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계 합용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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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음가
2.1. 중세 한국어에서의 음가
2.1.1. 어두자음군설
2.1.2. 경음설(된소리설)
2.2. 근대 한국어와 그 이후



1. 개요[편집]


ㅅ계 합용병서란 ㅅ과 ㅅ 외의 다른 자음이 결합한(병서) 자음자 쌍을 말한다. 대개 후행하는 자음은 파열음이나 파찰음이다.


2. 음가[편집]



2.1. 중세 한국어에서의 음가[편집]


중세국어에 쓰이던 초성의 합용병서에는 ㅅ계, ㅂ계, ㅄ계가 있었는데, 이 중 ㅂ계와 ㅄ계는 17세기 이후 ㅅ계 합용병서로 합류하여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이하게도 《훈민정음》에서는 ㅺ, ㅼ, ㅽ 등이 나타나며 ㅾ는 나타나지 않는다.

ㅅ계 합용병서의 15~16세기 음가에 대해서는 자음군설과 경음설이 대립하고 있다. 자음군설은 병서된 자음들이 각각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고, 경음설은 ㅅ 뒤에 표기된 자음의 된소리로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다. 혹은 중세에는 ㅅ계 합용병서에 대하여 된소리를 표기하는 경우와 어두자음군을 표기하는 경우가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2.1.1. 어두자음군설[편집]


자음군설의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1. 15세기에 ㅅ계 합용병서였던 단어들 중 한글 전 한국어 표기에서 어두의 ㅅ 음가가 문증되는 사례가 있다.
    • ''의 중세 국어 형태는 'ᄲᅳᆯ'인데, 이는 신라의 관직 각간(角干)의 이표기 서불한(舒弗邯)과 연결된다.[1][2]
    • 일본서기》에서는 ''의 중세 국어 'ᄯᅴ'에 해당하는 고대 국어 어휘를 시토로(シトロ)라고 기록하고 있다.[3]
    • '꼴(가축에게 먹이는 건초)'의 중세 국어 형태는 'ᄭᅩᆯ'인데, 이는 《계림유사》의 질고(質姑)와 연결된다. 당시 중국어에는 ㄹ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었으며 질(質)의 말음은 [t\]였으므로 실제 발음은 '지골'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ㅈ이 ㅅ으로 약화되고 모음 탈락이 이루어진 것이다.[4]
  2. 방언에 ㅅ발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예) 평북 방언 '시더구' - '떡'[5], 제주 방언 '시동' - '똥', '시꾸다' - '꾸다' 등.
  3. 불경 범어 표현에서 산스크리트어 어두자음군을 ㅅ계 합용병서로 대역했다.
  4. '사나이'의 고어 'ᄮᅡᄒᆡ'의 ㅻ형은 ㅅ이 [s] 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할 수밖에 없다.
  5. 고려사지사[6], 조선물어, 왜한삼재도회(이상 일본어),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네덜란드어)[7] 등 한국어 어휘가 수록되어 있는 외국 책들을 살펴 보면 s에 해당하는 소리가 어떤 식으로든 전사되어 있다.
  6.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하는 ㅂ계와 ㅅ계 합용병서의 특징에 차이점이 없다. 만약 ㅂ계는 어두자음군, ㅅ계는 된소리의 표기였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에 표음주의적이지 못한 ㅅ계 합용병서의 발음법을 알려주는, 즉 ㅂ계와는 차별화되는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른 된소리 설 측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다수의 ㅅ계 합용병서 어휘 중에서 몇몇 사례의 방언에서만 ㅅ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례적인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2. 외국어 자료의 특수 표기일 뿐이며, 오히려 모음 조화에 따라 기본 모음인 'ㆍ/ㅡ'를 삽입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 (svaha → ᄉᆞᄫᅡ하 → 사바하)
  3. 외국 문헌에서 s에 해당하는 소리가 전사되어 있는 것은 실제 발음과는 다르지만 훈민정음의 합용병서 표기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대체로 표기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다 '이례적인 예외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자료의 분량이 '이례적'이라 할 만큼 월등히 적은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1.2. 경음설(된소리설)[편집]


된소리설의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두 가지 모두 15세기에 출현하는 ㅅ계 합용병서에 대하여 논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조선 중후기의 ㅅ계 합용병서는 이미 된소리로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ㅂ계 합용병서든 평음이든 된소리로 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ㅂ계 합용병서의 대부분은 된소리의 단계를 거쳐 조선 중후기에는 표기상으로는 ㅅ계 합용병서로 등장하는 일이 많다.(ᄠᅳᆮ → ᄯᅳᆮ)
  1. ''은 《계림유사》에서 寶妲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寶라는 글자로부터 ㅂ으로 시작하는 2음절 어휘였거나 ㅳ계 어두자음군 어휘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는 ㅅ계 합용병서 'ᄯᆞᆯ'으로 변화하였다. ㅅ계 합용병서에서 ㅅ음이 발음이 되었다면 '딸'이라는 어휘의 첫 초성은 ㅂ음에서 ㅅ음으로 변한 것인데, 이러한 변화는 설명하기 어렵다.
  2. 끌다, 찧다는 원래 초성이 예사소리였다가 (ㅅ계 합용병서가 어두자음군일지도 모를 15세기에도) ㅅ계 합용병서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ㅅ계 합용병서에서 ㅅ음이 발음된다면 왜 갑자기 어휘 앞에 ㅅ음을 덧내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따른 어두자음군 설 측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ㅅ계 합용병서가 단순히 된소리 표기법이라면 중세국어 표기에서 두번째 음절 초성의 ㅅ계 합용병서 ㅅ이 첫번째 음절의 종성으로 이동하는 표기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훈민정음 시기 종성 ㅅ은 마찰음 [s]로, 실제로 발음되는 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절충하는 설명으로 영어에서 [s] 음 뒤의 [k], [p], [t] 음이 무기음이 되는 것처럼 종성 마찰음 [s] 뒤의 장애음이 경음화되는 현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8] 또한,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도 ᄣᅢ와 ᄠᅢ를 혼동하는 등의 현상이 존재했는데 이를 근거로 '딸'이 본래 'ᄣᆞᆯ'였다 재구하면 계림유사에서의 '딸'의 표기에서 중세국어의 '딸'로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2. 또한 계림유사의 '寶妲(보달)'은 '實妲(실달)'을 잘못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현전하는 계림유사 판본은 오탈자가 만연하기 때문에[9] 이 사례 또한 같은 경우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딸"은 원래부터 ㅅ으로 시작하는 2음절 어휘였거나 ㅼ으로 시작하는 어두자음군 어휘였을 것이다. 실제로 계림유사에서 '寶(보)'는 이 부분 빼고는 전혀 나오지 않으나 '實(실)'은 여러 번 등장한다.[10]
  3. 끌다, 찧다 모두 예사소리와 ㅅ계 합용병서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5세기 당시는 어두자음군이 존재했을 막바지 시절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2.2. 근대 한국어와 그 이후[편집]


이러한 의견 대립은 15~16세기 음가에 국한되고 있으며, 근대 한국어 시기에는 된소리로 발음되었다. 어두자음군은 늦어도 근대 한국어 전에 모두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ㅅ계 합용병서가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주로 쓰이고, 오늘날 된소리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각자병서는 도리어 잘 쓰이지 않았다.[11] 한글 창제 초기에는 각자병서 표기가 보이다가 원각경언해(1465)에서 급격히 빈도가 낮아지는 현상이 보이기에, 지침상 각자병서를 폐기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왜 'ㅅ'이 된소리 표기에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않으나, 사이시옷에서도 보듯 'ㅅ'이 오랜 세월 동안 선행음절의 폐쇄를 표기하는 용도로 쓰인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12] 초성에서의 [s]가 아니라 종성의 [t̚]를 표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잇따르는 자음이 된소리가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13] 근대에 박승빈은 이 때문에 도리어 각자병서보다는 ㅅ계 합용병서를 쓰는 것이 음운론적으로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ㅅ계 합용병서를 쓰면 '냇가' 같은 사이시옷 표기의 발음을 적을 때 [내ᄭᅡ]가 되는데, 표기상으로 선행음절 종성 'ㅅ'이 초성으로 옮겨간 것처럼 보여 자연스럽다.

다만 ㅎ이 이와 유사하게 거센소리화 역할을 한다고 해도 거센소리가 된 그 음소를 'ㅎㄷ' 식으로 적지는 않는 것처럼, 사이시옷이 경음화를 일으킨다고 해서 경음화된 음소를 ㅅ과 함께 써야 할 필연적인 당위성은 없다. 'ㅅ+ㄷ'이 합쳐져 'ㄸ'라는 음소가 되었다고 해석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14][15]

근대 시기(19~20세기)에는 된소리의 표기로 각자병서와 ㅅ계 합용병서 둘 중 무엇이 타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열띠게 벌어졌다. 맞춤법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조선 중후기에는 주로 ㅅ계 합용병서가 관습적으로 우세하였으나 맞춤법을 제정해나가는 과정에서 《훈민정음》에서의 세종의 의도를 생각하면 각자병서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각자병서를 쓰는 것으로 명문화된 것은 잘 알려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등이 ㅅ계 합용병서를 표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초기의 문헌들은 ㅅ계 합용병서를 쓰는 일이 많다. 그 유명한 김소월의 진달래꽃 역시 원문은 '꽃'이 아니라 'ᄭᅩᆺ'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제공되는 20세기 초 동아일보 기사도 입력이 각자병서로 되어 있어서 그렇지[16] 본문을 확인해보면 ㅅ계 합용병서인 것들이 많다.

한글 점자에도 ㅅ계 합용병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된소리 'ㄲ', 'ㄸ', 'ㅃ', 'ㅆ', 'ㅉ'의 초성을 적을 때에는 같은 초성을 두 번 적는 것은 아니라 초성 'ㅅ(⠠)'을 'ㄱ', 'ㄷ', 'ㅂ', 'ㅅ', 'ㅈ' 앞에 붙여 'ㅺ', 'ㅼ', 'ㅽ', 'ㅆ'(각자병서), 'ㅾ'으로 적는다. 초성이 아닌 종성에서는 받침 'ㄲ'을 받침 'ㄱ' + 받침 'ㄱ'으로 적는 것과는 대조적인데, 초성 된소리와는 달리 'ㄲ' 받침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고 나서 'ㄲ'이라는 철자로만 쓰이기 시작했기(즉 'ㄲ' 받침은 'ㅺ'으로 적힌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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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각간은 중국 기록인 《양서》에서는 자분한지(子賁旱支)로,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으로 기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서불'의 ㅅ은 본래 ㅈ이었다가 약화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2] 일각에서는 '서불'이 뿔이 아니라 소벌(蘇伐), 서라벌 등과 같이 단순히 서울이라는 표기를 뜻한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해당 설이 사실이라면 '서불한'은 '서울의 지도자', '수장'을 뜻하는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의 한성부윤, 오늘날의 서울시장과 비슷한 위치. 그러나 '각간(角干)'이라는 이표기부터가 뿔+간이라는 구조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 주장은 신빙성이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설령 '서불한'의 실제 의미가 서울의 지도자였다고 할지라도, '서불'에 해당하는 당시 음가를 표기하기 위해 의 훈 '뿔'을 빌린 것만큼은 확실하므로 뿔의 고어형은 여전히 '서불'로 재구할 수 있다.[3] 겐조 덴노 3년(487년)조에서 등장하는 백제의 지명 대산성(帶山城)에 '시토로모로노사시(シトロモロノサシ)'라는 훈을 달았다. 일본식 속격 조사 노(ノ)를 제외하고 분석하면 '모로(モロ)'는 용비어천가에서 문증되는 '뫼[山\]'의 고어형 '모로'와 일치하며, '사시(サシ)'는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서도 성(城)과 대응될 뿐더러 신라 향가 혜성가의 '*자시(城叱)' 및 중세 한국어로 성을 뜻하는 '잣'과 일치한다. 따라서 한자 띠 대(帶)에 대응되는 단어는 남은 부분인 '시토로(シトロ)'가 된다.[4] 제주 방언에는 ㅈ 대신 ㄱ이 ㅎ으로 약화된 뒤 ㅈ과 결합해 거센소리 ㅊ이 된 것으로 보이는 '촐'이라는 어형이 남아 있어 이 설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같은 과정을 거쳐 ㅺ과 ㅊ이 공존하게 된 경우는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도끼'의 중세 국어 어형으로 '돗귀'와 '도최'가 있으며 '꼬리'의 어형으로는 'ᄭᅩ리'와 '초리'가 있었다.[5] 신성한 의식이나 제사에 쓰이는 특별한 떡을 의미하는 일본 고어인 시토기(しとぎ)와도 유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일본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떡을 가리키는 표현은 '모치(もち)'이다.[6] 'ᄭᅮᆯ'을 'スコル(sukuru)'로, 'ᄭᅯᆼ'을 'スコク(sukoku)'로, 'ᄭᅩᆯ'을 'スコル(sukoru)'로, 'ᄯᆞᆯ'을 'スタリ(sutari)'로, 'ᄯᅴ'를 'ステイ(sutei)'로, 'ᄯᅩᆼ'을 'ストン(suton)'으로, 'ᄯᅩ'를 'スト(suto)'로, '아니ᄭᅩ블가'를 'アニスコブルカ(anisukoburuka)'로 전사하였다.[7]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이 1692년 발간한 서적으로, 1668년까지 헨드릭 하멜과 함께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선원 마테우스 에보켄(Mattheus Eibokken)의 증언을 인용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뺨을 Spaem, 떡을 Stock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하멜 일행이 체류하던 전라도 지역의 방언으로 보인다. 17세기 당시 중앙 방언에서는 이미 ㅅ계 합용병서와 예삿소리의 혼동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어두자음군이 소멸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당시 방언에 어두자음군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본래 중앙어에도 그러한 현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8] 김성규(2009), "중세국어 음운론의 쟁점", '국어사학회' 9, 41-68.[9] 얼마나 오탈자가 많은지, 심지어 계림유사 원본에는 딸이 寶姐(보저)라고 적혀있다. 이걸 학자들이 보니 누가 봐도 오타여서 寶妲(보달)로 수정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10] 또 다른 근거로, 계림유사에서 중세 국어 'ᄡᆞᆯ'에 해당하는 어휘는 菩薩(보살)로 표기했으며, 이를 통해 '딸'이 ㅂ 음가로 시작했었더라면 계림유사에서 한자로 옮길 때 菩(보)로 옮겼을 것이고 굳이 寶(보)로 옮기진 않았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보살이라는 표기에 이끌린 것일 수도 있으나, 薩(살)은 다른 위치에서도 등장한다. 또는 'ᄢᅳᆷ'과 '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냥 같은 뜻을 가진 두 가지 어휘일 수도 있다.[11] 조선 초기 당시 한자의 발음을 정리, 명시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 각자병서가 한자의 전탁음(유성음)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12] 이 현상은 16세기를 지나 음절말 [s\]이 소멸하고 음절말 [t̚\]로 통합된 뒤(음절말 'ㅅ'과 음절말 'ㄷ'이 같은 소리를 나타내게 됨) 음절말 [t̚\]의 표기로 'ㄷ'이 아닌 'ㅅ'를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났다. 음절말 [t̚\]의 'ㅅ' 표기는 17~18세기 경 일본어 역학서 류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어째서 'ㄷ'이 아닌 'ㅅ'을 주된 표기로 사용하게 됐는지 이유는 알기 어렵다.[13] 20세기 초 지석영은 "원래 'ㄸ'처럼 각자병서를 써야 하는데 같이 한자에서도 자주 쓰는 반복 부호를 'ㅅ' 비슷하게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4] 박승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파음 - 경음화의 틀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ㄹㄹ'까지 'ㅅㄹ'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더욱 음운론적 근거가 떨어진다.[15] 특이하게도 일본어에서 간혹 박승빈의 주장과 유사한 표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외국어의 /l/발음을 표기하려 원래 /r/에 가까운 발음을 나타내는 ラ행 앞에 위의 'ㅅ'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ッ'을 덧붙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ッ'를 단순한 입성(-k, -t, -p)이 아니라 후행하는 자음의 복자음화(-kk-, -tt-, -ss-, -pp-, -ll-)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최고신인 알라를 'アラー'(아라)가 아니라 'アッラー'(앗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기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외래어 표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16] 그밖에 가 일괄 로 변환되어 입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