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해리(10세기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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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耶律解里
(? ~ ?)
요나라의 인물. 자는 발단(潑單) 거란(契丹) 돌여불(突呂不) 부족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야율해리는 일찍이 야율요골(耶律堯骨)의 휘하에 속하였다가 발탁되어 군관이 되었다.
천현(天顯) 연간, 후당(後唐)이 정주(定州)를 함락시키자 야율해리는 후당의 포로가 되었는데 후진(後晉)의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돌아오자 태종(太宗)이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회동(會同) 9년, 후진을 정벌할 때 호타하(滹沱河)를 건너 군사를 보내 중도교(中渡橋)를 빼앗고 후진의 장군 두중위(杜重威)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태종이 명을 내려 야율해리와 항장(降將) 장언택(張彥澤)에게 기병 3천을 거느리고 하남(河南)으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하남에 도달하자 그들에게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개봉부(開封府)에 입성하자 야율해리와 그 무리들이 진주(晉主) 석중귀(石重貴)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장언택이 멋대로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며 궁궐을 어지럽혔고 야율해리가 막고자 하였지만 막지 못했다. 이에 개봉부의 민심이 동요해 백성들 중 원망하고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태종이 개봉부에 이르고 죄를 물어 저잣거리에서 장언택을 참형에 처하자 개봉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야율해리 또한 힐책을 받았지만 곧 용서하였다.
천록(天祿) 연간에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고 응력(應歷) 초, 본부영온(本部令穩)에 임명하고 야율해리에게 대대로 그 직책을 세습하게 하였다. 그 후 죽었다고는 하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3. 여담[편집]
이 문서의 제목이 10세기 중반인 이유인 10세기 초반에 활동한 동명이인이 있다. 다만 그 쪽은 해리(解里)가 아닌 해리(海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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