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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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nica(스페인어)/Gernika(바스크어)

1. 도시
1.1. 게르니카 폭격
2. 그림


1. 도시[편집]


스페인바스크 지방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15,000명 정도다. 현재는 이웃한 마을인 루모(Lumo)와 통합해 정식 명칭은 게르니카루모(Guernica-Lumo)다.


1.1. 게르니카 폭격[편집]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스페인 제2공화국 세력권이었던 게르니카에 가한 폭격이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의 우익 진영과 공화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선거로 정당하게 집권했음에도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진영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고 수많은 스페인 주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하며 전쟁을 벌였다. 이 무렵 유럽 전역에는 경제난의 여파로 인해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피카소도 이 내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 나라의 다른 지식인들처럼 피카소도 공화파에 가담했다. 피카소는 직접 내전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공화파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전 중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큰 돈을 쉽게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전 기간에 피카소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아마 ‘게르니카’라는 그림일 것이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1937년 6월 프랑스는 세계 박람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52개국이 참가하게 될 이 박람회에는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공화파는 피카소에게 박람회장에 전시할 그림으로 에스파냐의 현실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구상하던 중 신문을 통해 참혹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프랑코를 지원하여 파견된 독일 군인들 중 독일 공군 출신의 의용 군단 '콘도르 군단'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폭탄을 퍼부었다는 것이었다. 이 폭격으로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은 평화로운 마을 게르니카는 불과 네 시간 만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하필 이 날이 시장이 열려 한창 장사 중이던 장날이라 많은 주민들이 시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더욱 커졌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150~166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자 피카소는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지 약 한 달 만에 7.5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을 완성한다. 이 그림이 바로 ‘게르니카’이다. 때로는 몇 천 마디의 말, 몇 백 권의 책보다 단 한 점, 약 21 제곱미터의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 광기를 입체파 화풍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전쟁의 잔인함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


2. 그림[편집]


파일:external/www.pablopicasso.org/guernica3.jpg
게르니카

Guernica

화가
파블로 피카소
국가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제작
1937년
사조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종류
전쟁화
기법
캔버스에 유화
크기
349.3cm × 776.6cm
소장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파블로 피카소의 1937년 작품.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었다. 초현실주의와 후기 입체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모더니즘 양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1937년 5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1월에 스페인 공화정부 사절단이 피카소를 직접 방문하여 그 해 열릴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했고 당시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의 승낙으로 게르니카가 그려졌다.

보러가기

사진만으로는 느끼기 어렵지만 가로 7m, 세로 3m가 넘는 상당한 대작이다. 그래서 피카소 역시 게르니카를 그릴 때 붓이 아닌 롤러로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한 독일군 장교가 "저거 당신이 그린 건가?"고 따지자 피카소가 "아니, 당신들했지"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1] 한편 이 그림에 대해 평론가들이 '황소는 전체주의, 말은 핍박받는 스페인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내놓자 피카소가 "소는 소고 말은 말이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이후에 이어진 말이 더 있으나 어떤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이들은 학살을 당한 짐승들일 뿐이다. 나에게는 그게 전부다."라고도 알려져 있다. 뭐가 됐든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림이자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린 반전(anti-war)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첫 공개 후 작품은 프랑코 독재 정권 하의 스페인에서 전시할 수 없다며 피카소가 반대해서 뉴욕 현대 미술관에 대여 형태로 전시했다. 피카소는 92세까지 장수했지만 프랑코도 천수를 누리는 바람에 피카소 생전에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되돌아오지는 못했고 스페인이 민주화된 후 피카소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보존 문제로 1992년부터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Museo de Reina Sofia)에 소장·전시 중이다.

스타워즈 클론전쟁 3D 애니메이션에서 패러디가 나온다. 다스 시디어스다스 몰이 싸울때 배경으로 등장한 그림은 여지없이 게르니카의 판박이. 오른쪽 총을 든 트루퍼와 칼을 든 보바 펫 구성을 살펴보면 6.25 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도 패러디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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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어 das machen은 이것을 만들다/무엇을 하다 중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혹은 '게르니카'라는 작품이 나온 배경이 나치 콘도르 군단이 마을을 폭격한 것이었으니, 나치가 그린 것과 다름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