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후세 다쓰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 {{{+1 후세 다쓰지}}}[br][ruby(布施 辰治, ruby=ふせ たつじ)] | Fuse Tatsuj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후세 다쓰지/Tatsuji_Fuse.jpg|width=100%]]}}} || ||<|2> {{{#fff '''출생'''}}} ||[[1880년]] [[11월 13일]] || ||[[일본 제국]] [[미야기현]] 오시카군 헤베타무라촌[br](現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 ||<|2> {{{#fff '''사망'''}}} ||[[1953년]] [[9월 13일]] (향년 72세) || ||[[일본|일본국]] [[도쿄도]] [[도시마구]] || || {{{#fff '''묘소'''}}} ||[[도쿄도]] [[도시마구]][br][[이케부쿠로|미나미이케부쿠로]]2초메 20 || || {{{#fff '''직업'''}}} ||변호사, 사회운동가 || || {{{#fff '''학력'''}}} ||[[메이지대학]] 법학부 {{{-2 (법학 / 학사)}}} || || {{{#fff '''배우자'''}}} ||후세 미츠코 || || {{{#fff '''친인척'''}}}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 || {{{#fff '''별명'''}}} ||우리 변호사[* [[한국]]에서 불리던 별명이다.] || || {{{#fff '''소속'''}}} ||자유법조단[* 창립 멤버중 하나이다.] || || {{{#fff '''종교'''}}} ||[[불교]] {{{-2 ([[일련정종]])}}}[* [[유교]] {{{-2 [[성리학]]}}} → [[정교회|일본 정교회]] → [[불교]] {{{-2 ([[일련정종]])}}}[br]한때 일본 정교회 신자였지만 아내를 따라 일련정종으로 개종하였다.] || || {{{#fff '''서훈'''}}} ||[[대한민국 훈장#s-4.2|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 '''[ruby(生, ruby=い)]きべくんば [ruby(民衆, ruby=みんしゅう)]とともに、[ruby(死, ruby=し)]すべくんば[ruby(民衆, ruby=みんしゅう)]のために'''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희생|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그의 [[신념]]을 응축한 문구라고 할 만하다. 평생 동안 일제의 잘못된 정책과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상재사에 있는 후세 다쓰지를 기리는 '후세 다쓰지의 비'에 이 문구가 적혀 있다. 후세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아케보노 미나미 공원에도 이 문구를 적은 대형 기념비가 있다. 별도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자기 일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마무리 짓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반도|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의 화약고|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20세기에 발발했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했으며 21세기에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한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6.25 전쟁의 휴전까지 보고 사망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2번의 전쟁을 치르며 기어이 한반도를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일으켜 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반영된 결과다.] [youtube(1GfQKA8TCYw)]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일본]]의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 현재까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2명밖에 없는 [[일본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 생애 == ||[youtube(rCX-H0P0Q9w)]|| || 후세 다쓰지의 다큐멘터리 || === 출생 === [[1880년]] [[11월 13일]] [[일본 제국]]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다.[*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보면서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감[*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의 증언에 의하면 후세가 어릴 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파병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등 당시 경험을 영웅담마냥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당시 후세는 그런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걸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을 가졌다. 동시에 [[묵자]]의 '''겸애사상'''과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을 접하며 이에 많은 감명을 받고 사람들을 돕고 헌신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정교회]] 신학교까지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였고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법조인)|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 인권 변호사 활동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fusetatsuji.jpg|width=100%]]}}}|| || '''변호사 시절의 후세 다쓰지''' || [[1911년]]에 그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것 때문에 [[일본제국 경찰]]에게 조사받았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 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밀정(영화)|밀정]]의 실존 인물 [[김시현(독립운동가)|김시현]]과 [[황옥(1887)|황옥]]의[[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800115&plink=ORI&cooper=NAVER|#]] 변호,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 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제국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다. 두 사람은 [[천황]]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천황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다. 또 후미코가 의문사하자[*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감형을 거부한 뒤 이듬해 죽었다. 천황이 내린 명(감형)을 거스르고자 [[자살]]하였다고도 하고 당국의 [[암살]] 설도 있으나 확증은 없다.]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안장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쿠라헤이를 대중신문사 대표 [[박낙종]],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 김한경,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 조헌영과 함께 찾아가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고문에 항의했다. [[자유법조단]]의 창립 멤버이며[* [[옴진리교]]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사망한 [[사카모토 츠츠미 살인사건|사카모토 츠츠미]]가 여기 소속이다.] [[1928년]] 제16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노동농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32년]] [[일본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이후에도 2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하였다. === [[광복]] 이후 ===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고 나서 한신 교육투쟁(한신 교육 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 한국인 사건[* 패전 이후 살길이 막막해진 재일동포들은 막걸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일본은 그걸 두고 불법이라며 재일동포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후세 다쓰지는 "그들을 억지로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며, 그들의 생계수단마저 막고 있다"고 법정에서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및 노동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미타카 사건]]의 변호인단 중 1명이 되기도 하였으나[* 주범 타케우치의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단 간 의견 충돌로 도중 사임하였다.[* 이유는 공산당원인 변호인들이 자신들의 의뢰인이자 같은 공산당원들의 무죄판결을 위해 비공산당원인 타케우치를 주범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후 타케우치의 단독범행으로 인정되어 공산당원들은 무죄를 받았고 재판은 타케우치의 단독재판으로 진행되었다.] [[6.25 전쟁]]까지 목격한 그는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사후 === 평생을 한국의 독립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훈장#s-4|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이미 고인인 관계로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 [[http://m.seoul.co.kr/news/newsView.php?cp=seoul&id=20150228005003|#]] 2022년 기준 87세. 외조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 시절에 출생했다.]가 대신 전달받았다. 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고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그는 일생의 행적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에 도움을 준 것이었고 자국에서도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아 가면서까지 헌신을 한 점을 매우 높게 인정받았다. 그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적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2001년]]부터 서훈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 이르러 훈장이 추서되었다. 추서 당시 유일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였고 [[2018년]] 후세 다쓰지 본인이 직접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에게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가 2명이 되었다.[* 다만 과거 가네코 후미코의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이후 [[아나키스트]], 즉 [[무국적자]]가 되었다.] == 대한민국의 평가 == 위에서 말했듯 그가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수여받았을 정도로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지학사 교과서[* 박열, 후미코와 함께 소개되었다.]를 제외하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등장한다. ||[youtube(cHZCZUTjgUY)]|| [[2012년]] [[3월 1일]]에 방영된 [[KBS 1TV|KBS1]] [[역사스페셜]] 〈3.1절 기획 |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 -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편과 [[2014년]] [[10월 30일]] [[EBS]] 《역사 채널 e》의 〈조선 민중과 함께, 후세 다츠지〉편에서 다루어졌다. [[2017년]] 영화 《[[박열(영화)|박열]]》에 등장하며 야마노우치 타스쿠가 연기했다.[* [[임진왜란 1592]]에서 [[카메이 코레노리]] 역을 맡은 배우다.] [[2019년]]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https://m.news.naver.com/read.nhn?oid=020&aid=0003197295&sid1=104&mode=LSD|재조명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도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다뤄졌다.[[https://www.youtube.com/watch?v=_0FhaAHdCUc|#]]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2023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 기타 == * [[아일랜드]]에도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비슷한 인물이 살았다고 한다. 근데 이 사람은 [[부활절 봉기]] 때 [[사형]]당했다. *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는 후세의 생가가 있으며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미야기)|센다이역]]에서 [[센세키선]]이나 [[센세키토호쿠라인]] 열차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생가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생가의 맞은 편에는 후세 포목점이 있다.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탈 수도 있고 직통 버스편도 있다. * 이시노마키의 あけぼの南公園(아케보노미나미코엔)에는 후세가 남긴 말인 "살아있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가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다. [[2012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아케보노미나미 공원이 지진 피해자들의 임시 대피소 역할을 하면서 가건물들과 어지럽게 섞여 있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에서 그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서 다소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다.[[https://goo.gl/maps/DCjhjwKK9ckt5kqM6|구글 스트리트뷰#]] [[2013년]] [[5월]] 촬영 사진으로 가운데 빨래대가 있는 부분 옆의 비석. * [[일련정종]] 신도이다. 원래 [[정교회|일본 정교회]]에 심취했으나 결혼하면서 아내의 종교인 일련정종으로 개종했다. 사후에는 일련정종 사찰인 죠자이지(常在寺)에 안치되었다.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주택가 한 가운데 있다. JR이나 도쿄 메트로 [[이케부쿠로]]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도착 가능하다. 죠자이지에 방문하면 후세 가의 묘소를 참배할 수 있고 일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경내에 한국인 스님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16년 초 기준] * 선천적 [[색맹]]이었다. * 검사를 그만둘 당시에 [[쇼기]]의 [[기사]]([[棋]][[士]])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실제로 단수 삼단까지 간 경력이 있다. * 배우자인 미츠코는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했는데 후세가 조선을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숙생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자인 스스무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 유학생들이 전쟁 때 방공 훈련 등 이모저모로 도움을 주었으며 심지어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자택에 우유를 무료로 배달해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천황|천황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는 제도를 인위적으로 해체하기보다는 황실의 단절로 자연 소멸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여담으로 현재 [[일본 황실]]이 딱 '''이걸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전현직 합쳐 남자가 아키히토, 마사히토,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 딱 5명뿐이며 이 중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히사히토 1명뿐이다.] 이걸 해결하겠다고 온갖 아이디어[* 구 황족 복귀, 여계계승 인정, 황별섭가 복귀, 이혼 및 후궁(...) 인정 등]가 나오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구 황족 복귀 지지와 여계계승 지지가 충돌하며 황별섭가는 지지를 많이 못 받고 이혼 및 후궁은 그냥 정신나간 것 정도로 취급한다. 그래도 문제가 심각해서 아이코 공주+[[구황족]] 일원의 결혼, 아이코 공주+히사히토의 결혼 식으로 타협을 보려는 시도가 있긴 하고 전자는 그래도 구황족 측에서도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후자는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사이가 워낙 나빠서 그게 제대로 될지 어떨지가 [[미지수]]다.] 진전이 없다. 히로히토의 [[포츠담 선언]] 수락에는 높이 평가했다. *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군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러일전쟁]] 장수였던 [[노기 마레스케]]에 대해 교육자로서 존경하였다. * [[장남]]인 후세 간지[* 布施柑治, 1906~1978. [[니혼게이자이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가 쓴 평전이 있다. 기자들 사이에서 아버지 이름이 오가기에 부끄러워서 'F씨' 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를 지칭하고 책에서도 F씨로 통일했는데 이 'F씨'라는 것 때문에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관련 문서 == * [[변호사]] * [[독립유공자]] [[분류:일본의 법조인]][[분류:일본의 변호사]][[분류:일본 제국의 정치인]][[분류:한국의 외국인 독립운동가]][[분류:일본의 사회운동가]][[분류:일본의 인권운동가]][[분류:1880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이시노마키시 출신 인물]][[분류:메이지대학 출신]][[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