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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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契

파일:E6k6ozDVUAgqK1X.jpg [1]

1. 개요
2. 설명
3. 매체
4. 알려진 인물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검계(劍契)는 조선시대범죄 조직으로 어느정도 오래됐는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숙종 시기 이후로 기록이 발견된다.

막장도로 따지면 현대의 조직폭력배나, 마피아 이상가는 묻지마 범죄 집단이었다. 서얼이나 중인 등 관직을 통한 출세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주 구성원으로, 원래 장례를 위한 향도계(香徒契)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항상 을 차고 다니는 집단이라 검계라 불렸으며, 홍동계, 계라고도 불렸다.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집단으로는 살주계(殺主契), 살반계(殺班契), 살약계(殺掠契) 등이 있다. 이쪽은 노비를 비롯한 피지배층 /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주인이나 양반, 부패한 부자 등을 죽이고 일가를 약탈, 아녀자강간하는 것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일종의 조폭 집단이었다.

2. 설명[편집]


조선은 과거 고려 말 시기서부터 당시까지 정변중심에 있었던 군이 왕실문민정부에 의해서 견제받아왔고, 이로 인해 당시의 군과 밀접히 연관된 무(武)를 유희거리, 혹은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단련하는 수단 등으로 취급하는 풍조를 띠며 경시하게 되었다. 정신 수양의 성격이 있는 국궁이나 놀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씨름, 택견 정도를 제외하면 민간에서 단체로 무술을 연마하는 것도 인기가 없었던데다 역적 반역 모의 등으로 이미지도 영 안 좋아서 명맥이 끊기기 일수였다.

그런 사회 속에서 이들 검계는 거꾸로 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숭상하는 풍조를 주장했다 한다. 그러나 무를 숭상한다는 어떤 철학이나 이념을 가진 것이 아닌, 강한 살인 기술과 힘을 숭상했다는 정도로 해석된다. 옷차림 등이나 관료에 대한 테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한 반사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포검, 죽장도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칼들을 가지고 수시로 칼부림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몸에 칼자국이 없는 이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흉폭한 자는 자해를 하는 것을 자주 보여줬다. 이 칼자국으로 색출해 대거 체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특히 옷차림이 특이했는데, 정상적인 옷차림을 거부하였다. 비단옷 위에 허름한 옷을 걸치고 다니고, 얼굴을 가리는 높은 삿갓을 눌러쓰고, 눈 부위에 구멍을 뚫어 보고 다녔다고 한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비가 오면 가죽신을 신었다. 주로 기루에 머물며, 살인, 강도, 약탈 등을 일삼아 나라에서 골칫거리로 생각했다.

검계 중 일부는 주막이나 기생집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질이나 돈놀이로 제법 돈과 위세를 부렸다고 하는데 이런 폭력배들은 단순 살육 집단인 검계와 구분해서 '왈자'라고도 불렀다. 현대만 해도 한국 내의 사창가들은 조폭들이 관리했었는데, 사창가를 관리하는 조폭들은 왈패로 불리기도 했다. 간혹 지하철의 앵벌이들 중엔 어린시절에 사창가에서 키워지던 중 왈패들한테 쫓겨난 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았다며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쪽지를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 왈패가 이 왈자에서 유례된 걸로 보인다. 보다시피 검계는 현대의 조폭과 하는 짓이 아주 똑같다. 왈자 중에 이름이 남아있는 인물로는 이양원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불한당 패거리이긴 하지만,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닌 이들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 9년의 기록을 보면 검계의 암살자로 추정되는 이가 훈련대장 장붕익(1674-1735)을 암살하러 들어왔다 들켰는데, 만 환갑의 노인인 장붕익이 직접 검을 휘둘러 공격했으나 붙잡지 못하고 벽을 타넘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상이 이르기를,

“훈련대장은 앞으로 나아오라.”

하니, 장붕익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승지가 한 말을 들었는데 너무나 놀랍고 해괴한 일이니 당시 사건의 정황을 낱낱이 진달하라.”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그저께 저녁에 군호(軍號)를 반포한 뒤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소신이 자고 있던 방 안의 옆문 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어 보려다가 도로 그만두었는데 다시 바깥쪽 창밖에 달빛이 희미한 가운데 어렴풋하게 사람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 도적이 들어왔다 싶어 베갯머리에 있던 환도(環刀)를 집어 들고 크게 소리치며 창을 열고 튀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검을 잡고 마루 위에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뛰어내려서는 섬돌 위에 그대로 서서 검으로 신을 향해 공격하였습니다. 신 또한 검으로 맞서서 그렇게 서로 치고받다가 바깥문까지 이르자 그놈이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어서 가 버렸습니다. 신이 그때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성을 내며 외쳤으므로 바깥방에서 자고 있던 아들[2]

과 종들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나와 보았지만 이미 미칠 수 없었습니다. 입번(入番)한 장교들도 모두 문밖에 모여들었으나 바깥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에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소신이 갖고 있던 검이 꽤 좋은 것이었는데 칼등 쪽 여러 곳에 칼날끼리 부딪친 흔적이 있었으니 도적의 검 역시 좋은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의 용모는 키가 어떠하던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몸은 보통 사람보다 키도 작고 왜소했으며 수염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복색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머리에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색깔은 구별하지 못하겠으나 흰털은 아닌 것 같았으며, 몸에 걸친 명주옷은 무릎까지 오고 행전(行纏)을 차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들어온 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문을 닫기 전에 미리 잠입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이 아니다.”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마루 옆에 두고 날마다 쓰는 놋그릇이 가치가 수십 냥은 나가는데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검을 지니고 온 자가 어찌 의도가 없겠는가.”

영조 9년(1733) 5월 12일, 선정전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취로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문신들의 한어 학습, 아동 교육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본래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시절 소론노론을 축출하는 신임옥사가 일어났고, 장붕익도 이 당시 노론의 일원으로 연루돼 유배당했다가 영조 즉위 후에 복귀한 상태였다. 경종 말년에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이자 영조의 정적 김일경당파였다. 영조가 즉위 후 준소를 상대로 보복할때 이들의 군권을 빼았고 대신 낙점한 인물이 장붕익이였다. 한편 윤취상은 김일경과 함께 처형, 김중기는 이인좌의 난반군에 동조한 정황이 있어 주살, 그나마 이삼만이 완소로 전향하고 이인좌를 토벌하는 등 처신을 잘해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들의 장기 중 하나가 담 뛰어넘는 것인데 민속촌이나 한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의 담장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벽을 단숨에 타넘었다는 것을 봐서는 체력도 아주 강하고 몸도 매우 날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도선수들이 자기 키만한 높이를 서전트 점프로 거뜬히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검계 중 상당수가 의금부 나장이나 궁궐무예별감 같은 하급 무인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검계는 아니였지만 조선 전기의 인물 유자광이 출세하기 전 궁궐을 지키는 하급 무사였는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 담장을 훌쩍 넘어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소싯적 서얼이라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고 주색에 몰두해 망나니짓을 했다. 하는 짓으로 봐서 검계라 써붙이고 다니진 않았지만 전신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다.

위에서 언급한 숙종~영조 대의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은 검계의 행패를 묵과하지 않아 군사를 풀어 행패 부리고 다니는 검계를 잡아다가 모조리 죽였기 때문에 당시 검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후대의 인물 이규상이 쓴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에는 도입부부터 장붕익의 위용에 대해 찬양한 대목이 있다. 한 검계 깡패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장군 중 이완, 류혁연[3], 신여철[4], 김석주가 있는데 장붕익은 그들 이상이니 알아서 기라고 훈계한다.

검계의 일원들은 모두 몸에 칼자국이 있었고, 자기들끼리도 칼자국이 있냐 없냐로 신원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붕익은 칼자국 있는 사람들을 죄다 잡아들여 족쳤다고 한다. 단순 가담자들은 발뒤꿈치의 힘줄, 즉 아킬레스건을 잘랐다고도 하는데 죽이는 것이나 진배없다. 당시 검계 두목이었던 표철주도 장붕익을 두려워해 한양에서 달아났다가 장붕익이 죽은 1735년 이후에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한양으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그나마 표철주도 영조가 아직 왕세제일 때 호위별감으로 모신 인연 때문에 끝까지 추적받지 않아 살아남은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영조 대에 이르러 남김없이 소탕되어 대부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막장화가 되는 순조 대에 와서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리 조직원 개개인의 전투력이 높고 강령 맞추고 폼잡아도 공권력이 멀쩡한 국가가 때려잡으려고 작정하면 버틸 수 있는 조폭 집단 따위는 없다는 예시 중 하나.

특히 살주계(殺主契)라는 노비들이 결성한 주인들을 죽이자는 비밀결사와 결합, 혹은 그 멤버들이 검계로 유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검계의 행동 강령인 양반을 죽이자나 부녀자를 강간하자는 강령이 살주계의 그것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물론 살주계나 검계나 포도청에 걸리면 박살 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살주계는 일종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체제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제보가 있을 시에는 검계보다 우선 대상이었다.

의외로 이들의 후계 조직으로 추정되는 비밀결사 조직인 검계단은 일본 제국의 조선 지배에 맞서 저항 활동을 벌였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

3. 매체[편집]


시대극 추노에 나오는 '노비당'이 검계와 가장 유사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스케일이 문제지 상술한바와 같이 완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극 동이에서 검계라는 조직이 직접적으로 거론된다. 최동이가 검계 수장 최효원의 여식이라는 설정이다.

천일야사에서도 이들의 이야기가 무려 두차례나 다루어졌다. 2018년 11월 12일에 방영한 99회와 2019년 10월 29일에 방영한 149회.

국산 인디게임인 Library of Ruina에서 이들을 모티브로 한 동명의 조직이 등장한다. 아트북을 보면 스토리 출연이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종의 이유로 미등장하고 게임 내에서 뒷설정을 푸는 역할인 핵심 책장의 이야기도 매우 짧아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Library of Ruina/책장/검계 참조.

동 제작사의 모바일 게임 Limbus Company의 검계 인격 관련 묘사를 봐도 분위기는 역사 속 검계와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모였다고 하며, 위계질서가 그리 빡빡하지 않은 점조직 형태이고, 그냥 살인을 잘 하는 조직원을 '살수'라고 치켜세운다. 스킬명에 찬, 자, 격, 요격세 등의 조선세법 관련 용어들을 집어넣어서 한국풍 느낌이 난다. 심지어 군인도 아닌 뒷골목 조직 주제에 환도 띠돈 패용도 철저하게 한다. 아마 헐렁헐렁한 자신들의 소속과 연결고리를 나타내는 유일한 물건이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봄툰 BL웹툰 눈에 범이 서리다의 주인공 안금후가 검계로 나오며 수원에서 검계들을 사병처럼 거느리고 있다. 서얼이나 중인들로 이루어진 역사속 검계와는 다르게 안금후는 양반이고 안금후의 검계들도 이름만 검계인 안금후의 사병이다.

4. 알려진 인물[편집]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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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2] 장태소(張泰紹, 1693 - ?). 장붕익 사후 포도대장, 수원부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했다.[3] 숙종 시기 무신. 이순신의 부하이자 삼도수군통제사 류형의 손자로 남인 세력들의 군권을 뒷받침한 인물이다.[4] 역시 숙종 때 무신. 반정 공신신경진의 손자. 이쪽은 서인의 무력 뒷바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