸 당 출신인 허재가 병부상서에 제수되는 것에 대간이 반발해 논박이 오가는데, 서해도안찰사가 허재가 풍주에서 공을 세운 점을 드러냈고 다시 호부상서로 재차 임명되고 은퇴한다. 허재의 공적이 허물보다 컸으므로 곧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가 더해진다. 인종 13년(1135)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는데, 허재묘지명에 따르면 은퇴한 허재가 왕에게 글을 올려 서경 공성전을 조언했다고 한다. 당시 모든 신하들은 군대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는데, 허재는 홀로 말하기를, >군사를 밖으로 드러내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옛날에도 또 있었습니다. 하물며 서경은 신이 일찍이 두 번이나 유수(서경유수)로 종사했는데 그 성은 험하고 견고해, 실로 옛 말에 '금성은 공격해 깨뜨릴 수 없다.'라고 했으니, 마땅히 근방에 성을 쌓고 군사는 숨겨 쉬게 함으로 그들의 항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露師於外, 爲賊所擒, 古或有之. 況西京, 臣嘗再從事留守, 其城險固, 眞古所謂, ‘金城, 不可攻破.’ 宜築城於傍, 藏兵休卒, 以待其降.] 인종이 허재의 말에 동의해 이를 중군병마사에게 전달했고, 다섯 성을 쌓고 해자를 막고 공격해 적들을 항복시킨다. 원수 [[김부식]]이 이 방식으로 서경을 함락한 것은 사서에서도 나타나지만, 허재가 조언을 했다는 것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허재는 인종 22년(1144) 봄 2월 을미일(14일)에 자택에서 사망한다. 3월 10일 정주(汀州, ?) 계내의 동쪽 기슭에서 화장된다. 인종은 부의와 함께 시호를 하사했으며 조서를 내려 태부의 관직을 추증한다. 남은 유골은 8월 18일에 매장된다. == 가족관계 == [include(틀:고려 재상지종)] * 증조부: 허현 * 조부: 허원 * 부: 허정 * 모: 강릉군대부인 김씨 * '''본인: 허재''' * '''본인: 허재''' * 전처: 광평군대군 이씨 * 아들: 허순 * 며느리: 조씨 * 딸 * 사위: 신영린 * 전처: 최씨 * 아들: 허균 * 후처: 상당군부인 김씨 결혼을 세 번 했다. 광평군대군 이씨가 1남 1녀를 낳고 죽었다. 최씨와 재혼해 아들 허균을 봤는데 모자가 함께 일찍 죽고 만다. 마지막으로 결혼한 상당군부인 김씨와 사이에서는 자식을 갖지 못했다. 허순은 평장사 [[조중장]]의 딸과, 딸은 정주사 합문지후 신영린과 결혼한다. [[분류:양천 허씨]][[분류:양천구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인물]][[분류:1062년 출생]][[분류:1144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