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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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명도.jpg

이름
강명도(康明道)
본관
신천 강씨(信川 康氏)
출생
1958년 12월 4일 (65세)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읍 하리 칠골동
(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2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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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성별
남성
현직
대동강오리불고기 대표
학력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불문학 / 학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학사)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 석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학|효학과 / 박사과정 재학중)
가족
배우자 왕금봉, 아들 2명, 딸 3명[1]
종교
개신교
외부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유튜브

1. 개요
2. 생애
2.1. 집안 배경
2.2. 탈북 이전의 삶
2.3. 탈북
2.4. 탈북 이후의 삶
3. 정치 성향
4. 기타



1. 개요[편집]


강명도는 북한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대좌)과 주석궁 경리부 산하 합영회사 부사장을 지냈으며, 1994년 탈북하였다. 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대동강오리불고기 대표이다. 김일성의 외가인 칠골 강씨 가문 출신으로, 김일성의 10촌이다. 자세히 말해서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강명도의 할아버지 강선욱과 6촌이며 강명도의 아버지 강영겸이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8촌이며 큰외삼촌인 강진석과는 10촌이다.

김일성의 창덕소학교 담임선생이자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은 강명도의 작은 할아버지다.




2. 생애[편집]



2.1. 집안 배경[편집]


본관은 신천 강씨.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집안으로 북한에서는 성골계층이다. 강반석의 부모 강돈욱과 위돈신도 우상화 되었다. 강명도의 아버지 강영겸은 평양시 건설 부총국장을 역임했다. 어머니 심계생도 보통강 구역당 당역사 강사를 지냈다.

그리고 평양시당 책임비서와 북한의 정무원 총리를 지냈던 강성산사위이기도 했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히기를 강명도 교수 본인 때문에 좌천되기도 했다고 한다. 강성산의 딸과의 결혼은 서로 재혼이라고 한다. 재혼하게된데 사연이 있는데 강명도의 초혼은 강명도가 함흥출신 접대원. 미모에 반해 좋아했으나 집안에서 반대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지역감정 때문에 서로 혼인은 커녕 소통도 안할정도로 심한 갈등이 있었고 특히 강명도의 집안이 평양 명문가였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그래도 기어코 결혼하였다가 강명도가 잠시 혁명화로 수용소에 갈때 전후로 서운함 때문에 이혼했다고 한다. 한편 강성산의 딸 역시 전남편이 강성산이 잠시 좌천되었을때 구박을 해서 강성산이 중앙으로 복귀하자 이혼시킨 것. 그래서 자신의 딸을 비슷한 처지인 강명도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강명도 본인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강성산의 사위라는 것보다는 김일성의 외가인 칠골 강씨 출신이라는 것이 더욱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칠골 강씨 집안이다. 칠골 강씨도 백두혈통, 즉 김일성 일가 급으로 대우를 받는다고.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만경대 김씨'와 강반석의 '칠골 강씨'가 이른바 로열 패밀리 집안이다. 게다가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2]이 난산으로 죽고 15세가 될 때까지 김일성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다는게 중론이다. 아버지 김일성은 김성애랑 바람 피워 자녀들(김정일에게는 이복동생)(대표적으로 김평일)을 낳았다. 때문에 어린 김정일은 김일성의 외사촌 동생 강보비 손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유모 강보비는 김정일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 강보비의 조카가 강명도이니 그야말로 북한 내에서 로열 패밀리 중의 로열 패밀리였던 셈이다. 그런 그가 탈출해버린 것이기도 하다...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과 육촌 관계이다. 둘은 같은 항렬이고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서 유치원, 소학교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실제로도 얼굴이 비슷하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강량욱목사이면서 정치인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과 국가부주석을 지냈으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의 6촌 동생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강량욱이 일제강점기 민족혼과 애국혼을 학생들에게 일깨워준 참된 스승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돈욱이 창덕학교를 설립했고 김일성은 창덕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면서 강량욱의 학급으로 들어가서 담임선생님과 제자 관계가 되었고, 김일성은 당 간부들에게 동무라는 호칭으로 불렀지만 강량욱에게만 특별히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강씨집안 강반석의 부모 강돈욱과 위돈신은 선생과 녀사 칭호를 받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 역시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북한에선 선생과 녀사는 아무에게나 붙이지 못하는 칭호이다.

2.2. 탈북 이전의 삶[편집]


1958년 12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읍 하리 칠골동(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2동)에서 아버지 강영겸과 어머니 심계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평양외국어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남 같으면 당이 시키는대로 평생할 일일텐데, 강명도는 직장 일에 곧 흥미를 잃었고, 강반석 일가였기 때문에 때려치우고 새 직장을 잡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이후 중앙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1979년 9월 ~ 1982년 7월), 평양시당 39호실(노동당 39호실 산하) 지도원(1982년 7월 ~ 1985년 10월), 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1985년 10월 ~ 1986년 7월)을 지내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28세에 문득 군인이 하고 싶다며 가족들을 졸라 1986년 8월부터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으로 배속 되었는데 당시 민간인에서 김정일 사인 한큐에 보위국 대위로 임관하였다. 보위국은 군 보위사령부로 선군정치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당시 국가보위부는 부장도 없이 공석으로 찌그러져 있었는데 김정일에게 조직 자체가 찍혀서 심화조 사건도 인민보안성을 시킬 정도였다. 보위대학 연구실장 자리는 대좌~소장 사이 편제라 직급을 맞춰주려 1년마다 승진하여 32살에 대좌에 올랐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다 외국인과 무단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1990년 3월부터 1991년 2월까지 평안남도 북창군의 18호 관리소에서 수용되기도 했다. 이만갑에서 강명도 본인이 밝힌 바로는 이 18호 관리소에 수용되는 간부급들은 이후 다시 복권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꽤 고생해야 하지만 관리인들이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편의(떡과 고기 등을 제공한다.)를 봐주므로 그렇게 힘든 곳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일반 주민들의 삶을 지켜보고 체험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특권층으로 혜택을 누리는지 되새겨보고 정신차리고 충성을 다하라는 의도다.

강명도가 사라지고 나서 몇달후에 칠골 강씨 집안에서 강명도를 수소문하여 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알려지자 북한역사에 유례없는 칠골 강씨 친족들의 반발과 재조사 탄원으로 김정일이 사건을 재검토하여 강명도는 석방되었고 강명도를 수용소로 보낸 정치위원이 도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강명도급 인물을 수용소에 보내려면 김정일의 사인이 필요 했는데 김정일이 나중에 반발을 보고 "이건 제의서(보고서)가 잘못된 거라서 사인한 것이고, 거짓으로 작성한 놈이 잘못"이란 명분으로 강명도를 수용소로 보내자고 한 정치위원이 도로 독박을 쓴것이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1992년 김일성 주석궁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이후 능라 888이라는 외화벌이용 위장회사의 사장없는 부사장 직위로 북한에서 달러를 물쓰듯 하며 호화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2.3. 탈북[편집]


1994년 5월 탈북하였다. 미수금을 결제하고 재일교포 사업가의 투자 유치를 따내기 위해서 2주간의 출장을 나갔는데 당시 북핵위기로 해외외교관 소환령이 내려졌던 상황이었다. 그의 출장은 김정일 허락없이 장인인 강성산의 보증과 주석궁 경리부장[3] 전결로 나온 것이었고, 일정이 지연되어 같이 온 보위부원과 직원을 먼저 북한으로 보내고 사업일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보위부에서 강명도를 찾으러나왔는데 선양 영사관에 있던 친구가 오해하여 보위부와 같이 돌아가면 잡혀가는 꼴이 되니 보위부 요원이 북한으로 돌아가면 그때 돌아가라는 말을 믿고 귀국하지 않고 버티게 되었다. 이처럼 나서자 보위부 요원들이 북경 대사관에서 짱박혀 놀다가 허위보고로 강명도가 행방불명이라고 평양에 보고했다. 그러자 화난 김정일은 보위부 체포조를 150명을 파견하고 죽여서라도 데려오라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강명도의 출장은 애초에 김정일의 해외출장 금지령을 어기고 예외적으로 나간데다가, 북미 핵합의 전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기 전에 북한 엘리트들이 도망갈까봐 아니면 정보를 가진 핵심 인물들이 해외에서 납치당할까봐 김정일이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명도는 평양외국어학원 출신에 보위국 대좌를 지냈기 때문에 외교관이고 보위부원이고 지인 혹은 친인척이라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죽여서라도 데려오라는 지시를 듣고 끌려가면 죽지는 않을테지만, 지난번 18호 개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처럼 최소 2~3년은 혁명화급 처벌이 뒤따를 것이고, 이에 되돌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해 망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시 가느냐 죽겠다는 생각으로 탈출을 결심한 것. 처음에는 중국 공안 지인의 도움으로 위조여권으로 홍콩에서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가 일단 제3국인 독일로 도망가서 미국과 접촉했다. 그런데 자신이 제공한 정보와 달리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해버렸고, 미국에서 자기를 북한에 팔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미국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탈출, 프랑크푸르트에 갔다가 한인교회에 안기부 요원들에게 속아서(!?) 한달만 남조선 구경한다고 들어왔다가 졸지에 귀순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강명도는 입국 조건으로 북에 남은 가족에 피해가 갈까봐 기자회견을 안하기로 하고 들어왔으나 안기부에서 VIP의 강력한 요구로 기자회견을 강권하여 결국에는 북핵관련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로 뒷통수를 쳐맞고 클린턴 행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북핵관련 합의는 미국에서도 반발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합의는 미국이 하고 KEDO 출자금은 한국과 일본이 78%를 제공해야 했다. 때문에 한국이 북핵 관련 정보를 외신에 제공하여 클린턴 행정부에 정치적 타격을 주려고 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한미관계가 악화되었고 안기부에서 외교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강명도를 외신과 접촉을 막고 안가로 다시 숨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강명도는 원래 안하기로 했던걸 바득바득 우겨서 시킨 안기부와 갈등이 있었고 북에 남은 가족들의 고초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명도가 자살할까봐 안기부가 데려간 곳이 광림 교회로 그후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탈북민 중에 고위급으로 김일성 강반석 일가는 물론 북한의 외화벌이 자금과 관리 돈세탁 구조를 잘 아는 고급 자원이라 국정원에서 유망주로 보고 반 강제로 산하 연구 기관 한반도통일연구원에 배정했으나 1주일만에 때려친 걸로 알려져 있다. 같은 평양 외국어대학 후배인 김동수 박사 말로는 연구기관이라 매일 출근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외교부나 통일부 국정원에서 질의에 자문이나 답변해야 되는 답답한 생활이라 북측 외교관이나 군인들이 거의 처음에는 대부분이 배정이 되고 자의로 그만두기로 하는데 강명도는 일주일만에 보고서를 백지로 내며 앞장에 "나는 나갑니다"라는 한줄을 달랑 남기고 최단기 퇴사 기록을 세우며 훌쩍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는 사업가로 활동했다.

2.4. 탈북 이후의 삶[편집]


북에 있던 전처와 아들과 딸(1남 1녀)은 2007년 한국으로 탈북하였으나, 이미 강명도는 한국에서 만난 20세 연하의 중국인 여성과 재혼한 상태였다. 재혼한 아내에게서는 1남 2녀를 얻었는데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으며 막내딸은 2010년생, 즉 강명도의 나이 53세에 태어났다.

현재는 경민대학교와 경기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대동강오리불고기 대표를 하고 있다. 2016년 2월 장로회 신학교 신학대학원을 8년만에 졸업하고 전도사로도 활동 중이다.

주로 종합편성채널의 시사 프로그램이나 북한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 특히 채널A의 출연이 잦은 편이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는 고정 출연했었고, 채널A 뉴스특보 같은 보도 프로그램에서도 북한 소식이 나왔다 하면 자주 출연하였다. 그 와중에 장성택 처형 관련 특별 보도 때 딴생각 하다가 앵커의 장성택 애인 존재 여부 질문에 나진지구 카지노 관련 이야기로 동문서답한 적도 있다. 이 내용은 이만갑에서 직접 밝혔다. 31분 50초 즈음부터

2019년 말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대동강오리불고기'라는 식당을 개업했다. 이 식당에서는 북한의 유명 식당인 청류관식 오리불고기, 평양냉면, 평양식순대를 판매한다. 이 오리불고기는 고추장 양념이 아닌 소금과 오신채 같은 야채로 간간하게 양념한 것이다. 2020년에는 임대료 인상 문제로 인해 인근의 다른 장소로 옮겼는데 접근성이 오히려 높아졌다. 2020년 3월 초부터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식당 영업을 당분간 중단하고 일부 메뉴를 온라인 판매하고 있다. 2020년 6월부터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으로 본점을 이전하여 운영중이며, 성내동 지점은 경영난으로 폐업 진행중이다.

2020년 4월부터 5월 사이 있었던 김정은 사망 의혹 논란에서, 처음엔 손목과 발목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풍으로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이후 김정은이 건재한 모습을 드러내자 대역설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김정은은 멀쩡했다.

3. 정치 성향[편집]


전업 정치인이 아니므로 특정 정당에 맹목적 지지를 보이기 보다는 시기별, 사안별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2013년에 같은 북한이탈주민 출신 정성산, 박상학 등과 함께 일베저장소 유저 인증을 했다. 그 사진에는 "일베야 두려워 마.", "일베야 아프지 마."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시 일베의 실상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탈주민 출신 운동가인 정성산, 박상학과 달리 과격한 성향은 그렇게 없기도 하고 2020년 우파 유튜버 이봉규의 방송에 출연해서는 리비아의 반 카다피 내전과 북한을 비교중에 5.18처럼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중 봉기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극우로 보기는 어려워보인다.

  •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과거에도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시절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 지원으로 2년간 활동한 인연으로 김대중을 지지하여 김대중이 출마한 네번의 선거에서 네번 모두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밝혔다. 앞서 일베 인증 때문에 그를 극우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북한 비판과 민주당 지지는 별개라고 선을 긋고, 박근혜 대통령은 23년간의 한국생활중에 가장 무능하고 고집불통이었다고 보며 과거에 보수정당에 몸을 담은적이 없다고 밝혔다. #
    • 다만 탈북자 북송 사건등을 계기로 문재인 정권 중반부 이후에는 문재인 까로 전향한지 오래.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은 계속하지만 대화와 협력은 계속하자는 주장을 하고 특히 북한군인도 주민이라면서 지원에 찬성하는 입장은 현재의 문재인 정부와도 비슷하다. 다만 강명도는 일단 김정은 정권은 무너뜨려야 한다고 본다. 유튜브 방송 내용도 김정은을 주로 까는 내용.

  • 2020년 4월, 평양외국어학원 4년 후배인 태영호에 대한 영상(#)을 올리면서 태영호의 지지선언을 했다. 태영호가 본인의 안위, 권력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을 앞당기고,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출마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태영호가 국회의원이 태영호가 미래통합당 영입제안을 받고 본인에게 문자와 전화로 의견을 구했다고 밝혔다. 또한 해당 영상에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즉, 이념에 따라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기 보다는 사안에 따라 스윙 보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매일 북한을 까는 방송을 하지만, 북한과의 교류는 확대해야 하며 김정은 정권과 분리하여 지원하는데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인생 마지막 희망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기독교 선교사로 활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북한 교회가 가짜이긴 하지만 대화와 교류는 필요하다고 본다고 기독교 진보매체 뉴스앤조이에 출연하여 입장을 밝혔다.

  • 자유조선의 문장을 따와 자신의 유튜브 프로필로 사용한다. 물론 허락은 맡았는지는 불명[4] 아마 탈북자로서 자유조선을 지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기타[편집]


  • 탈북자 고영환과는 평양외국어학원-평양외국어대학 선후배, 그것도 불어과로 과선후배 사이이고, 북한 내에선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선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라고 한다. 탈북자들의 정치 노선을 두고 몇 가지 갈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 이 외에도 앞서 언급한대로 태영호와도 친분이 있다.

  • 먼 친척인 강진석이 김일성의 큰외삼촌인데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 받으면서,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유일한 강진석의 가까운 직계 혈육인 강명도가 가족을 대표해서 훈장을 수령할 수 있다고 한다. 관계도로 보면 10촌으로, 정확히는 강진석의 8촌 동생 강영겸(康永謙)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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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에 있을 때 전처한테서 태어난 1남 1녀와 현재 배우자 중국인 아내 왕금봉씨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출생한 1남 2녀가 있다. 그 중 막내딸은 2010년생이다. 52세에 보았다는 것.[2]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은 회령지방 지주의 첩으로 팔려갔다가 탈출해서 김일성의 부하로 있던 지갑룡의 처로 6년간 살다가 김일성과 배가 맞아 임신하고 나서 김정일을 낳았다. 이 때문에 김정숙의 집안이야기나 친척 우상화는 커녕 누구인지도 교육도 시키지 않는다[3] 김정일이 아버지처럼 대우하는 사람이라 큰 고초는 겪지 않았다고 한다.[4] 자신이 자유조선 소속이라는 언급도 없었고 프로필 사진도 그냥 자유조선 문장에다가 자신의 사진을 대충 합성한 거다. 때문에 그냥 유튜브 채널명에 자유조선 이름만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애초에 자유조선이 비밀결사인 만큼 허락은 커녕 연락을 하는 것 부터가 상당히 고비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