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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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
발생일
2011년 7월 4일
발생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대한민국 해병대 제2사단
8연대 81대대 동검중대 선두소초
유형
살인 사건, 소총 사격으로 인한 사살
원인
기수열외후임들의 하극상과 괴롭힘으로 인한 앙심
인명
피해

사망
4명[1]
부상
2명[2]

1. 개요
2. 상세
3. 사건 진행 과정
4. 피해자
5. 논란
5.1. 부대원들의 부대이탈 (일명 '빤스런' 사건)
5.2. 권 해병을 돕지 않은 선임 해병들
5.4. 엉망인 실탄 관리
5.5. 영내 음주
5.6. 부상자 이송 문제
6. 사건 수사
7. 사건 여파
8. 사후 처리
8.1. 현충원 안장
8.2. 피의자 처벌
8.3. 권 해병에 대한 해병대의 대처 논란
9. 곁가지 사건들
10. 사건 이후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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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11년 7월 4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위치한 해병대 제2사단 8연대 81대대 소속 선두소초에서 주범 상병[3] 김민찬[4]이 동료 해병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해병대원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참고로 편의상 '총기난사'라는 익숙한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범인 김민찬 해병은 그냥 마구 난사한 게 아니라 평소 앙심을 가지고 있던 같은 생활관(B동 2생활관)의 동료 해병대원들을 노리고 그들에게 한 명 한 명씩 차례로 조준 사격한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총격 사건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2. 상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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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2011년 7월 4일 해병대 제2사단 대원들이 지키던 강화도 남단의 해안경계소초에서 일어났다. 범인은 이 부대 소속으로 전역을 9개월 앞두고 있던 상병 계급의 김민찬 해병[5](19)이었다.


3. 사건 진행 과정[편집]


아래는 군 당국의 수사 결과 발표에 의한 사건 진행 과정이다.

2011년 7월 4일 오전 7시 30분, 피의자 김민찬 해병(상병)은 사건 이틀 전 해안초소 경계근무 중 편의점에서 소주 2병을 구입해 창고에 몰래 숨겨둔 것 중 한 병을 마셨다.

오전 10시 30분, 김민찬 해병은 잠이 깨서 나온 정준혁 해병(이병)과 창고에서 만나 대화하면서 "권승혁 해병(일병)[6]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준혁 해병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렸으나, 잠시 후 "소초원들을 다 죽이고 탈영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들은 "지금 죽이자"면서 함께 창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 11시 20~35분 경, 김민찬 해병은 상황실에서 상황병인 L 해병(상병)과 대화를 나누며 기회를 엿보다가 근무자들이 상황실을 비운 틈을 타서 상황실 내 총기보관함과 간이 탄약고에서 K2 소총 1정 그리고 (실탄 75발과 공포탄 3발, 수류탄 1발)[7]이 담긴 탄약통을 탈취하였다. 상황부사관인 H 하사가 고가초소 교대 근무에 투입될 근무자에게 소총을 지급하기 위해 총기보관함을 열었는데 총기보관함을 그대로 열어 놓은 채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상황실을 비웠으며, 상황병인 L 해병(상병) 역시 상황실을 비우자 그 사이에 김민찬 해병은 상황실에 있는 총기보관함에서 병기를 탈취하고 간이탄약고의 탄약통도 들고 나온 것이다. 탄약통의 열쇠는 상황실 근무자인 K 해병(일병)이 열쇠를 조끼 윗주머니에 넣어둔다는 것을 김민찬이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 놓은 조끼 주머니에서 쉽게 꺼낼 수 있었다.

김민찬 해병은 정준혁 해병에게 수류탄 1발을 주고 고가초소를 폭파시키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 40분경, 김민찬 해병은 생활관으로 가서 공중전화 부스 옆에서 이승렬 해병(상병)에게 총격을 가했다.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상황부사관 H하사는 쓰러진 이승렬 해병을 발견해 11시 42분 쯤 119에 신고했다.

한편 당초 범행을 공모했던 정준혁 해병은 막상 총소리를 듣자 겁이 나서 고가초소 폭파를 실행하지 않고 가해자 김민찬을 피해 도망다녔다. 정준혁 해병은 이승렬 해병이 쓰러져 있음을 목격한 뒤 고가초소 근무자에게 이를 알리고 나서 계속 김민찬 해병을 피해 다녔다.

계속해서 김민찬 해병은 부소초장실 입구에서 부소초장 이승훈 하사(25)에게 소총을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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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때 6명이 잠자고 있던 제2생활관으로 들어가 좌측 첫 번째 침상에서 잠을 자던 그가 정준혁 해병에게 제일 죽이고 싶다고 말했던 권승혁 해병(일병, 20)의 가슴에 3발을 발사했으며, 그 다음으로 우측 첫 번째 침상에서 자던 박치현 해병(상병, 21)에게 1발을 쏘았다. 이에 권승혁 해병은 바로 즉사했으며 박치현 해병은 즉사하지 않고 중상을 입은 채 살아 있었으나 나중에 도착한 소방서 구급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호송되던 중에 사망했다.

김민찬 해병은 계속해서 총을 쏘려고 다음 차례인 좌측 두 번째 침상에 누워 있던 권 모 해병(이병)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권 모 해병은 먼저 김민찬 해병이 다른 해병들을 쏠 때의 총소리를 듣고 이미 깨어나 있는 상태였다. 김민찬이 자기 쪽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달려들어서 왼손으로 총부리를 잡아 아래쪽으로 꺾고 오른손으로 개머리판을 잡은 뒤 총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상호간에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으나, 멜빵이 걸려 있는 데다 김민찬 해병이 완강히 버텨서 결국 총을 빼앗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가슴을 밀어서 김민찬 해병을 문 밖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은 다음 침대를 밀어 문을 못 열게 막았다.

전입 온 지 겨우 보름밖에 안 된 권 해병이 목숨 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평소엔 해병 정신을 그렇게 강조하던 방 안의 나머지 생존 선임 해병 세 명은 방구석에서 떨고만 있었으며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나서지 않았다. 권 해병이 총을 뺏지 못한다면 다음으로 총알세례 받을 차례는 바로 자기들일 테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같이 달려들어서 총 뺏는 걸 도와주는 게 당연했는데도 방 안에 있던 선임들은 겁에 질려 바짝 얼어서 꼼짝 못하고 뒷구석에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게다가 권 해병이 이미 총부리를 잡고 밑으로 꺾어서 총구가 아래로 향한 상태에서 뺏으려고 몸싸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민찬이 전방에 총을 맘대로 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바로 방 안쪽에 있던 선임 해병들이 달려들어서 같이 힘을 합하면 어렵지 않게 총을 뺏고 범인을 제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권 해병과 김민찬 해병이 둘 다 양손으로 총을 잡고 서로 안 뺏기려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니까, 즉 범인인 김민찬 해병도 총을 안 뺏기려고 잡고 있는 거 외에는 손을 다른 데 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다른 해병들이 옆에 다가와서 쉽게 그 총의 탄창을 빼고 조정간 안전으로 돌려 놓기만 했어도 사실상 게임 끝이어서 그 다음은 맘 놓고 쉽게 총을 뺏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방 안의 어떤 해병들도 전혀 도와주지 않고 그저 방 구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서 덜덜 떨며 싸움을 보고만 있었다는 건 한심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어찌 보면 후술하는 빤스런보다도 이 부분이 이 사건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선임 해병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 권 해병은 총을 뺏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범인이 아래쪽으로 총을 발사해서 하반신에 총알을 맞고 만다. 만약 1~2명의 도움만 있었어도 권 해병이 중상을 입는 비극 없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총을 뺏으려는 권 해병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김민찬 해병 둘 간의 팽팽한 몸싸움이 계속되던 와중에 아래쪽으로 총이 발사되어 권 해병의 하반신에 네 발의 총알이 스쳤다. 다행히 나 치명적인 부위를 건드리지 않아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한 쪽 고환에 총상을 입었고 뜨거운 총신을 맨손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에 에는 수포가 생기는 화상을 입었다.

결국 권 해병이 피의자 김민찬 해병을 생활관 밖으로 밀어낸 뒤 문을 닫아 잠그고 나서야 쓰러졌고[8] 하체에 피가 철철 나는 것을 깨닫고는 피 흘리는 자신에게 지혈을 해 달라고 주변 선임 해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임 해병들은 지혈 방법을 모른다며 회피하기만 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스스로 옷을 찢어 지혈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후 권 해병의 아버지는 해병대 가족모임 카페에 올린 글에서, '권 해병이 총을 빼앗으려 몸싸움하고 있을 때 뒤에 있던 선임 해병들 중에 한 명만 도와줬어도 총을 빼앗는데 성공했을 테니 권 해병이 총에 맞아 고환이 터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런 한심한 선임들이 그동안 고참이랍시고 권 해병에게 과자를 토하도록 먹이는 등 괴롭히며 전통이니 뭐니 하고 떠들었다는 게 분통이 터진다'면서 해병대 선임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age.fmkorea.com/87e98b47c3981aabf6c92fd7fe59e412.jpg

안녕하세요 전해병대2사단 총기사건때동료들을 구한 권혁이병의 아버지 입니다 너무황당한 일이라 어찌해야할지 몰라도움을 구함니다 사건초기에는 사령관도오고 국방장관도오고 여러명이와서 우리혁이행동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방장관 께서는 큰훈장을 상신하겠다고 약속까지 하고갔습니다

그동안 혁이 치료에 집중하느라 찾아온이들의 말만밎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몾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전부터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가 다됐으니 8월19일 날짜로 퇴원 해야한다고 합니다 지금혁이상태는 허벅지총알관통한 곳은 살이차오르지못한 상태애서 주변의살이굳어지는일이 생겨 어거지로 봉합수술을 해놓았습니다 봉합수술한곳은 우뮬처럼 폐여있는상태구요 팔에박혔던 총알은다행히 잘제거되었습니다

터져버린 고환은 제거한뒤 임시 봉합해놓은상태구요 무었보다 혁이의불안증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밤에잠을 자지못하고 주변에 누가 지나가기만하면 기겁을하고 놀랍니다 병실문을 갑자기 열면 기절할정도로 놀랍니다 이런혁이를 치료끝났다고 부대 복귀해야 한담니다 부모입장에서 자식을 돌보아야하는데 더치료받고싶으면 부모가 자주가볼수도 없는 포항으로가서 치료를받던지 자비로 민간병원에서 치료를받으라고합니다 너무억울해서 훈장은받을수 있는건지 부대에물어보니 불가하답니다 혁이는 국방장관이 한말을 철떡같이믿고 오로지 그위안으로 정신을버티고 있습니다 그런혁이에게 훈장받지못한다고 차마말을할수가없어 감추고있습니다 차라리 그런말이나말던지 혁이가 모든걸알면 정신상태가 더않좋아질까봐 쉬쉬 하고 있습니다 헌병대에서 조사나올때에도 당연히 유공자가 된다고하더니 그것도 않된다하고 날짜가지나 사람들 머리속에서 잊혀지니 이렇게 잔인할수가 없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처음보았을때 아들의 첮마디가 아빠 내가 동료들 구했어 한마디 였습니다

총을맞고 달려들어 동료들을 구하고 피가폭포처럼 흐르는데도 죽어가는 동료 심폐소생술을하고 또다른동료 괜찮으냐고 위로하고 피가너무흘러 정신이 흐려져 살아있는고참에게 지혈을 해달라고 부탁하니 떨면서 꼼작들을 못하고있어서 스스로 옷을걷어 지혈을하고 흐려지는 정신을 가다듬기위해 군가를 부르다 병원으로이송된 이 아이가 국가 유공자가아니면 누가 유공자인지요

차라리 혁이가 총맞고제압하고 죽어가는 동료심폐술하는동안 꼼작않고 대가리처박고 있던 고참들한테 유공자라하던지 훈련소에서 그부대로간지 15일밖에않된 혁이가 그행동을하는동안 고참들의 행동은 한편으론 이해하면서도 자식이 다친곳을보면 괴씸하기 짝이없습니다

한명만이라도 도왔으면 혁이고환이터지거나 하사가 죽는일은 없었을텐데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그런고참들이 우리아이에게 토하도록 과자를먹이고 전통이니뭐니 떠들었다는게 분통이터집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이아이를 군에 다시데려가서 또다른 관심사병을 만들려는건지부모로서는 불안하기짝이없습니다 정말우리혁이가 군에서 작업하다 손가락상처난정도의 사병들과 같은 처분을받아야 하는건지 억울합니다 도와주세요 아는게 없어 하소연할곳이 이곳뿐이라 여러분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부모인제가 어찌해야하는지 고견좀부탁합니다

- 권 해병(이병)의 아버지가 다음카페에 올린 글


그 부대 해병들 중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군인다웠던 사람이 실무(자대) 배치받은 지 보름밖에 안 돼서 가장 해병대 물이 덜 든 권 해병이었다는 게 해병대의 씁쓸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후 김민찬 해병은 생활관 바로 옆의 창고로 이동해서 공모자인 정준혁 해병을 만났다. 정준혁 해병이 약속과는 달리 고가초소를 폭파시키지 못한 것을 안 김민찬 해병은 동반자폭하기 위해 정준혁 해병으로부터 수류탄을 빼앗아 터트렸고 다리, 등,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정준혁 해병은 곧바로 달아났으며, 수류탄 파편에 의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김민찬 해병은 이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낮 12시 15분, 인천강화소방서 길상구급대 임동문 소방교 등 6명이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부상자들을 이송했다.

한편 총격이 일어난 2생활관이 아닌 다른 생활관들에서 쉬고 있던 해병들은 총소리를 듣고는 놀란 나머지 생활관 밖으로 뛰쳐나와서 부대 밖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부대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속옷[9]만 입은 해병들이 소초에서 뛰쳐나와 부대 앞 해안도로와 민가 쪽 등 여기 저기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이 상황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부대원들의 부대이탈 항목에서 서술.

마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해병대는 이 '빤스런' 사건으로 인해 큰 조롱과 굴욕을 겪었는데, 심지어 2022년에는 "바리깡으로 음모 밀고, 유두에 빨래집게" 등 성고문까지 발생해 더욱 이미지가 추락했다. 특히 가해 병사 중 한 병장은 며칠 뒤 전역이라며 또다른 의미의 빤스런을 꿈꿨다. 모병제는 자신의 직장인 만큼 선후임과 계속 얼굴 볼 사이이고 진급을 위해 내부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고 사건이 터지면 짤릴 위험도 있어 후임을 괴롭혀도 적당히 군기 잡는 선에서 괴롭히지만, 어차피 전역일만 채우면 '빤스런'하고 두번 다시 얼굴 볼 일 없는 징병제에서는 '잃을 게 없는' 선임들의 통제가 안 되는 가혹행위가 많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유일한 '영웅'으로서 그나마도 해병대의 자존심을 지킨 용맹한 '권 모 해병(이병)' 역시 토할 때까지 과자 먹이기 등 막장 가혹행위에 시달렸는데 이 사건의 가해자가 동료에게 '전우애'가 아닌 살의를 품게 된 근본 원인도 부대 내의 그릇된 가혹행위였다.


4. 피해자[편집]


총 4명의 해병대원들이 사망했다. 이승훈 하사, 이승렬(상병), 권승혁(일병) 해병 3명은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박치현 해병(상병)은 현장에선 살아 있었으나 강화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은 후 헬기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도중 숨졌다. 박치현 해병은 사고 하루 전이 생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미니홈피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댓글이 줄이어 달렸다.

또한 사망자 중 권승혁 해병은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전 멤버인 은지의 외사촌 동생이고 이승렬 해병은 개그맨 임혁필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10]

그 외에 피의자 김민찬 해병과 김 해병의 총격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권 해병까지 총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권 해병은 하반신에 4발의 총상을 입었으며, 고환에 총을 맞아 병원에서 이를 적출하고 봉합하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한 개만 상실했기에 생식 능력에는 지장이 없지만 PTSD 등의 후유증을 얻었다고 한다.


5. 논란[편집]



5.1. 부대원들의 부대이탈 (일명 '빤스런'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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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인근 민간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소리가 들리자 속옷 차림[11]의 해병대원 여러 명이 소초에서 정신없이 도망쳐나와 부대 앞 해안도로와 민가 쪽 등 여기저기로 뛰쳐나갔다. 이건 분명히 탈영이고 군무이탈이라는 '중범죄'다. 군인은 위난을 피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고 이탈 명령이 있기 전에 도망을 쳐서는 안 되며 위급 상황에서도 군무이탈은 원칙적으로는 처벌받는다.[12]

총소리를 듣고 놀랐을 테니 순전히 인간적인 면으로만 생각하면 달아나는 걸 이해할 만도 하지만 문제는 그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라는 것이며, 그것도 언제든 북한군의 도발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전방 부대 소속이라는 점이다. 국토 수호의 의무를 지고 있던 최전방 해병대원들이 총소리 몇 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도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더더욱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리고 불안하게 만든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해병대는 전국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총격 사건 당시 부대 밖으로 도망친 해병들은 총격이 일어난 제2생활관이 아닌 다른 생활관에 있던 인원들이라서 총격의 목표 대상도 아니었다. 당연히 범행 현장을 보지도 못했고 그저 총소리만 듣고는 누가 쏘는 건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못한 채 무작정 무책임하게 도망간 것이다.

아군에 의한 총격 사건이었기에 망정이지 북한군의 침투 도발이었으면 총소리 몇 방에 부대가 와해되고 북한군에게 영내가 점령당할 수도 있었다는 뜻.

그동안 귀신 잡는 해병대 운운하며 강인함을 과시하던 것을 생각하면 총소리 몇 방에 부대 밖으로까지 도망친 것은 꽤 망신스러운 일인 건 분명하다. 온갖 불필요한 똥군기는 다 잡고 내무부조리만 많으면서 정작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 즉 비상 위급 상황에서 겁먹지 않고 용기를 내서 싸우거나 상황을 정리해서 주민을 안심시켜야 하는 사명감과 군기는 안드로메다로 갖다 버린 셈이다. 게다가 평상시에 해병대 부심에 가득차서 거만을 떨어왔던 그들의 행태와 대조하여 사람들은 이들을 빤스런이라고 부르며 풍자하고 조롱하고 있다.

빤스런과 밑에 나오는 응급처치도 전혀 할줄 모르고 후임해병의 생존을 위한 도움 요청을 외면해 버리는 등 이 사건의 해병들의 행태들은 2010년의 연평도 포격전#혼란 속에서 활약한 해병들 때 북한군의 포격 위협을 무릅쓰고 연평도 주민들을 방공호로 대피 및 대응사격을 진행했고 포탄으로 인한 화재진압을 위해 애쓴 연평부대해병대와 2015년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때 보여준 육군 제1보병사단 대원들의 용감하고 침착했던 대응과도 많이 대조된다. 당시 육군 제1보병사단 대원들은 철책통로에서 갑자기 원인 불명의 폭발이 일어나서 다리가 절단되어 날아가 버렸고 동료 대원들이 그 부상자를 옮기다가 또 폭발이 일어나서 다른 한 명의 대원도 다리가 절단돼 날아가는 무서운 참사가 연이어 일어났으며 순간적으로 북한군 측의 포격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이탈해서 도망가긴커녕 전혀 우왕좌왕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전방경계 태세를 잘 유지하면서 중상자들을 챙긴 뒤 신속하게 후송하고 응급처치도 잘 하는 등 행동수칙에 맞게 흠잡을 데 없이 잘 대응하였다. 이런 신속한 조치 때문에 다리가 절단된 두 군인의 출혈과 감염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었고 차후 회복도 잘 될 수 있었다. 이런 의연한 대응 모습이 감시영상 장비에 찍혀서 언론에 공개되어 그들은 진정한 영웅이 되었고 국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총소리가 들리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해병대원들의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빤스런이란 신조어는 온라인/오프라인에서 해병대 출신자들이 각종 욕 먹을 짓을 했을 때 간단한 한 마디로 놀리기에 좋아서 자부심을 앞세워 다른 출신을 업신여기는 해병대를 깔 때마다 늘상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빤스런이란 단어가 워낙 인기를 얻으면서, 갈수록 단지 해병대뿐 아니라 누구든지 허겁지겁 도망가는 꼴을 조롱하는 상황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결국 해병대 총격 사건 때 해병들이 망신스런 모습으로 군무이탈하여 도망간 모습을 희화화하는 표현으로 만들어졌던 '빤스런'이라는 비하어가 이제는 해병이든 아니든간에 "어떤 상황으로부터 혼비백산하며 도망간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속어가 될 정도로 유명해져 버린 것이다.

즉, '빤스런'이란 신조어는 좁은 의미에선 대한민국 해병대를 비하/조롱하는 표현으로서 과거의 '개병대'라는 오랜 비하 별명을 대체했고 넓은 의미에선 황급히 도망간다는 뜻으로 확장되어 예전의 '줄행랑'이라는 속어를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5.2. 권 해병을 돕지 않은 선임 해병들[편집]


제2생활관에서 두 명에게 총을 쏜 김민찬 해병이 그 다음으로 권 해병의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권 해병이 덮쳐서 총부리를 잡고 아래로 꺾은 뒤 총을 뺏으려고 몇 분간이나 사생결단의 치열한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선임 해병들은 벌벌 떨고만 있고 전혀 도와주지 않아서 권 해병은 총을 뺏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범인이 결국 총을 발사해서 고환 등 하반신에 총을 맞게 되었다.[13]

만약 권 해병이 총을 못 뺏어서 김민찬 해병이 계속 총을 쏘게 된다면 그 다음으로 총알세례 받을 차례는 바로 자기 자신들일 테니까 자기들이 살기 위한 생존본능에서라도 같이 달려들어서 총 뺏는 걸 도와주는 게 당연했는데도 방 안에 있던 선임 해병들은 그저 겁에 질려 꼼짝 못하고 뒷구석에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게다가 권 해병이 이미 총부리를 잡아 꺾어 총구를 아래로 향한 상태에서 뺏으려고 팽팽하게 몸싸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범인 김민찬 해병이 앞쪽에다가 총을 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바로 방 뒤쪽에 있던 선임 해병들이 달려들어서 도왔으면 충분히 총을 뺏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해자 김민찬 해병과 몸싸움을 벌여서 생활관 밖으로 밀어낸 권 해병은 몸싸움 도중 하반신에 총상을 입어서 피를 많이 흘리게 되었고 주위에 있던 선임들에게 지혈을 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선임 해병들이 지혈하는 법을 모른다고 발뺌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지혈을 해야 했다.

지혈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상처 부위에 붕대나 깨끗한 천을 대고 누르는 정도다. 군대 내에서는 목숨이 위험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 데다 상시 군의관이나 의무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최소 당장 목숨은 건지고 의료진과 접촉할 때까진 버틸 수 있는 수준의 기본적인 응급처치 능력을 가르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간단한 지혈 방법조차도 몰랐다는 건 해병대는 군인으로서의 제일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해병대 교육훈련단 훈련 내용 중에 CPR을 포함한 응급법에 관련한 훈련은 분명히 존재한다. 자대 배치 이후의 훈련이 뒷따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구체적인 지혈 방법을 몰랐더라도 상식으로라도 지혈 같은 응급처치는 간단히 할 수 있었다. 도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유사시 군용 허리띠나 침구류 등 지혈대 대신으로 쓰기 좋은 것은 주변에 많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설령 제대로 된 지혈 교육을 못 받아서 지혈 방법을 몰랐더라도 총 맞은 사람이 코 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으면 당연히 달려와서 무엇이든가로 출혈 부위를 막든가[14][15], 상처 부위에서 심장과 가까운 쪽을 묶어 지혈시키는 정도의 상식적인 조치라도 하는 게 당연할 텐데 중상을 당해 쓰러져 피 흘리고 있는 막내를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은 해병대의 참담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보여준다. 어느 해병도 도움을 주지 않고 보고만 있자 중상을 입은 데다가 출혈로 정신을 잃어가던 권 해병이 할 수 없이 스스로 옷을 찢어 지혈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기본 교육조차 안 되어 있다는 문제점 외에도 군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용기와 전우애조차도 제대로 안 갖춰져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가 어렵다.


5.3. 기수열외[편집]


자세한 내용은 기수열외 문서 참조.

그동안 군대 내의 총기사고는 대개 후임이 괴롭히던 선임을 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임이 선임을 괴롭혀서 선임이 후임을 사살했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외에도 이 부대에 대한 악습 실태 조사 과정에서 해병대에서는 해병들 자체적으로 계모임을 하여 휴가 나가는 해병에게 성매매용으로 돈을 몰아주는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해병대 성매매 계 관행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사건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해병대원들을 대상으로 악폐습을 조사하던 중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래 링크는 이 총기 사건을 계기로 해병대의 기수열외와 악습에 대한 실태 조사 결과 밝혀진 사례들 중 하나로, 이 사례의 경우 여자친구가 있는 해병대원이 성매매계에 가입하라는 강요를 거부하자 기수열외시켰다는 부조리가 드러난 사건이다.#

이 외의 각종 해병대 기수열외 사례들도 기사화되었다. 해병대 기수열외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던 중 나온 기사들 중 하나를 첨부한다.#


5.4. 엉망인 실탄 관리[편집]


상식적으로 실탄 관리는 당연히 간부의 몫인데, 이 사건에서 김민찬 해병이 상근예비역에게서 탄약통 열쇠를 훔쳤다는 것. 분대장이었어도 비상식적인데 상근예비역이 실탄을 관리한다는 것이 관례적이라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제대로 된 부대에서는 병이 총기함이나 탄약고 열쇠를 절대 관리하지 않는다. 정상적이라면 중대장&당직사관과 당직부사관에게 모두 보고를 해야만 총기 취급이 가능해지고, 이 과정을 거쳐 총기를 취급할 경우 총기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총기운영대장에 기록도 해야 한다. 만약 목걸이 열쇠꾸러미나 열쇠함의 열쇠 하나라도 분실될 경우 당연히 중대 전체가 쑥대밭이 될 정도로 난리가 난다. 이 정도로 엄중한 감시 속에서 보고 없이 총기함을 열려면 중대장&당직사관과 당직부사관, 여기에 행정반에 있을 상황병들까지 모두 제압하고 열든가 절단기 등을 갖고 와서 자물쇠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 농담이 아니라 가 취침하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일과 중에는 중대장 혹은 (육군의 경우)행보관이, 일과 후에는 당직사관이나 상황실 당직자가 총기함 열쇠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총기와 실탄함을 열어둔 채로 담당 부사관이 고작 담배를 피우려고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이 해병부대의 군기가 얼마나 빠졌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5.5. 영내 음주[편집]


원래대로라면 영내음주는 간부(보통 중대장 이상의 지휘관)의 지휘하에 특별한 날에[16] 한해 엄격히 이루어진다. 보통 병들이 영내에서 술을 구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인데, 김민찬 해병은 술에 취해 있었다. 오전 7시 30분에 창고에서 술을 마셨는데 이 술을 이틀 전 경계근무를 하던 중 몰래 빠져나가 편의점에서 구입했다.# 단순탈영을 넘어 초병의 수소이탈(군형법 28조)이다.

애초에 범죄를 마음먹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술을 사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근무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방관자 혹은 협력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막장스럽지만 이는 형법 이론상 이를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로 범죄 전에 고의 또는 과실로 심신미약 상태를 야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는 심신미약 상태여도 형을 감하지 않는다.[17]


5.6. 부상자 이송 문제[편집]


일부 외과 전문의들은 중상을 입고 사망한 박치현 해병이 곧바로 헬기로 이송돼 1시간 이내에 중증 외상외과 전문의에게 응급수술을 받았더라면 사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해병은 국군수도병원 도착 후인 오후 3시 15분에 공식 사망 판정을 받았고, 국군수도병원 도착 당시 사실상 사망한 상태(D.O.A. / Dead On Arrival)였다.

만일 총격 사건 직후 군이 곧바로 군 헬기를 불러 이송했더라면 1시간 이내에 수술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의료계의 견해다. 사건이 발생한 강화도 길상면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신도시의 국군수도병원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90km이다. 보통 시속 200km로 나는 헬기로 이송하면 30분 정도 걸린다. 헬기가 김포에서 사건 현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포함해도 1시간 이내에 이송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군 당국은 "김포에서 온 헬기는 의료 장비가 장착되지 않아 곧바로 부르지 않았다"면서 "출혈이 심한 박 해병을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수혈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해병이 총상을 입고 2시간 35분 동안 생명이 유지됐는데도 중증 외상외과 전문의로부터 수술을 받지 못하고 사망한 것은 대한민국 국군의 응급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65만명의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 한명의 총상 환자가 2시간 35분 동안 수술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2011년 1월 미국에서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기퍼즈 하원의원은 단 35분만에 애리조나 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로 이송됐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후 육군에서 발생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임병장 사건) 당시에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6. 사건 수사[편집]


초기에는 언론에서 총기난사 사고라고 불렀으나 수사 결과 인위적인 사건임이 드러났다. 네티즌 사이에서 '김민찬 해병은 평소엔 군 생활을 잘 했다'는 증언[18], 전역을 9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총기를 훔칠 정도의 대담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아 부대에 원한을 품고 계획되었던 행동이 아닐까라는 추측, 김민찬 해병이 다른 부대에서 지금 부대로 옮겨온 사람인데 문제가 있어서 온 게 아니냐는 추측만 무성했지만 실상은 훈련소에서 실시한 인성 검사에서 7가지나 되는 정신과적 문제가 제기되었는데도 해병대 측에서 귀가 시키지 않았고 일일정찰 도중 해변에 죽어 있는 물고기를 대검으로 난도질하는 등 김민찬 해병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음이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졌다.

해병대 전역자들은 넷상에서 사건의 원인이 기수열외일 것이라는 의견을 많이 내놓았는데 이는 실제 사건 수사 결과와도 일치한다. 이 사건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 530GP 사건과 달리 '후임'이 '선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반대 양상을 보였고, 김민찬 해병은 구타, 왕따, 기수열외[19]는 없어져야 한다고 직접 진술했다. 사고조사관과 범인 간 필담에서도 마찬가지 진술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었고 후에 기수열외는 없었다고 김민찬 해병 스스로 번복진술했다.#

김민찬 해병의 사물함에서 3페이지 가량의 편지 형식의 메모와 유서 형식의 메모지가 발견되었는데, 자신을 비관하는 내용이었으며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싫다. 문제아다. 나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반항했던 사회성격이 군대에서 똑같이 나오는 것 같다. 선임들이 말하면 나쁜 표정 짓고 욕하는 내가 싫다.

저를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제가 그만큼 문제아였고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진짜 제 심정을 말씀드리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다 끝내고 싶다.

- 김민찬 해병의 사물함에서 나온 메모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민찬은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아 온 인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따돌림에 시달렸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동급생들에게 성적 학대와 상습 폭행을 당했다. 부모와 의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에겐 가정 역시 치유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의 트라우마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20]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힘을 기르기 위해 해병대를 자원했지만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군교도소 교도관들이 입을 모아 "민찬이는 군대에 갔기 때문에 사형수가 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민찬은 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괴롭힘을 당했다. 구타와 욕설은 물론이고 성적 학대까지 수시로 당했다. 7번이나 전출을 요구했지만 모조리 묵살됐다. 그러다 그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김민찬의 인생에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온 날 김민찬이 본 것은 선임들이 자신의 군모에 소변을 담아 놓은 모습이었다. 그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

김민찬 해병은 입대 전 정신과 진료나 정신병력은 없었으나 인성검사 테스트에서 7가지나 되는 정신과적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대에서는 관심사병으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한다.[21]

이승훈 하사가 기수열외와는 겉보기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인다며 이 하사가 사살되었다는 건 김민찬 해병이 범행에 장애물이라 판단해 사살한 것으로 보고 총격 사건 자체가 기수열외로 인한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증거라는 의견이 있긴 하다.# 그러나 김민찬 해병은 이승훈 하사는 사살했지만 소대장인 중위에게는 사살하기는 커녕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난 뒤 수류탄으로 자해를 시도하였다.[22]

피해자 권승혁 해병의 유족들은 기수열외에 대해 부인했다. 권승혁 해병의 아버지인 권형구 씨는 사고의 가해자인 김민찬 해병이 자신의 아들을 상습적으로 괴롭혔으며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성희롱적 발언을 들었다고 아들에게 들었고 거기에 권승혁 해병은 오직 김민찬 해병 하나 때문에 군생활이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사실은 권승혁 해병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시 육군 하사로 복무 중이던 권승혁 해병의 친형도 알고 있었다.#[23]

한편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사건 이틀 후인 2011년 7월 6일 새벽 1시 쯤에 정준혁 해병이 김민찬 해병과 사전에 범행을 모의한 정황을 포착하여 범행공모 혐의로 정준혁 해병을 체포하였다. 정준혁 해병은 구타를 없애기 위해 사고를 친 뒤 탈영하자고 뜻을 모았지만 실제 범행에는 가담하지 않았는데, 합동조사단이 허술한 무기 관리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준혁 해병의 혐의를 파악했으며 가해자인 김민찬 해병이 부대 상황실 내 탄약고에서 총과 실탄을 훔칠 때 정준혁 해병이 자신을 도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조사 내용에 따르면 김민찬 해병이 2011년 7월 4일 오전 10시에서 10시 20분 사이에 상황실 내 총기보관함에서 K2 소총을 훔치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간이탄약고에서 실탄 75발, 수류탄 1발 등을 훔쳤으며 이 과정에서 합동조사단은 정준혁 해병이 김민찬 해병을 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정준혁 해병은 공모혐의에 대해 부인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건을 벌이고 탈영하는 데 뜻을 모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2011년 4월 9일 부대에 배치된 정준혁 해병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부대원들이 정준혁 해병을 왕따시키면서 성경을 태우거나(종교 경전 소각 정도면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사유다!) 담뱃불로 몸을 지지는 등의 가혹행위를 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비슷한 왕따 신세인 김민찬 해병과 평소 친하게 지냈으며 사건 당시에는 김민찬 해병에게 수류탄을 건네받아 근처 감시초소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막상 총소리를 듣자 겁을 먹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포기했다고 진술했다.#, #

이처럼 쉽사리 총기와 탄약이 도난당한 것은 허술한 탄약고 관리 체계 때문이었다. 관리 담당인 상근예비역 김 모 해병이 퇴근시 탄약고 열쇠를 상황실에 반납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근무시에 착용하는 옷에 넣어놓고 퇴근한다는 것을 안 김민찬 해병은 김 모 해병이 퇴근 후 그 열쇠로 탄약고에 침입해 실탄과 총기를 꺼낸 것이다.


7. 사건 여파[편집]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해병대의 총체적으로 무너진 기강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해병대에 대한 폭풍비판이 계속되었다. 다만 이것은 언론에 밝혀진 내용일 뿐이다. 해병대는 이 사건 이후 3진아웃제를 도입해 구타, 가혹행위 등을 추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성공 여부에 관한 논란 또한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해병대 대령의 해병대 운전병 성추행 사건 등 각종 성추행 사건들과 평상시의 제 항로로 멀쩡히 가고 있는 민항기에 사격을 해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가 하면 해병대 소장이 상급자인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중장)을 음해했다가 구속된 하극상 사건까지 연달아 일어나서 해병대가 욕을 먹고 있던 와중에 이 사건까지 터졌다.

디시인사이드해병대 갤러리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기수놀이하던 고정닉들은 대부분 잠수타거나 같잖은 변명을 하다 다구리당해 묻혔고 유입들이 해병대를 까기 위해 대거 유입되어 난장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연대장 민모 대령대대장 한모 중령은 지휘책임을 물어 보직해임됐다.기사

이에 군은 해병대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해 타군에 의한 검열을 시행했다.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 상할 수밖에 없는 조치로 해병대와 아무 접점이 없는 군인들이어야만 해병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장병들은 강도 높은 설문과 심문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암암리에 퍼져 있었던 전통을 빙자한 병영부조리들이 많이 밝혀지게 되었다.[24]

또한 국방부에서는 이번 사고에 직접적인 연루가 없다 하더라도 평소에 정 해병에게 각종 가혹행위[25]를 자행한 선임 해병 4명에 대해서도 구속 수감 조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체벌 자체보다도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이 군에 들어가 바뀐 환경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사실 군대라는 비현실적, 비인격적인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니 이를 논리적으로 볼 때는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문맥상 군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적응하는 아이들이 문제라는 뉘앙스를 풍겼고, 더불어 똥군기 가해자들이 벌인 폭행, 협박 같은 범죄체벌이라는 합법적인 용어로 포장해 준 점, 더군다나 근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자유롭게 자란 환경이 문제라면 사회를 북한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는 점 등 이래저래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할 만한 발언은 아니었다. 거기다 군 통수권자의 입장에서(그것도 본인은 병역면제자) 이러한 발언을 하니 대중들에게 더더욱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에 청와대는 앞뒤가 잘려 기사가 나가서 표현이 달라졌다고 해명했다. 긴말할 것 없이 그냥 기사로 확인하고 알아서 개인이 판단하길 바란다.#1, #2

심지어 해병수색대 대원조차도 해병대의 한심한 현실을 깠다. 그리고 댓글에는 여지없이 수색대라고 까는 해병대의 댓글이 달렸다. 해병수색대와 해병대는 이 사건이 아니라도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해병수색대도 딱히 가혹행위 수준이 낮은 데가 아니라서 그냥 수색대 출신이 일반 해병들을 디스하고 싶었을 뿐인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육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해병대도 여전히 가혹행위가 척결되지 않았음이 속속 밝혀졌다.#

이 당시 해병대사령관이었던 유낙준은 국방부와 국회 국방위원회 등에 불려다니며 해병대의 후진적인 군 문화와 군기문란 실태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꾸지람을 듣는 등 고생하다가 결국 문책성 사임을 해서 군복을 벗었다. 이후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2016년에 정계에 도전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남양주시 갑 새누리당 후보에 도전하였으나 새누리당 후보 결정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같은 당 심장수 예비후보에게 큰 차이로 패해서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8. 사후 처리[편집]



8.1. 현충원 안장[편집]


국방부는 사망한 4명에게 1계급 추서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였다.# 당연히 비판이 나왔다. 사망자들은 어쨌든 가해자 김 해병을 괴롭히던 사람들이었고 총격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저런 대우를 해 주냐는 것.

8.2. 피의자 처벌[편집]


피의자인 김민찬 해병은 김포 우리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은 뒤 국군수도병원을 거쳐 국군대전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바로 구속 조치되어 수사에 들어갔다. 같은 부대원들도 죄다 헌병대로 불려가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조사를 받았다.

이후 재판 결과 김 해병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김민찬이 가혹행위를 당한 것을 상당 부분 인정했지만, "비정상적이고 고질병적인 해병대 문화와 허술한 총기관리 실태는 양형의 문제로 해결할 부분이 아니다"라며 사형을 확정했다. 한편 정 해병에게는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며 2013년 1월 24일 대법원에 의해 판결이 확정되어 국군교도소대한민국 법무부 소속 일반 교도소[26]에 수감되었다. 정 해병은 2011년에 구속되었으니 2021년에 출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사형이 확정된 군 사형수는 김 해병을 합쳐 총 4명(육군 3명, 해병대 1명)으로 나머지 3명은 530GP 사건의 주범 김동민과 1996년에 역시 총기난사로 3명의 육군 병사를 살해한 김용식,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임도빈이다. 이들과 정 해병은 6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을 경우 병적에서 제적된다는 병역법 3조에 따라 병적에서 제적되었다. 다만 군인 신분일 때 형을 선고받았으므로 총살형을 집행해야 하기에 집행 명령이 나올 때까지는 민간인 신분이 되었더라도 법무부 교도소가 아닌 총살이 가능한 유일한 시설인 국군교도소에 수감된다.


8.3. 권 해병에 대한 해병대의 대처 논란[편집]


김 해병을 문 밖으로 밀어내어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은 권 해병은 허벅지 총상은 물론 고환 한쪽까지 적출하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데다 PTSD 증상까지 보였지만 국방부는 2011년 8월 19일 권 해병에게 국군수도병원에서 퇴원하여 부대로 복귀하라고 통보했다.[27]

그리고 해병대사령부는 한창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엔 '영웅'이라면서 훈장 추천이나 포상을 해 줄 것처럼 공언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수 없다, 불가하다며 발뺌을 했다.

국방장관이 와서 훈장을 주게 했으니 준다고 했는데, 넌 장한 일을 했고, 그래서 그런 말로 아이를 위로를 했고, 우리 혁이도 굉장히 위안을 받고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안됩니다. 법이 이러니 안됩니다. 훈장은 무슨 훈장입니까. 이렇게 나오니까, 지금 혁이한테 내가 그말을 못했어요.


권 해병의 공과 희생에 대한 무관심을 해병대 스스로 인증한 셈이다. 해병 예비역들조차 이해해주지 않았는데, 중상을 입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의병전역을 요청한 것만 보면서 '장한 일을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꾀를 부리면 안 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권 해병은 새 근무지인 해병대사령부로 복귀한 이후 한달 남짓 지난 9월 19일 PTSD 증세가 심해져 국군수도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2011년 12월 31일, 권 해병은 의병 제대가 결정되었으며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총상의 후유증과 PTSD는 낫지 않았다고 한다.관련 기사. 기사에서는 의가사 제대로 잘못 표기되어 있으나 의병제대가 맞다.

이후 2012년 2월 22일, 권 해병은 보국훈장 광복장 수여와 함께 일병 계급으로 의병제대하였다.# 모 해병대 카페에서 기사 속 사진의 권 해병의 머리가 길다고 까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애시당초 생사가 오가는 절체절명의 경험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게 된 데다 해병대사령부의 홀대까지 겹쳐 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다. 당장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고통을 받은 상황에 머리 길이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해병대사령부에서도 권 해병의 정신이 불안정한 점 등을 감안해 굳이 이발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군이나 경찰 등의 조직에서 근무하다 PTSD에 걸리게 되면 심할 경우 그 조직의 상징물(군복 등)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발작 등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해병대원의 상징인 이른바 상륙돌격머리를 강제하는 것으로도 권 해병이 PTSD 증세를 보일 수 있기에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 해병대사령부는 욕먹을 일이 아닌 현명한 조치를 한 것이다.

제대 후 권 해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10여년 후인 2023년 올라온 사형제 관련 기사에서 김민찬도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논조가 흘러가자 분노하는 댓글을 단 것이 알려졌다.[28]

9. 곁가지 사건들[편집]


  • 사건 바로 하루 전날인 2011년 7월 3일에 총격 사건이 일어난 부대인 해병대 제2사단 소속의 이병이 자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유족들은 선임들이 옷을 벗기고 성추행과 갖가지 모욕을 줬고 나라사랑카드를 긁게 해서 먹을 것 등을 강탈했으며 군번을 도용해 전화를 거는 등의 갖가지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방부에서는 구타는 없었다고 부인해 논란이 되었다.

  • 그리고 사건 발생 며칠 뒤인 7월 10일에는 포항에 위치한 해병대 제1사단에서 병 1136기 정 모 해병(일병 / 1991년생)이 또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은 해병대에게 지옥 같은 한 해가 되었다.[29] 정 모 해병의 동생이 작성한 글


  • 간접적으로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과도 사소한 접점이 있다. 당시 군인팀 상주 상무에는 소속 GK 4명 중 3명이 승부조작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느라 주전 GK 권순태 외에는 GK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남은 주전 GK도 출전정지 상태였다... 즉, 상주상무에는 GK가 아무도 없었단 얘기. 때문에 상무 구단은 전 군을 털어서 GK 경험이 있는 사병을 물색했고 마침 수원 2군 GK인 권기보가 당시 현역병 상병으로서 복무 중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연맹의 유권해석까지 모두 받아내고 권기보의 차출을 준비했으나, 차출 직전 바로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군에 특별조치가 떨어져 결국 권기보의 차출은 무산되었고 필드 플레이어를 출전시켰지만 기본적 룰조차 몰라 내려놓은 공을 다시 잡는 등 부실했다.[30]


10. 사건 이후[편집]




  • 육군교도소에서 김민찬을 만났다는 사람을 인터뷰한 영상[31]이 있다.

  • 본 사건의 추모비가 동검도에 위치한 중대본부에 세워졌다.

  • 이후 사건이 발생한 '선두소초'의 부대원들은 각기 다른 부대로 뿔뿔이 흩어졌고 소초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병영문화혁신'의 일환으로 당시 사건이 발생했던 제2생활반(당시 해병들의 팔각모, 일부 개인물품들마저도 그대로 보존되어있었다!), 부소초장실, 김민찬 해병이 자폭하며 녹아내린 온실 잔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병영악습으로 인해 사단 군기교육대(영창)에 수감된 해병들의 견학처로 이용되어 왔다가 2021년 10월 기준으로 필요성 등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 배우 김호창의 예명이 해당 사건의 가해자 이름이랑 똑같은데 이 사건의 영향인지 푸른거탑 시리즈 촬영 때부터 거의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 김민찬의 동생은 2017년 해군 만기전역을 했다고 알려졌다.


1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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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장에서 부소초장 하사 이승훈, 상병 이승렬, 일병 권승혁이 사망했고 생활관 내에서 총격을 받은 상병 박치현은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 이들은 사건 이후 각각 하사→중사, 상병→병장, 일병→상병으로 1계급 추서되었다.[2] 권모 해병(이병, 하반신 총상 및 손 화상) / 범인 김민찬 해병(상병, 수류탄 자폭 시도로 인한 파편상)[3] 당시 계급[4] 해병대 병 1122기[5] 병들을 계급명이 아닌 '000 수병(님)'이라 부르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해병대도 해병대 병을 부를 때 계급명 대신 '000 해병(님)' 하는 식으로 부른다. 관등성명 등 계급이 앞으로 올 때만 계급과 이름을 함께 부른다.[6] 여담으로 나인뮤지스 은지의 외사촌동생이라고 한다.[7] 경계용 탄통[8]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긴박한 싸움 상황에선 아드레날린이 엄청나게 분비되고 초인적인 생존 본능이 발휘되기 때문에 통증도 그 순간엔 안 느껴지고 자기가 부상을 당했는지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위험한 상황이 지나가고 극도의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야 통증과 출혈 등 몸 상태가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다.[9] 정확히 말하면 속옷은 아니고 해병대 하계 체육복의 하의로 입는 짧은 트렁크식 숏팬츠(해병대에서는 일명 '각개빤쓰'라고 부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해병대 출신들도 꽤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굴욕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만 입고 감히 부대를 이탈해 민가로 도망친 건 사실이니까.[10] 임혁필 또한 해병대 출신이다. 같은 해병대 출신인 만큼 더욱 마음이 찢어질 만하다.[11] 주민들은 증언에서 속옷이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속옷이 아니라 하계에 생활관 등 영내에서 평상시 쉬거나 운동할 때 입는 짧은 트렁크 형태의 체육복 숏팬츠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해병들이 많다.(해병들은 이 숏팬츠를 '각개빤스'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강화도 해병부대 주변에서 살아 오며 해병들을 늘 봐 왔던 부대 인근 주민들이 해병대 반바지와 속옷도 구별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속옷이 맞을 것이라는 주장도 여전히 있다.[12]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침몰하는 함선에서 퇴함 명령이 내리기 전에 배를 벗어난 승조원들은 일단 사람 생명은 구해야 하니 똑같이 구조를 했지만 그 뒤 재판에 넘겨 처벌했다.[13] 다만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한쪽 고환에만 총상을 입어 고자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14] 이 정도만 해도 생존확률을 대폭 높일 수 있다. 물론 피격 부위가 어디냐에 따라서 생존율이 천차만별이겠지만.[15] 일례로 미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칼부림 난동을 벌이던 남성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던 백인 남성이 무차별적으로 난도질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해당 장소에 있던 경찰은 바닥에 피가 흥건한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고 결국 전문적인 의무교육이나 간단한 응급처치를 배워 본 적도 없었던 흑인 남성이 휴지로 지혈을 해 주었는데 결국 해당 백인 남성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졌다. 물론 휴지로 지혈을 했음에도 살아날 정도였으면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휴지를 쓰든 소독붕대를 쓰든, 아니면 아예 맨손으로 누르든 '출혈부위를 꾹 눌러준다'만 성립하면 지혈은 잘 된다. 세균 감염된다고 거즈 쓰고 그러는 건 과다출혈로 죽지 않은 다음에 신경쓰면 되는 문제이므로 위처럼 바닥에 피가 흥건하고 피 웅덩이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체온을 피해자가 직접 느낄 정도의 상황이면 일단 휴지든 뭐든 써서 지혈만 시키면 된다.[16] 회식을 하는 날이나 말년들의 전역 전날 밤 간부들이 그간 고생했다며 한 잔 준다.[17] 이런 음주 관행은 사실 해병대뿐 아니라 육군 등 타군에서도 민가 인근의 일부 소부대에선 간부의 묵인 내지는 동참 이 있거나 몰래 들여오는 형태로 암암리에 남아 있다. 특히 초소나 검문소가 마을을 지나가야 도착할 수 있는 경우는 동선에 따라 동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등에 들러 기호품 등을 사는 것을 간부가 일일이 통제하기 어렵고, 군 생활의 고단함과 비정상적인 처우로 인한 병들의 불만도 잠재울 겸 알고도 묵인해 주거나 아예 대놓고 돈 주면서 오가는 길에 뭐 좀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18] 휴가 중에 싸우는 학생들을 잘 타일러 경찰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19] '구타도 없어져야 한다'라는 주장을 참고해 보면 '구타가 가미된 기수열외'인 가능성이 높다.[20]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21] 증언으로 보아 범행 직전 감경을 고려해 음주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음주의 목적이 마냥 감경이 아니라 맨 정신으로 범행을 저지르기 힘들어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음주로 인해 감경이 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감경이 된다고 한들 사람 5명을 죽인 것은 매우 큰 중죄이기 때문에 감경이 되든 안 되든 최고형벌인 사형을 면하기는 힘들다. 또한 감경을 바라는 사람이 굳이 수류탄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어차피 들킬 게 뻔한 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굳이 감경을 위해 음주를 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정말 감경을 원해서 사형을 면하고자 했다면 여러 명이 아닌 자신이 평소에 원한을 졌던 권승혁 해병만 죽였을 것인데 권승혁 해병 외에도 평소 원한도 없던 사람 여러 명을 죽인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22] 해병대에서 소위 중위는 병사들에게 사람취급도 못받는게 현실이기 때문으로 보인다.[23] 권 해병 유족들의 증언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기수열외를 당했을 가능성도 점쳐 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김민찬 해병이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기수열외가 정당화되지는 않으며, 마찬가지로 부대 내에서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한 가해자 김민찬 해병의 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24] 이후 영창에 가려면 대기표를 뽑아야 된다는 말까지 돌았다.[25] 정 해병의 성경책 소각하기, 정 해병이 전투복 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정 해병의 바지에 살충제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 붙이기 등등.[26] 정 해병은 징역 1년 6월 이상을 받은 경우로 복무 부적합자로 분류되기에, 전역 처리되어 민간인 신분이 된 뒤 법무부 소속 교도소로 이감됐다.[27] 징병검사에서 고환에 손상이 있을 경우 6급 병역면제(민방위 포함 완전 면제) 판정을 받지만 현역 복무 중 의병전역 기준에는 고환 손상에 관한 조항이 없다. 가끔 병무청 의사들이 진단서 들이미는 신검자에게 차라리 입대한 다음에 의병 전역을 하는 게 쉽다고 사탕발림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의병 전역은 정말 심각한 중증 장애나 어디 팔다리 하나 날아가는 등 누가 봐도 당장 전역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아니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간단히 생각하자. 처음부터 안 가는게 쉬울까, 일단 들어간 다음 나오는 게 쉬울까? 민간인 신분은 군인 신분보다 우월하다.[28] "권혁입니다.기자님들 제가 누군지 아시죠? 정상적인 기사입니까? 저는 실무배치받은지 한달만에 저 사형수덕에 몸에 구멍이 세개가 나고 병원에 6개월을 누워있었습니다. 피해자 저 포함 유족생각하신다면 기사 내려주세요 ptsd옵니다." (네이버 기사), "민찬아 나는 실무배치 받고 한 달도 안됐었다. 나한테는 왜 총쐈냐. 너 때문에 몸에 구멍만 3개야. 그리고 기자님 정상입니까? 예?" (한국일보 기사원문)[29]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1사단 복무자에 따르면 해당 해병은 선임의 성매매에 대해 안 좋게 말하다가 기수열외를 당해 전 부대원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장애가 있는 어머니에 대한 인격 모독을 2달간 버티다가 자살했다고 한다.[30] 골키퍼가 내려놓은 공을 다시 잡으면 간접 프리킥이다.[31] 참고로 이 영상에서 김 상병이 아닌 김 일병이라고 잘못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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