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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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진흥법 제2조 (정의) ①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문화예술”이란 (중략) 게임, 애니메이션 및 뮤지컬 등 지적, 정신적, 심미적 감상과 의미의 소통을 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 또는 타인의 인상(印象), 견문, 경험 등을 바탕으로 수행한 창의적 표현활동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2022. 9. 27 추가>


여러분은 만화가 고급 예술이 아니었던 시절을 기억할 겁니다. 그냥 애들이나 보는 거였죠.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다 기념비적인 《》가 나왔고, 《왓치맨》,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작품이 말했죠. "어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 써." 어느 것 못지 않게 강하고, 섬세하고, 고취적이고, 활기찬 매체가 여기 있다고. 그리고 만화가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중략)

게임의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에게 미디어의 통로에 마음을 열라고 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면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과거 많은 예술과 매체가 무시받았지만 가능성이 오늘날의 작품들이 있게 한 겁니다.

-

- Nostalgia Critic, '게임은 예술인가?'에서. 원본(유튜브)[1]

1. 개요
2. 현황
2.1. 게임의 영향력 확대
2.2. 게임 규제
2.3. 게임계의 문제
2.4. 게임 관련 연구 확대
2.5. 게임과 예술 사이의 관계 현황
2.5.1. 해외의 사례
2.5.2. 국내의 사례
2.5.3. 일반인들의 인식과 반응
3. 논의거리
3.1. 예술이란 무엇인가?
3.1.1. 예술은 놀이인가?
3.1.2. 예술은 심오한가?
3.2. 게임이란 무엇인가?
3.2.1. 게임은 스포츠인가, 예술인가?
3.2.2. 놀이 연구
3.2.3. 루돌로지 vs 내러톨로지
3.2.4. 게임에서 경쟁은 필수인가?
3.2.5. 게임에서 재미는 필수인가?
3.3. 게임도 예술인가?
3.3.1. 아니다. 게임은 예술이 아니다.
3.3.2. 그렇다. 게임은 예술이다.
3.3.3. 번외: 게임이 예술이어야 하는가?
3.4. 게임은 수준높은 예술인가?
3.4.1. 예술 분야와 예술 작품의 구분 필요성
3.4.2. '수준높은 게임'이란 무엇인가?
3.5. 게임이 예술이라면, 게임은 어떤 예술인가?
3.5.1. 기존 예술에도 있는 요소
3.5.1.1. 서사성
3.5.1.2. 조형성
3.5.1.3. 음향성
3.5.2. 기존 예술에는 없는 요소
3.5.2.1. 상호작용성
3.5.2.2. 경쟁성
3.5.2.3. 유희성
3.5.2.4. 행위성
3.6. 현실적으로,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3.6.1. 현실적으로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다
3.6.2. 현실적으론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
4. 앞으로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4.1. 이전 시도의 의의와 문제점
4.1.1. 해외
4.1.2. 국내
4.2. 향후 방향
4.2.1. 현대 예술의 참고
4.2.2. 게임의 특성에 대한 연구
4.2.3. 주류 장르에서 벗어나기
4.2.4. 다학제간 연구하기
5. 참고자료
5.1. 웹문서, 영상
5.2. 웹사이트
5.3. 책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게임예술인가?라는 논제와 관련된 정보를 모아 제공하고, 집단연구 및 논의를 하기 위한 문서.[2] 한국 사회에서는 게임 규제와 맞물려 '과연 게임에 가치가 존재하기는 하는가?'라며 비판하는 세력, 그리고 이에 대해 게임의 가치를 제시하며 반박 및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 '게임과 예술' 문서는 게임의 가치를 옹호하려는 세력에게 이론적 뒷받침이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게임의 가치를 폄하하는 세력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타당성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게임과 예술' 항목은 그 중에서 게임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다루는 문서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예술을 심미적으로 사람들을 만족시켜주는, 혹은 개인의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즐길거리라고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면, 게임 역시 예술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따진다면 순수예술은 주로 현학적인 만족을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추며, 이 '현학적'이란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면[3] 순수예술이 제공하는 만족은 게임이 제공하는 만족과 다소 다른 면이 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현재 예술, 게임 전문가들조차도 명확히 이를 파악하고 논의를 주도해나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예술과 게임 둘 다 해보고 이 둘 사이의 차이와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사실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분히 편견에 의존해서 상대 분야를 파악하고, 상대 분야를 평가한다. 예를 들면, 이런 편견 아래에서 예술 분야 혹은 예술 종사자들은 '어렵다, 현학적이다, 지적허영이다, 거짓부렁이다, 돈지랄이다' 같은 평가를 받으며, 반대로 게임 분야 혹은 게임 종사자들은 '진지하지 못하다, 저질스럽다, 심오함이 없다, 문화로 다룰 가치가 없다, 돈지랄이다' 같은 평가를 받는다.[4]

당연히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각 분야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 교류,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당연히 이상적일 텐데, 그러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 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게임 분야가 예술과 문화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상은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게임만큼 문화콘텐츠 면에서 양적인(즉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의 면에서) 성장을 거둔 분야도 사실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예술이나 문화분야는 질적인 면에서는 몰라도 양적인 면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내수시장이 불안하다는 것. 물론 게임 분야도 현재 상황에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고 말이다. 구미 선진국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려면 문화나 예술적으로 수준을 높이는 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손해는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술 분야는 게임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매체상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고(즉 표현도구면에서 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게임 분야는 예술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내용상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즉 표현 내용 면에서 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 간의 알력 다툼. 문제는 예술계 종사자들은 웬만한 디자이너들보다 더 말이 안 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게임과 예술' 항목은 게임계 종사자와 예술계 종사자가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하위 항목을 구성했다. 현황 항목에서는 게임계가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사회, 문화, 예술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거리 항목에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도 예술인가?', '게임이 예술이라면, 게임은 어떤 예술인가?', '앞으로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등의 논의거리를 중심으로 하위 항목을 대강 정리하였다.


2. 현황[편집]



2.1. 게임의 영향력 확대[편집]


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상업 게임이 판매되기 시작한 이후 거의 반세기가 흘렀다.

당시 10-20대 아이들이 거의 두 세대를 거쳐왔다(사회학에서는 한 세대를 보통 30년으로 본다), 대중문화에서 게임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게임이라는 대중문화에 노출된 채 자랐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사회 전반적으로 게임에 대한 생소함이나 거부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슈퍼 마리오 벤츠 콜라보레이션 광고같은 것이 나와도 그냥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5]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게임 관련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런 예일 것이다.

기성세대 게이머라도 간간히 스마트폰을 이용해 간단한 게임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자식에게 막히는 걸 물어보거나 아이템을 보내달라고까지 한다.

임요환이나 홍진호 같은 경우 프로게이머로서는 물론 상당히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SNL 같은 경우 2의 화신을 고정으로 기용하기도 했고. 물론 아무래도 게임 관련 드립은 젊은 남성층에 국한돼 유행하는 경우가 많고, 장년층 이상이나 여성층의 경우 아직은 생소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말이다. 아직 한국은 40대가 한계선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 이미 50~60대 게이머도 많은 편이다. 당연히 유럽이나 미국은 게임에 더 관대한 면을 보인다.[6]

비디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소설, 만화,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예술로서 받아들여지는 매체다.

이와 같이 알게 모르게 대중들은 게임에 익숙해져 있다.


2.2. 게임 규제[편집]


하지만 동시에 게임 규제와 같이 이런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확산을 반기지 않는 움직임도 있다.

이는 어찌보면 세대격차가 매체를 통해 드러난 셈이라 하겠다. 일방향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TV 등의 방송을 중심 매체로 수용하는 기성세대와, 양방향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7] 인터넷 및 게임을 수용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다. 이미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영화, 방송, 기존 예술 등 얼마든지 즐길거리가 많은 데 반해, 신세대는 그렇지 못하다.[8]

또한 기성 세대 입장에서는 아무리 몇 조 원을 벌어들이는 문화산업이라도 애착도 이해도 안 되고 문제도 많은 분야를 굳이 키워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기성 세대는 사회적으로 안착한 상태인 것들을 지키는 입장이다. 반면 신세대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자랄 때 같이 성장해온 매체에 좀 더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문화매체에 동질감을 가지면서 이를 지키려 할 것이다.

2.3. 게임계의 문제[편집]



온라인게임은 공짜, 부분유료화가 대부분이다. 유저들의 캐시템 구매가 수익을 가져다주는 구조다보니, 앞다투어 현금결제를 유도한다. 게임업계도 상당한 3D직종이고, 자금난과 막장운영+열악한 환경이 겹쳐 그저 사행성 컨텐츠를 남발하고 구매를 조장해 게임계가 스스로 게임소비자층을 내쳐버리는 짓을 하기도 한다. 과도한 캐시템이나 불친절한 운영 같은 것은 게임을 즐기는 계층이 게임에 관심을 떨쳐버리고 다른 매체를 즐기도록 만드는 악수(惡手)이다. 게다가 아직 한국 게임계는 북미나 유럽, 일본 게임들처럼 다양하고 질 좋은 게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한정된 취향을 가진 젊은 남성 위주의 게임소비자층이 게임계의 다양성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게임을 대중매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애초에 대중(mass)이라는 게 남녀노소 분간이 안 되는 집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명확히 젊은 남성층이 중심소비자층이 되는 게임은 대중매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여성층도 많이 즐기는데 반해[9], 게임은 아직 소비자층이 다양하고 두텁지 못하다.


2.4. 게임 관련 연구 확대[편집]


해외에서는 게임 관련 연구가 크게 확대되고 있다. 물론 주로 기술적인 문제, 또는 마케팅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말이다. 국내의 경우 역시,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같은 것만 보아도 주로 개발 노하우나 마케팅 방식에 대한 발표가 많다. 하지만 사회학, 인문학, 예술학적으로 게임에 접근해 연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는 게임학(game studies)이 등장하여 게임과 관련된 연구의 중심에 서고 있다. 영어로 게임학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게임 스터디스(game studies)와 루돌로지(ludology)가 있는데, 앞쪽이 더 포괄적이다. 게임 스터디스는 내러톨로지(narratology, 서사학이라고 번역한다.) 까지 포괄하는 용어다.

게임학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관련된 논문이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관련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2014년 6월 18일 열린 ‘게임 중독인가, 예술인가?’ 정책 토론회에서 이동연 교수는 "지금이라도 매출을 줄이고 기업들이 문화 연구에 힘쓰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중독법이 나타나 업계의 목을 죌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게임과 문화에 대한 연구도 기업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5. 게임과 예술 사이의 관계 현황[편집]


게임과 예술의 결합은 크게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Game as an art form)과 예술게임(Art Game)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일반적인 상업 게임 중에 예술성이 뛰어난 그래픽과 이야기, 상호작용성을 갖춘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는지와 관련된 논쟁을 말한다. 반면 예술게임은 상업적 목적보다는 예술적인 표현을 더 추구하는 형태로, 예술적, 실험적 재미를 추구하는 인디 게임[10][11]이나 예술가들이 만든미디어 아트의 한 종류로서의 게임들이 있다. 보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면,

  1. 게임에 예술을 접목
음악, 일러스트레이션, 렌더링 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캐릭터 스킨이나 BGM 등은 다 이전 예술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게임을 종합예술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1. 예술에 게임을 접목
게임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만 방점이 예술적 창작에 있는 경우다. 미디어 아트가 대표적.
  1. 게임에서 새로운 예술 형식을 추구
인디 게임,[12] 예술게임 등의 사례를 말한다. 이는 1번과 2번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미디어 아트보다 더 게임적이고, 배급방식도 게임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인디 게임의 경우 비교적 1번에 가깝다 할 수 있고, 예술게임의 경우 2번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물론 똑부러지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 상업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가 있지만, 셋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2.5.1. 해외의 사례[편집]


제작 면에서 상황이 이렇다면, 문화적으로 수용되는 면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해외의 경우 이미 미디어 아트에서는 키넥트 같은 게임 기기를 사용하거나, 게임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사례가 흔하다.

한 예로 2006년 미디어예술가 오리아 하비(Auriea Harvey)와 미카엘 사밈(Michael Samym) 부부는 게임을 예술로 풀어보려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2012년 프랑스의 예술가 발타자르 오시트르(Balthazar Auxietre)는 오큘러스 리프트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정부나 국립 단체에서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하고 지원해주고 있다.

2006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게임을 문화적 생산물로서, 예술적인 표현의 한 양식으로 공식화했으며, 게임 산업에 세금 지원을 승인하고 프랑스 게임 디자이너 미셸 앙셀(Michel Ancel), 프레데리크 레날(Frederick Raynal)과 일본의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문화예술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New York Times, 2006.11.6)

2011년 5월 미국 국립 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은 2012년도 예술 프로젝트 보조금 분야(라디오, TV, 영화 카테고리)에 게임을 포함시켰다. 미국 NEA의 결정으로 게임 제작자들이나 제작사들은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젝트 지원금을 신청해 승인 시 20만 달러까지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외에도 미술관에서 게임을 수집품에 포함시키거나, 게임을 주제로 전시를 열기도 한다. 관련 내용은 다음 기사 참고. 게임, 이젠 '문화'다 ③: 해외에선 이미 '게임의 예술화' 시작됐다

미국의 경우 이미 1989년에 뉴욕 동영상 박물관(Museum of the Moving Image)에서 '뜨거운 회로 : 비디오 아케이드(Hot Circuits : A Video Arcade)전을 열었다. 1998년 워커 아트센터에서는 '인터페이스를 넘어서(Beyond Interface)'라는 전시가 열렸고, 1999년에는 '미로를 크래킹하기 – 해커 예술로서의 게임 플러그인들(Cracking the Maze - Game Plug-Ins as Hacker Art)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전시가 열렸으며, 2000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 벨 센터에서 '시프트-컨트롤 (Shift-Ctrl)'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2002년 게임 연구자인 티퍼니 홈스는 중요한 게임 관련 행사와 당시의 논의를 정리하는 글을 쓴 바 있다.#

2012년 3월 16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는 '비디오 게임의 예술(The Art of Video Games)'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미국의 디자인 유산으로 조명하는 전시를 연적이 있다.# 이 전시는 2016년 1월 25일까지 미국 내 다른 박물관에서 순회전시를 가졌다.[13]

2011년 6월 24일 뉴욕현대미술관은 '내게 말해봐(Talk To Me)'라는 디자인 전시를 열면서 게임과 미디어 아트 작품을 전시작품에 대거 포함시켰다.#

2012년 11월 29일 뉴욕현대미술관은 게임 14점을 소장품 목록에 집어넣었다.# 실용 디자인(Applied Design) 부서에서 선정한 게임들이며,[14] 뉴욕현대미술관 3층 건축/디자인 관에서 전시가 되기도 했다.# 소장품 목록에 포함된 '게임작품'은 다음과 같다.

  • 팩맨(Pac-Man, 1980)
  • 테트리스(Tetris, 1984)
  • 어나더월드(Another World, 1991)
  • 미스트(Myst, 1993)
  • 심시티 2000(SimCity 2000, 1994)
  • 비브 리본(vib-ribbon, 1999)
  • 심즈(The Sims, 2000)
  • 괴혼 : 굴려라왕자님(Katamari Damacy, 2004)
  • 이브 온라인(EVE Online, 2003)
  • 드워프 포트리스(Dwarf Fortress, 2006)
  • 포탈(Portal, 2007)
  • 플로우(flOw, 2006)
  • 여정(Passage, 2008)[15]
  • 카나볼트(Canabalt, 2009)[16]

게임 관련 학술 행사나 책의 출간도 이뤄지고 있다.

2010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는 게임예술사학회 컨퍼런스(Art History of Games conference)가 열렸으며, 이 행사에서 셀리아 피어스(Celia Pearce)등의 연구자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를 예술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았다고 한다.

2014년 들어 게임계 종사자들도 이제는 게임을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비디오게임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비디오게임 무비》(Videogame: The Movie)'에는 게임을 예술 혹은 예술과 동등한 것으로 평가하는 업계 종사자들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발언들을 참고하자.#

"게임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앞으로 게임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할 정도로 콘텐츠의 깊이가 상당해질 것이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 속에 녹아드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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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랜디스', 영화 《크로니클》 각본 담당


"모든 미디어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레코드나 카세트 테이프는 현재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음악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게임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앞으로도 형식은 변할 수 있지만 수 백년 후에도 비디오게임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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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 히데오', 메탈기어 시리즈 감독


"예술의 큰 문제점은 작품의 평가가 주관된 관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있어 예술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나 서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게임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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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몰리뉴', '던전키퍼'와 '페이블' 등으로 유명한 게임개발자


"게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의 모든 형식과 표현이 모여 이루어진 정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클리프 블레진스키 역시 동일한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음악 작곡가와 작가, 아티스트, 테크니컬 담당자, 레벨 디자이너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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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피시', 게임 디자이너


"정말 좋은 예술은 관객을 예술 속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는 예술의 참여자로 관여하게 되며, 게임을 통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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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슬(Louis Castle)', 웨스트우드 공동설립자


2.5.2. 국내의 사례[편집]


국내의 경우도 미약하나마 게임을 예술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6 대한민국 게임백서에서는 게임과 예술의 만남이 트랜드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게임을 주제로 다룬 행사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2년 1월 20일에는 313 Art Project 갤러리에서 넥슨 사에서 기획한 기획전 'BORDERLESS'가 열렸다.#

2012년 6월 25일에는 경기도미술관에서는 바츠 해방전쟁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2013년 10월 11일에서 13일 사이에 대구에서는 'e-Fun 2013' 축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게임의 문화예술화를 표방하며 거리축제를 열었다.#

2013년 10월 19일에서 11월 9일동안 미디어웹진 앨리스온에서는 'Next Level of Art : Game'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게임과 예술 또는 문화를 연관시켜 고찰해보려는 시도가 토론회라는 형식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2013년 12월 11일 서울 역삼동 D.CAMP에서 ‘게임은 문화다!’ 컨퍼런스가 열렸다.#

2014년 들어 게임을 예술로 보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2014년 6월 18일에는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게임 중독인가, 예술인가?’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2014년 6월 26일에는 한국 게임학회가 숭실대학교 벤처중소기업센터 309호에서 '제1회 대한민국 게임포럼' 행사를 열었다.#

2015년 7월 14일부터 5주간 인문학협동조합에서 게임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2015년 11월 엔씨소프트는 온라인 RPG <블레이드앤소울>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주제로 한 뉴에이지 뮤지컬 공연‘ 묵화마녀 진서연’을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선보였다.

2015년 11월 라이엇게임즈는 서울 종로에 위치한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展'을 개최했다. 작가들은 <LOL> 게임 내의 배경과 챔피언 등의 요소를 한국화로 재해석한 20여 종의 작품을 선보였다. 라이엇에 따르면 이 미술전에는 2주간 8,000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4월 넥슨은 판교 본사에서 진행된‘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2016’에서 'NDC16 아트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는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아트와 일러스트들을 공개했다.

2016년 5월 넥슨은 세종문화회관 뒤뜰 예술의 정원에서 '네코제 x 세종예술시장 소소’를 개최했다.

2017년 1월 24일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의원 등 11인은 법적인 '문화예술'의 범주 안에 게임을 포함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2.5.3. 일반인들의 인식과 반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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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대다수 일반인들은 게임을 예술로 보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다. 이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 대중뿐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이나 만드는 개발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쉽게 말해 '굳이 게임이 예술일 필요가 있느냐?', '굳이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게임은 재밌기만 하면 된다.'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해외나 국내 모두 마찬가지이다.[17]

이 때문에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려고 애쓰는 이유가 게임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일종의 자격지심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게임의 예술성에 대해, 게임의 특성은 스포츠에 가깝다는 식으로 말했다.#

영화 평론가인 로저 이버트가 "게임은 예술이 아니며, 앞으로도 예술이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평가[19]를 내리자, 유명 개발자인 코지마 히데오는 "맞다. 게임은 굳이 예술일 필요가 없다."고 받아치기도 했다.[20][21] 국내의 경우도 게임과 예술에 대한 논쟁에는 의견이 반반으로 갈린다. 다음과 같은 게시물들에서 그런 예를 쉽게 볼수 있다. # #

3. 논의거리[편집]



3.1. 예술이란 무엇인가?[편집]


예술에 대한 정의는 내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큰 틀에서 보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고 효과적으로 느낌을 전달하는 기술' 정도로 정의할 수 있지만, 좁은 범위로 놓고 보면 예술 아래의 분야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다. 리치오토 카누도는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영화 7개의 예술을 예술이라 보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22] 한마디로 동상이몽.

예를 들어, 작가에게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문장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기술이라 말할 것이고, 음악가에게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소리로 상대를 감동시키는 기술이라 말할 것이고, 화가에게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형태와 색채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기술이라 말할것이고, 건축가에게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공간과 편의성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기술이라 말할 것이고, 디자이너에게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제품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게 하면서도 심미적인 만족을 주도록 만드는 기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회화 분야먄 봐도, 르네상스 미술을 좋아하고 그리는 화가라면 대상을 원근법에 따라 사실적으로 보이게 그리는 것을 예술이라 할 것이고, 동양산수화를 그리는 화가라면 눈으로 그림 속을 노닐 수 있게 그리는 것을 예술이라 할 것이고, 현대미술을 그리는 화가라면 나의 감정이나 세상의 원리를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 예술이라 할 것이다. 다시 현대미의 회화 분야를 본다면, 조형성을 중시하는 화가라면 어떻게 점선면색을 배치해서 추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 할 것이고, 개념주의 화가라면 실제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개념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예술이라 할 것이고, 사회참여를 중시하는 화가라면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것을 예술이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은 굉장히 그 범위가 좁다. 애초에 동양의 예술(藝術)이나 서양의 아트(art)나 어원은 전부 기술(技術, techne)에서 온 것이다. 한번 백과사전을 찾아보시길. 이러한 기술로서의 예술의 의미가 예술활동의 특수성 때문에 미적 의미로 한정되어 기술일반과 예술을 구별해서 ‘미적 기술(fine art)’이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18세기에나 이르러서였다. 요즘은 디자인(design)이나 공학(engineering) 같은 단어가 이런 실용기술의 의미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도 기술이다. 오늘날의 순수예술은 단지 물질적으로 재료를 다루는 것 이외의 것들을 더 많이 고민하는 기술일 뿐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만든 작품이 미래에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의미로 남을지 '철학적으로' 까다롭게 고려하면서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품으로 나오는 디자인 제품과는 다른 작업태도다.[23] 만약 예술을 폭넓게 '심미적으로 사람들을 만족시켜주는, 혹은 개인의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즐길거리'라는 의미로 정의한다면, 게임 역시 예술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만화는 이미 프랑스 쪽에서는 제9의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따진다면, 즉 앞서 얘기한 기존 예술이 생각하는 예술성에 맞춰서 게임의 예술성을 평가하면 게임은 예술이 아니게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조형성을 중시하는 화가 입장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본다면, 추상이미지가 아니라 구상이미지를(즉 실제 사람이나 사물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불만을 느낄 것이고, 개념주의 화가라면 엄연히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게임이 실제 현실마냥 느껴지는 것에 불만을 느낄 것이고, 사회참여를 중시하는 화가라면 게이머들이 하라는 사회 개선은 안하고 전자계집 주색잡기나 한다고 불만을 느낄 것이다. 근데 WOW는 여캐 가지고 주색잡기가 됩니까 물론 이런 평가도 게임따라 다를 것이다. 조형성을 중시하는 화가에게 저니 같은 게임을 보여준다면 불만이 좀 줄어들지도 모르고, 사회참여를 중시하는 화가가 보기에 데모크라시 같은 게임은 굉장히 심오하게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잖는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주로 미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 이루어져왔는데 미학의 주요한 토대는 회화와 조각, 건축정도였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음악이나 무용에 대한 미학적 성찰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근대 시기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역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적었고 미학에서 예술을 정의내리려는 시기와 현재 시기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그 당시에는 만화도, 영화도, 게임도, tv드라마나 예능프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18세기 무렵에 예술이라는 언어를 점유했던 회화나 조각에 게임을 비교하면서 이것이 예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마치 과학이 17세기 무렵에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과학에 대한 담론이 그 무렵에 가장 많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의 정의가 현대과학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7, 18세기의 과학자들이 철저한 이론과학인 초끈이론과같은 현대물리학의 특정분야를 과학으로 인정할것인지는 확신할 길이 없다. 과학에 대한 정의가 일견 명백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과학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과학이란 언어의 함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3.1.1. 예술은 놀이인가?[편집]


최근에는 게임과 예술을 놀이라는 공통된 맥락 안에 놓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도 놀이고, 게임도 놀이니, 게임은 예술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어폐가 있는 논리다. 음악을 감상하거나 그림을 보는 것처럼 감각을 수용해 지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유희하게 되는 예술과, 즉각적인 감각 그 자체를 직관적으로 유희하는 스포츠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이는 무엇이 게임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게임시장에 나와있는 소위 AAA 게임들 대부분은 애초에 게임인지도 불분명한 수준이다. 사실상 영화의 하위호환 수준의 각본과 연출에 아무런 자유도 제공하지 않는 게임 플레이만 조금 넣어놓고 게임이라고 우기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게임이 '놀이'이냐 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틀렸다. 놀이란 것은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제외하면 모든 게 불분명하고 필요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게임은 대부분의 요소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 게이머가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무슨 경험을 하거나, 재미를 느끼거나 하는 것들을 전부 개발자들이 정할 수 있으며 이는 확실히 놀이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예술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놀이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어떤 놀이냐는 거다. 놀이나 유희도 종류가 여러 개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병정놀이와 소꿉놀이와 그네타기의 유희성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몸을 흔들며 하는 유희인가? 감정적인 유희인가? 지적인 유희인가? 투쟁하며 맞서싸울 때의 유희인가? 이에 따라 예술이 놀이냐 아니냐가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문을 모르는 현대인들 대부분에게 옛날 시조는 그냥 머리아픈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김삿갓 같은 옛사람들에겐 한시는 놀이였다. 글자와 운을 가지고 하는 심심풀이 놀이. 마찬가지로, 물리학자에게는 숫자나 공식을 가지고 각종 공대 개그를 치는 것이 하나의 유희일 것이다. 또한 아랍에미리트의 어떤 부자에게는 현실에서 풋볼 매니저를 플레이하고, 실제 도시를 가지고 심시티를 하는 것이 놀이이고 유희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꿈일 뿐이다. 반면 돈도 없고, 취향도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강아지하고 같이 공놀이를 하는 식으로 다른 놀잇거리를 즐길 것이다.

이를 보면 놀이나 유희성은 결국 그 사람이 가진 취향과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현대미술에서 마르셀 뒤샹의 내력을 알고 그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들이라면, 변기도 예술작품으로 보이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들이 예술을 좋아하는건 그쪽에 취향이 있고, 그 내력이나 맥락을 잘 알기(역량) 때문이다.

이런 유희의 상대성과 별개로, 상대적으로 누구나 쉽게 즐기는 놀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면, 일반인들은 공대 개그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강아지를 더 많이 접했고,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 문학보다는 미술이 더 쉽게 이해된다. 《피네간의 경야》보다는 〈모나리자〉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보통 미술보다는 음악이 더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뒤샹의 〈〉보다는 비틀즈의 노래가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놀이의 측면에서 보면, 따라서 글보다는 그림이, 그림보다는 노래가 더 즐기기 쉽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그게 우월함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냥 즐기는 데 좀 더 많은 준비사항이 필요한 유희와, 그냥 몸만 있어도 바로 쉽게 즐길 수 있는 유희가 있을 뿐이다. 둘은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오늘날 예술은 상대적으로 스포츠 등 다른 즐길거리보다 어렵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게임은 예술이다. 스포츠보다 훨씬 즐기기 어렵고, 알지 못하면 모르는 요소들도 매우 많다. 일반인들은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거나 가식떠는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현대예술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예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를 가식이라고 무시한다면 이것이 옳은 것일까? 이는 나의 취향을 근거로 남의 취향을 무시하려는 것밖에 안 된다. 물론 당연히 거꾸로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의 취향을 무시하는 것도 말이 안 될 것이고 말이다.

3.1.2. 예술은 심오한가?[편집]


대중이 많이 착각하는 편견중의 하나가, 예술은 어렵고 심오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따지면 현재 대중매체들도 매한가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어렵고 심오할 수 있다. 주요 npc나 설정이나 역사적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이때문에 자기 멋대로 자부심을 부리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나는 이걸 아니까 너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올드비가 뉴비를 차별하는 그런 현상 말이다.

예술에 대한 편견도 그와 다르지 않다. 예술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고, 장황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다보면 왜 그런 걸 만들었는지 내력을 알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역으로 그렇게 했는데도 파악하기 쉽지 않은 예술은 좋은 예술이 아닌 것이라 봐도 사실상 무방한 것이고 말이다. 도리어 수백년동안 관련 정보가 쌓여온 분야의 규칙이나 방식이 쉬울 거라 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역으로 게임도 시대가 지나면 사람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이미 몇몇 고전 게임들은 그 게임을 접해보지 못했던 유저들에겐 도무지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 경우도 많다. 어떻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거야? 어떻게 클리어했다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이 말하는 것들은 굉장히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인 경우가 많다. 그냥 보고 꼴리면 좋아하고, 싫으면 말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을 어렵게 보는건, 낯설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다. 어떤 예술이라도 몇 개월 몇 년간 그 예술을 접하고 공부하면 결국은 이해하게 되어 있다. 예술을 어렵게 느끼는 다른 이유는, 예술 작품 그 자체만 보고 뭔가를 알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만 듣고 지루하다 느끼기 보다는, 작곡가의 생애나 당시 역사 등과 같이 엮어서 마인드맵을 짜보려 하면 좀더 흥미가 생길 것이다. 예술은 결국 이야기일 뿐이다. 단지 보고서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딱딱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대하면, 예술이 재미없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술을 심오하다 착각하는 건, 그 예술작품 자체보다 예술가나 예술기관의 권위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예술가의 유명세에 위축되거나, 공연장이나 미술관의 위압감에 눌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는 대통령의 권위에 눌려 실정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른 평가를 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애초에 '심오하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상이나 이론 따위가 깊이가 있고 오묘하다.'라고 기술되어있다. 예술에서의 사상이나 이론의 깊이와 오묘함은 모차르트 소나타 16번 c장조와 교향곡 40번 g단조의 차이의 그것인가? 16번 소나타는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대부분 들어봤을 것이고, 배우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곡이고 우리에게 낭만과 환상과 같은 감정. 더 나아가서는 풋풋함을 전해줄 수 있는 곡이다. 반면 교향곡 40번은 정신분열적 이중성을 보여주는 소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오한' 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16번 소나타의 사상이나 이론은 깊이가 있지 않은가? 오묘하지 않은가? 위의 말대로 예술의 위압감에 눌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게임은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에서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논점 중 하나다. '게임은 예술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수는 게임이 심오하지 못하고, 열등한 매체라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과 사용, 향유의 논리가 예술의 논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예를 들어 보자면, 게임은 완성된 것을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개입하여 즐기면서 완성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이라기 보다는 스포츠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해당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수 많은 사람들 모두 생각과 논지가 다르니, 위의 예는 그저 예시일 뿐 모두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은 심오하고 고등한 것이라는 일종의 착각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게임은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이 곧 게임은 열등한 매체라는 주장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무의미한 아가리배틀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것.

듀나의 경우도 이런 취지로 몇 차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비디오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 채피 칼럼에서도 "예술 타이틀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게임의 독립된 가치를 예술에 종속시킨다."는 글을 썼다.# 써커펀치 칼럼에서는 "지금의 기술문명이 계속 지속된다면 앞으로 비디오 게임은 우리가 지금 만지작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매체가 될 것이다." 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3.2. 게임이란 무엇인가?[편집]



3.2.1. 게임은 스포츠인가, 예술인가?[편집]


게임은 스포츠와 예술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룰을 기반으로 플레이를 해 스코어를 얻어 승리한다는 특성만 보면 게임은 스포츠를 닮았다. 다만 비주얼 노벨처럼 이런 스포츠적 성향이 없는 게임도 분명히 여럿 존재한다.[24] 반면 개발자들이 이미지, 사운드, 모션 등을 조합해 게임을 만든다는 점에서 보면 게임은 예술을 닮았다. 게임의 이런 모호한 범주는 기존 스포츠계와 예술계 종사자들이 게임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 예로 ESPN 회장은 "e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닌 경연일 뿐"이라 말한 바 있다.# 반면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3.2.2. 놀이 연구[편집]


사회과학 분야는 그 특성상 특히 게임과 관련된 연구를 많이 하였다. 사회학에서는 요한 하위징아,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 등을 중심으로 게임과 놀이의 특성에 대해 연구한 바 있으며, 언어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놀이의 특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3.2.3. 루돌로지 vs 내러톨로지[편집]


유희성(Ludology)
- 게임 텍스트를 즐기는 이용자들의 쾌락을 중시한다.
- 게임 텍스트를 자신의 세계로 전유하는 유희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
(보통 루돌로지를 그냥 게임학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루돌로지의 어근인 루도(ludo)는 라틴어 단어 루두스(Ludus)에서 유래한 말로, 주로 보드 게임과 연관이 있는 단어라고 한다. 루돌로지라는 용어는 비(非) 전자 게임과 보드 게임을 배경으로 발생했지만, 인지도를 얻은 것은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가 1999년 쓴 글에 등장하고서부터였다.[25])

이 루돌로지스트들의 관점은 컴퓨터·비디오 게임이 새로운 것이고 그 자체일 뿐이며, 그것만의 규칙, 영역, 그리고 ‘플레이’의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스펜 오르세트((Espen Aarseth)) 같은 루돌로지스트들은 분명 게임이 줄거리나 캐릭터 같은 전통적인 서사의 양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게임플레이에 부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르세트는 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라라 크로프트의 몸매는, 이미 영화 이론가들이 충분히 분석한 것처럼 플레이어인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내가 다르게 플레이하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나는 그녀의 몸은 보지 않지만, 그녀가 지나는 길과 지나온 길은 본다.”

다시 말해, 이들은 게임이 주는 쾌락과 유희적 차원에 집중한다. 쉽게 말하면 오락하는 데 이유가 어딨냐 그냥 하는 거다라는 것.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게임성(유희성)을 강조하는 학파라 보면 되겠다. 개발사 중에서 닌텐도가 제작하는 게임들을 생각하면 된다.

일부 개발자가 ‘게임에서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도 유희성 지상주의자들의 맥락이다.[26]

루돌로지가 뭐야?



서사성(Narratology)
- 게임을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 규정하고, 텍스트를 구성하는 '서사'에 관한 분석을 중요시한다.
- 게임 텍스트의 서사와 캐릭터, 게임 이용의 특성을 잘 파악하는 것.

이들의 입장은 루돌로지과 대비된다. 내러톨로지(Narratology·서사학)는 말 그대로 내러티브(narrative·서사)를 중시하는 입장이고, 게임을 소설, 영화 등 기존 서사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반면 루돌로지스트들은 서사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게 서사를 아예 논외로 하는 건 아니다. 게임 플레이를 더욱 중시한다는 거지 서사에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서사가 게임 플레이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따지고, 게임 플레이와 서사가 모순되어 있으면 그것을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3.2.4. 게임에서 경쟁은 필수인가?[편집]


게임의 어원인 가멘(gamen)은 고대 게르만어에서 고대 영어로 전해진 단어인데, "즐거움(joy), 재미(fun), 놀이(amusement)"를 의미했다고 한다. 이전 고트어에서 gamen은 "참가(participation), 친교(commun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아마 원시 게르만어에서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러다 1300년경부터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놀이(contest played according to rules)"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스포츠를 위해 야생동물을 잡는 것(wild animals caught for sport)"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본래 게임이란 단어는 그냥 "같이 모여 노는 것" 정도의 의미였다. 13세기가 되어서야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놀이"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사실 재미는 굳이 경쟁이 없어도 느낄 수 있다. 로제 카유아도 경쟁이 필요하지 않은 놀이의 종류를 지적했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 게임에서 등수매기기처럼 스포츠에서 경쟁은 필수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비디오 게임의 경우도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경쟁이나 승리를 따지게 되지만, 심즈처럼 그런 게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인기 있는 게임들도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한다.


3.2.5. 게임에서 재미는 필수인가?[편집]


오늘날 재미는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로 취급된다. 문제는 과연 '재미'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게임의 재미에 대해 정의내리지 못한다면 정작 게이머들이 게임은 재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인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마치 예술은 (美)가 있다고 주장하며 현대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게임 규제와도 이어지는 문제이다. 기성세대가 게임의 재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게임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의 재미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내리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재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기존에 없던 우스꽝스러운 것을 보았을 때 재미가 발생한다는 설이 있다.(다만 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공포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반면 내가 상대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재미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재미를 비롯해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재미도 결국 감각을 통해 몸에 전달되는 자극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베버의 법칙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족감이 감소하게 된다. 만약 이전에 내가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나는 비록 소박한 현재라도 안도감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재미도 마찬가지다. 재미는 재미없음과 대비되는 요소이다. 재미라 여겨지는 것이 과잉 공급되는 상황에서는 되려 재미가 재미없게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어쩌면 이것이 게임불감증의 한 원인일지 모른다. 중요한건 재미를 균일하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상황과 재미없는 상황을 번갈아가며 공급해야 유저는 지속적인 재미를 느끼게 된다. 적당히 요동치는 그래프처럼 말이다. 이는 마치 패스트푸드 음식만 먹다 보면 물리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되레 게임 개발자는 지루함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재미는 사람에 따라서도 상대적이다. 내 취향과 타인의 취향은 같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GTA 같은 액션 게임을 좋아하지만, 어떤 이는 심즈 같은 정적인 게임을 좋아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가끔 절대다수가 재미없다고 평가하는 게임도 나오고, 게이머들은 이를 비게임(none game)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통칭하면서 게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게임에서도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있다. 따라서 어떤 취향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GTA를 좋아하는 A가 심즈를 좋아하는 B보다 우월하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설이나 음악이 게임보다 우월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3.3. 게임도 예술인가?[편집]



3.3.1. 아니다. 게임은 예술이 아니다.[편집]


여기서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게임계 외부 사람의 주장과 게임계 내부 사람의 주장으로 나뉜다.

게임계 외부 사람의 경우, 미국의 영화 평론가인 로저 이버트는 게임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버트는 ‘누구도 위대한 시인, 영화감독, 소설가, 산문가에 비교해 게임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게임은 규칙(rule), 점수(point), 목적(objective), 결과(outcome)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이런 요소들은 게임을 예술적으로 무사심(disinterestedness)[27]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토작업장 같은 사례들을 생각해보자. 굳이 이런 요소가 없더라도 서로 경쟁심을 가지고 싸우는 과정에서 여유를 가지고 심미적인 감상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임계 내부 사람의 경우, 코지마 히데오는 이버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게임은 굳이 예술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코지마는‘예술은 100명 중 1명의 사람에게만 감명을 줘도 가치를 인정받지만, 게임은 100명의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일종의 서비스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

3.3.2. 그렇다. 게임은 예술이다.[편집]


반면 앞서 정의했던 것처럼, 예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고 효과적으로 느낌을 전달하는 기술' 정도로 폭 넓게 정의한다면, 게임도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을 예술로 인정하려는 진영에서는 멀게는 고대 동굴 벽화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인정받고 있는 사례들을 들어, 게임도 유사한 발전 과정을 겪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의 게임 개발자인 켈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했던 TED 강연을 통해 구석기 시대 벽화가 꾸준한 시간을 거쳐 회화와 같은 예술로 발전했음을 예로 들며, 게임 또한 그러한 초창기 예술 형태로써 발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스콘신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인 에런 스머츠(Aaron Smuts)는 2005년 그의 논문에서 역사적, 미학적, 관습적,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예술 이론에 기반해 분석해 볼 때, 많은 게임들이 예술로 간주될 수 없지만, 어떤 게임들은 예술로 분류되어도 될 만큼 타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머츠는 는 스포츠 장르조차 미학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는 게임에도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스머츠에 따르면 철학자인 데이비드 베스트(David Best)는 스포츠를 미적인 스포츠(aesthetic sports)와 목적지향적인 스포츠(purposive sports)로 구분하는데, 야구, 축구, 복싱과 같은 운동은 선수의 움직임이 미적으로 감상될 수 있지만 이겨야 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미적인 부분을 채점하지 않지만, 체조, 다이빙, 피겨스케이팅과 같은 종목에서는 미적인 부분의 예술 점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비교했다. 일반적으로 예술로 인정되기 힘든 분야라고 생각되는 스포츠에서도 예술적인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미적인 스포츠 종목이 있을 수 있고, 이는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무용과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다만, 체조나 다이빙과 같은 종목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하는데, 만약 스포츠가 그 경쟁적인 특징 때문에 예술로 인정받기 힘들다면 게임에서도 점수와 규칙 같은 요소 때문에 예술이 없다고 반대하는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시대의 비극은 여러 편이 경연 무대에 올라 서로 우승하기 위해 경쟁했으며, 따라서 비극의 이러한 경쟁적 요소에도 우리가 이를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게임도 경쟁을 위한 점수와 규칙 때문에 이를 예술로부터 배제하는 것도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미디어학자인 헨리 젱킨스(Henry Jenkins)는 테크놀러지 리뷰에 기고한 칼럼에서 최근 높은 품질의 게임은 영화적 표현기법을 차용했지만 반대로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며, 초기에는 그저 신기한 움직이는 영상에 지나지 않았던 영화가 예술로 발전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도 디지털 매체의 새로운 예술로서 내러티브와 상호작용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대중에게 인기 있는 팝 아트와 같은 형태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원준은 놀이, 게임 그리고 매체예술(미디어 아트) 간의 관계에 대한 글들을 내면서 이와 관련된 요소들을 분석하기도 했다. 1부 2부 게임과 예술성 :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사실 형식적으로 따지면 게임을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시청각적 외형상 게임에 사용된 기술은 영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뭔가 예술을 고상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들이 생각하는 예술 개념은 굉장히 협소한 개념이다. 엄밀히 형식적으로 조건을 따지면 예술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린이들의 낙서도 예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질문은 도리어 밑에서 언급할 게임은 고급 예술(high art)인가?와 더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리 콘티, 등장 인물 작화, 모델링, 효과음, 대사 녹음, Ost 제작 등

3.3.3. 번외: 게임이 예술이어야 하는가?[편집]


반면, 양쪽 모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굳이 게임을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하는가?와 같이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다수 존재한다. 예술이 아니라기 보다는 애써 외부로부터 게임을 예술로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28]. 이들은 주로 게임의 재미와 그로부터 나오는 스트레스 해소에 게임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는다 하여도 과연 그것이 게임에 얼마나 유효한 영향력을 미치는 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29]

일반적으로 게임이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30]의 주장은, 현재 게임이 국내외적으로 규제의 대상이 되고 일종의 악으로서 취급되는 원인이 게임에 대한 인식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제고하기 위해 예술로서 인정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과연 이런 행위가 게임의 인식 제고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즉,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으면 기분은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던 규제가 없어지고 없던 정부 지원이 대폭 증가할까?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거대해진 게임 산업에 비해 미비한 진흥-규제 법안, 업계 및 소비자의 문제점, 정치적 입지의 취약함 등의 여러 문제들과 이를 바탕으로 게임의 부정적 측면을 강화하여 게임을 규제하려는 이익집단에 의해 부정적인 게임 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예술로 인정을 받느니 마느니에 쓸데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회의론자들은 예술로 인정을 받는 것 보다 게임 산업의 내외적인 문제점들을 보완 및 해결하고 소비자와 업계를 중심으로한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다져 이를 바탕으로 게임 반대론자들을 설득하거나 정책 발의에 충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게임 중독을 예로 들어보면, 이를 셧다운제처럼 과도한 정책으로 규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서라도 게임 중독 자체는 충분히 사회적인 문제거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때, 규제의 지나침과 게임의 예술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입법자나 규제론자들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게임 중독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규제의 필요성만 강조할 뿐이기 때문이다.이 경우에는, 게임 중독에 대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인정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 자구책을 마련하여 이를 바탕으로 규제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규제론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또다른 예로, 21년에 발생한 마인크래프트 청소년 이용 불가 사태의 경우를 보면 마인크래프트가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고 학교에서 공식적인 프로그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등의 호소는 별반 타격을 주지 못하는 반면에[31] 셧다운제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이를 폐지하려는 국회의원의 구체적인 입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지지와 관심을 보내는 것이 현 상황이다. 즉,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지, 단순히 게임을 예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다른 주장은, 게임이 등장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전 과정을 겪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나갈 전망이고 이미 복합적인 예술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상태라면 게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굳이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특별한 범주에 속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게임 그 자체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그것을 유지, 강화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이다.

3.4. 게임은 수준높은 예술인가?[편집]


게임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문학적 유산, 즉 문학, 미술, 음악, 수학, 과학, 건축학, 지리학 등 모든요소를 사용한다. 예술이 아니라고 굳이 말할 당위성은 없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예술 또한 엔터테인먼트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한 수요나 희소성에 따라 상업성도 지닌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게임은 상품으로 만들어 지지만 예술작품처럼 세상에 나타난 후 재평가에 따라 정가와는 상관없이 그 가치가 재규정된다. 즉,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작품에 따라 수준 높은 예술(high art)의 범주에 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다. 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는 예술품과 완전히 동일한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3.4.1. 예술 분야와 예술 작품의 구분 필요성[편집]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술'과 '수준 높은 예술'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소설, 음악, 영화 등 다른 장르를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소설중에도 양판소와 같은 삼류 소설이 있지만, 우리는 보통 소설하면 명작 소설을 생각하고 그걸 기준으로 소설을 예술이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음악 중에는 클래식 음악도 있고 대중음악도 있고 양산형으로 찍어내 상품화한 아이돌 그룹의 음악도 있지만, 우리는 음악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화 중에는 《클레멘타인》 같은 괴작도 있지만, 《시민 케인》이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명작 영화도 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특정 작품의 예술성이 꼭 흥행이나 수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시민 케인》이나 《블레이드 러너》는 개봉당시 흥행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후대에 와서 재조명되고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경우이다. 이렇게 보면 게임에서도 분명 후대에 재평가되는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령 프레이만 보더라도 AAA 게임에 길들여진 리뷰어들에게는 평범한 평을 받았으나 이 게임의 진면목을 알아본 비평가들이나 게이머들에겐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당시에는 좋지 못 한 평을 받았다가 이후 재평가되는 경우는 많다.

예술 분야는 그냥 그런 예술 형식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의 정의일 뿐이다. 소설은 종이에 펜으로 문장을 써 내려간 것, 음악은 선율과 리듬으로 된 소리의 구성체, 영화는 영상과 음향과 시나리오 등의 종합체 같은 식으로 정의되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게임 분야 자체도 상호작용을 통해 참여자가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같은 개념으로 정의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분야에서 어떤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고 오랫동안 명작의 지위를 유지하는가이다.

3.4.2. '수준높은 게임'이란 무엇인가?[편집]


현재 게임은 그런 이론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미적 가치든 체험적 가치든, 어떤 가치기준을 만들어내고 그 기준에 따라 작품들을 평가하는 과정이 바로 이론화이다. 현재 게임계는 앞서 말한 루돌로지적 입장과 내러톨로지적 입장 등이 서로의 '취향'에 따라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게임작품들을 평가하는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제작자나 소비자들은 나름의 기준을 따라 각자의 취향평가 기준을 세울 것이다.

한 예로, 데이어스 엑스는 게임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경험과 상호작용 요소들로 성공하며 이머시브 심을 널리 퍼뜨리는 데 한몫했다. 실제로 이머시브 심에 속하는 게임들은 게임 개발자가 정해놓은 연출이나 서사보다는 게이머가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가길 원하며, 이는 다른 예술 분야에선 이룩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 아케인 스튜디오의 디렉터이자 프레이의 리드 디렉터였던 라파엘 콜란토니오는 트위터를 통해 '좋은 스토리는 좋지만, 작가가 자신만의 스토리 속에 플레이어를 가두어 놓는 것보단 플레이어가 자기 스스로의 스토리를 게임 안에서 직접 쓰게 만드는 게 훨씬 즐겁다. 플레이어의 행동에 반응하는 건 영화가 할 수 없는 게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

하지만 최근의 AAA 게임들은 사실상 게임 플레이는 뒷전이고 영화같은 스토리와 연출을 부각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이러한 AAA 게임들은 '게임'이 아닌 '영화'의 하위호환이 되는 것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과 같다.[32]

3.5. 게임이 예술이라면, 게임은 어떤 예술인가?[편집]



3.5.1. 기존 예술에도 있는 요소[편집]



3.5.1.1. 서사성[편집]

문학, 영화 등 시간예술에서 보는 경우 주로 서사성 얘기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게임에서 서사성보다는 유희성을 중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 다시 서사중심주의자들은 '그 유희성도 결국은 완급 조절이 되는걸 보면 서사성과 뭐가 달라?' 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감각경험의 완급을 조절하다보면 시간 경과에 따른 경험이 복잡해지게 되는데, 이러면 점점 서사성이 만들어진다는 것.

어쨌거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게임의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러티브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게임 중간에 컷신을 삽입하여 플레이어에게 이야기의 흐름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플레이 도중의 상황을 통해 플레이어가 자연스레 이야기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도 도입되었다.[33] 많은 전문가들이 게임의 스토리 제작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문학 장르 못지 않은 깊이감과 몰입감이 있는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다른 매체와 게임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영화나 소설의 경우 글이나 영상을 통해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전개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게임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게임의 결말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이 수동적인 시청자에서 적극적인 행위자로 성격이 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이야기를 감상하던 때와는 달리, 유저들이 선택하고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스토리는 다른 문화 콘텐츠와는 별개의 성격을 띄고 있다.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게임 속 캐릭터에 쉽게 동화될 수 있다. 이는 플레이어가 자신이 조종하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하게 되고, 따라서 이야기 상황에 대한 감정이입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동일화와 거리두기[34]는 예술에서도 독자론적 관점에서 중요시되는 요소로, 게임에서 이는 컷신의 유무, 주인공의 대사 분량 등으로 조절될 수 있다.[35]

또한, 게임 내의 스토리상 분기점에서 플레이어가 하는 선택은 결말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멀티 엔딩), 이는 무엇보다도 유저가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창조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36] 이는 아래에서 언급할 행위성과 연관된다.

3.5.1.2. 조형성[편집]

회화, 조각등 정지예술의 입장에서 보는 경우 주로 조형성을 본다. 쉽게 말하면 점, 선, 면, 색, 형태, 명암 등을 가지고 주로 이야기를 한다는 얘기.

쉽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저 게임 그래픽 좋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저니 같은 게임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나온 얘기기도 하고 말이다.


3.5.1.3. 음향성[편집]

음악에서 파악하는 경우. 게임에서는 시각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음향만 가지고 얘기하는 경우는 적다. 하지만 중요한 요소긴 하다. 크게 배경음악과 효과음으로 나눠서 설명이 된다.


3.5.2. 기존 예술에는 없는 요소[편집]



3.5.2.1. 상호작용성[편집]

그래픽이나 사운드가 게임에서 가장 먼저 1차적으로 다가오는 예술성이지만,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호작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게임과 직간접적으로 소통한다. 플레이어가 일정한 행동을 취한다면, 게임은 그에 맞춰서 변화 - 돈을 뱉는 간단한 행위부터 스토리 라인의 뒤틀림 등 - 한다. 게임은 이를 통해서 감상자에게 주제를 전달한다.

특히 이머시브 심 개발 철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개발자들은 상호작용성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존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경우 소비자가 그러한 작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작품과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게임의 상호작용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예컨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여러 정해진 시스템들을 먼저 깔아두고 플레이어가 도구들을 이용해 그 시스템과 상호작용하게 만들며, 결국 개발자가 예상하지 못 했던 창발적 플레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게임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에선 전혀 할 수 없는 요소이며, 상호작용성이야말로 게임만의 독자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3.5.2.2. 경쟁성[편집]

모든 게임에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나, e스포츠라 불리는 몇몇 게임들과 많은 아케이드 게임들에는 해당하는 내용이다. 스포츠에서 파악하는 경우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것을 게임과 공통된 요소로 볼 수 있다. 경쟁성은 상호작용성의 하위분류라 볼 수 있지만, 불쾌한 상호작용이 될 가능성도 있다.

3.5.2.3. 유희성[편집]

스포츠, 연극, 춤, 각종 제례 행위 등 광범위한 문화활동을 보면 놀이로서의 성격이 발견된다. 게임에도 이런 놀이로서의 성격이 보인다.

게임의 상호작용성은 특별히 놀이의 특성을 띤다. 위에서 말했듯, 게임학적 접근에 따르면 게임의 중심 특성은 유희성이다. 사실 대부분의 게이머와 유희성 지상주의자들은 게임을 놀이 경험으로 본다. 그리고 그 이외의 다른 요소가 굳이 게임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클레먼트 그린버그가 '회화는 평평해야 회화다' 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은 놀이여야 게임이고, 재밌어야 게임이다'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초창기 게임 개발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창조요소는 사람들에게 멋지고 열정적인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재미'였다.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는 게임들이 등장했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개발이 정점에 이르자 개발자들은 '현실감'으로 눈을 돌렸다. 캐릭터의 동작부터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고자 한 것. 현실과 흡사한 그래픽과 게임 구성, 이야기 등을 통해 리얼리티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37]


3.5.2.4. 행위성[편집]

역시 상호작용성의 연장에서 생각해볼 문제. 게임은 게이머에게 어떤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이 선택과 책임의 반복(피드백이든 루프든) 과정이야말로 게임의 주요 특징이 될 수 있다 보는 사람도 있다. 위의 유희성과 다른건 진지함의 차이 정도.


3.6. 현실적으로,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편집]


앞의 문단에서는 게임이 예술이 이론적으로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지만 이 문단에서는 게임이 현실적으로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토의하고자 한다. 모든 이상주의자와 많은 현실주의자가 알고 있듯이, 이상과 현실에는 엄청나게 큰 간극이 있고 이것을 넘기는 것은 때로는 불가능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3.6.1. 현실적으로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다[편집]


게임은 문화 집약적인 콘텐츠다. 기존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에 '조작'이라는 새로운 것을 넣은 것이다. 책도 예술이고 음악도 예술이고 영화도 예술인데, 그 모든것을 넣은 게임이 예술이 아니라는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된다.[38] 예술게임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없다고 말하지만 게임을 즐긴 문화를 향유하는 층이 기성세대가 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최근에 예술로 인정받은 문화 콘텐츠들만 봐도 명백한 과정이다. 소설도, 영화도, 만화영화나 드라마도 예술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은 항상 있어왔다. 특히 조작이라는 표현방식은 기존 컨텐츠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6.2. 현실적으론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편집]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첫번째로, 게임을 예술로 만드려는 집단의 존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임은 현대에 존재하는 문화산업 중에 손에 꼽히게 돈을 많이 소비하는 문화산업이며 이 소비량은 더욱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정도의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산업에서 예술가의 맘대로 제작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실제로도 게임 산업에서 예술가 맘대로 제작되는 게임들은 극소수의 인디게임뿐이고, 그 중에서도 명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손에 꼽힌다. 어느 시대에서나 예술가는 돈으로 자라는 꽃이고 돈이 적게 들어간 예술작품은 100% 상업적인 게임보다 예술성이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여기서, 똑같이 대규모의 돈이 소비되는 문화산업이며 예술작품도 매우 왕성하게 생산되는 영화산업과 비교해볼 수 있는데 여기서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게임을 예술로 소비하려는 소비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려보자.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를 예술로서 소비할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에는 예술을 소비해야 할 소비자가 존재해야 한다. 영화에는 그런 소비자가 많은 편이다. 게임에는 그런 소비자나 그런 흐름이 없다고 할 순 없으나,영화에 비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수 없다라는 주장하는 이들이게 가장 큰 힘을 실고 있는 게임 플레이와 스토리에 대한 부조화 때문도 있다. 흔히 이를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라고 부르는 이 주장을 대표하는 예는 너티 독의 언차티드 시리즈가 있을 것이다. 언차티드는 유쾌한 보물 사냥꾼 네이선 드레이크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플레이상 네이선 드레이크는 냉혹한 살인마이자 학살자다. 게임 플레이는 수십 혹은 수백의 사람을 죽이지만 게임 스토리의 네이선은 사람 좋은 보물사냥꾼이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 보물사냥은 그런 방향이 맞겠지만, 게임이 그런 방식으로 탐구한건 아니다. 보물사냥꾼으로써의 네이선, 학살자로써의 네이선은 차이가 크다.

소수의 AAA게임 스튜디오과 인디 스튜디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썼다. 인디 게임은 과감하게 폭력을 삭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대표적으로 워킹시뮬레이터 장르다.

4. 앞으로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편집]


그동안 앞으로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대다수 게임산업 종사자들은 상업적인 가치만을 중시하였고, 게임을 문화를 만드는 즐길거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4.1. 이전 시도의 의의와 문제점[편집]


이전 예술과 게임 관련 행사와 연구들의 의의와 문제점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4.1.1. 해외[편집]


해외의 경우도 사실 게임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려는 풍토가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 미국에서도 모탈 컴뱃 같은 게임은 폭력성과 선정성 면에서 미국 학부모들의 질타를 받았고, 이로 인해 ESA가 설립되어 자율규제에 나서기도 했다.# 근래에는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으로 게임이 지목되면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를 연구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39]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은 “게임이 실제 사회에서 폭력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연구조사 결과와 대법원 판결이 여러분 편이라고 해서 일반 대중도 여러분 편일 것이란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부통령과 게임업계관계자 회동에 참여한 크리스토퍼 퍼거슨은 “업계 관계자들은 ‘게임과 총기사고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 재차 강조했을 뿐, 누구도 긍정적인 제안을 준비해 오지 못했다”고 했고,“내 생각에 (부통령이 업계에 전달한) 메시지는 게임업계도 이미지를 더 좋게 할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이를 보면 외국이라고 딱히 더 나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래도 좀 더 나은 점은 게임 유저층이 장년층까지 두터워 사회에서 게임을 포용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사회문화적으로 더 다양한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게임업계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기존의 폭력의 쾌감에 중점을 둔 게임 외의 다른 게임을 시도하려는 노력도 많고 말이다.

사회와 게임계의 갈등 외에도 예술계와 게임계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문제로, 게임을 미술관 같은 곳에 '전시'하면 과연 80-90년대에 게이머들이 즐기던 그때 그 경험, 그때 그 향수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80년대에는 가정용 콘솔 카트리지로 나온 게임을 그냥 브라운관 TV와 연결하고 즐겼었다. 이때 게이머의 게임 경험은 철저하게 방안에서 사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 고전게임을 미술관에 전시하게 되면, 게이머는 공적인 공간에서 다른 관람자들이 보는 앞에서 게임을 즐기게 된다. 게다가 브라운관 TV가 단종되는 이상, LCD 화면이나 최근에 새로 만든 컨트롤러를 가지고 게임을 즐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됐을때, 과연 그때 그 감성과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케이드 게임도 예외가 아닌데, 90년대에 허름한 오락실에서 불편하게 게임을 즐기던 국민학생이나 중학생이, 성인이 된 뒤에 제주도에 있는 넥슨컴퓨터박물관의 깔끔한 전시실 안에서 게임을 즐길 경우, 이질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가장 심각한 건 온라인 게임인데, 그 특성상 다른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이런 게임을 전시장에 오프라인으로 전시할 경우 게이머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스미스소니언이나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전시 기획(큐레이팅) 상의 문제가 당장 업무상의 실질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시를 안할 수도 없다. 과거에 게임은 이러했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야말로 게임 산업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예술로 인정받는것도 결국 이런 예술기관들의 힘이 작용한 결과다. 이 문제는 국내의 게임 관련 박물관들도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이외의 게임문화 연구 면에서 보면, 아직 해외의 게임사들이나 게이머들도 게임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게임연구자들은 게임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별도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관련 연구성과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한 예로 게임학회#에 올라온 관련 연구논문의 경우 간략한 개요서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연구 성과면에서 깊이가 부족한 글들도 많다. 그리고 대다수 연구가 게임 제작 기법이나 게임 안에서 유저가 경험하는 과정같은 미시적인 연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게임과 사회, 게임과 문화의 영향관계 같은 거시적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코펜하겐 등을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모여 점차 연구성과를 쌓아가고 있으며, 이언 보고스트와 같은 연구자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성과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4.1.2. 국내[편집]


국내에서 지금까지 열린 게임과 예술 관련 행사들이 효과적이었는지는 좀 평가가 갈리는편이다. 사실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면서 어떻게든 끼워맞춰보려고 애쓰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게임업계 종사자들과 예술계 종사자들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서 진행한 행사가 아니라, 그냥 둘다 좋아하는 작가나 기획자들이 연 행사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붕 뜨는 느낌이 없지 않다.[40]

넥슨이 313 Art Project 갤러리에서 열었던 기획전 'BORDERLESS'의 경우 게임업계 종사자가 예술에 접근하려 한 경우다.# 하지만 이 경우 도리어 기존 예술을 의식한 나머지, 정작 게임으로 예술성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게임을 기존 예술로 담으려고 노력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임업계 종사자라면 게임으로 예술적 가치를 보여줘야 하는데, 이은석 실장의 <아바타 미러> 외에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41] 이진훈 작가의 <캠프파이어>가 디지털 매체를 사용했지만, 다른 영상 설치작업(video installation)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외의 작가들은 조각이나 회화로 자신들이 작업했던 게임작업을 옮겨담으려 했다.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기존 예술이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보여줘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못했고 전시회는 평이하게 끝났다. 게이머들에게는 전시회 자체보다 전시회에서 마비노기 2 캐릭터 모델링이 소개되었다는 것에 더 관심이 쏠렸다.#

경기도미술관[42]에서 열린 <바츠혁명전>의 경우 NC소프트 측은 자사의 원화가들이 그린 캐릭터 원화를 크게 키워서 벽에 걸어 전시했고, 다른 작가들은 사진이나 프로젝션이나 조형물들을 전시했는데, 둘 사이에 이질감이 심했다고 한다.(전시모습) 예술 애호가 입장에서는 NC소프트측이 전시한 캐릭터 원화의 경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투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43] 이런 일러스트는 형식상 기존 회화의 초상화나 포스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특별히 개념이나 메시지상으로 새로운 것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BORDERLESS'전에서 넥슨 작가들이 보여준 성의보다도 못하였다. 반대로 일반 게이머 입장에서는 일단 이런 전시 자체를 잘 안가는데다, 미디어 아트 작품을 보고서 '뭐하러 이렇게 난해하게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바츠혁명전>은 이상한 전시였다. 솔직히 바츠 해방전쟁에 참여한 게이머들이 정말 진지하게 울분을 품고 혁명의식을 가지고 그런 행위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내복단의 대다수는 혈맹이 사냥터 잡고 있으니 에라이 그냥 때려박자는 기분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 뿐이다.[44] 그리고 사실 엄밀히 따지고보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건 기본적으로 리니지 2를 만든 회사가 기획을 잘못하여 소수의 혈맹이 게임내 이권을 독점하도록 구조를 만들어놨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게임사 측에서 이 사건을 바로 조치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즉 어찌보면 근원적인 가해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 셈. 따지고 보면 꽤 곱씹어보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은 일인데, 이를 예술이랍시고 미화하는 행사가 과연 옳은 일일까?

한편 게임과 예술에 대한 관련 토론회의 경우 구체적인 방향이나 지침을 내려주지 않고 막연히 이상적인 구호를 외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앨리스온에서 열었던 <Next Level of Art : Game>의 경우 행사 규모가 소규모였던데다, 예술계쪽이 중심이 되고 반대로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호응이 저조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앨리스온에 소속된 사람들(유원준, 김상우, 정세라, 박상우)이거나 미디어 아티스트에 치우친 경우가 많았다. 미디어 아티스트의 경우 국내 작가(지하루, 그레이엄 웨이크필드, 이준, 랜덤워크스) 외에도 외국 작가(돈 리터, 모리스 베나윤, 토드 홀루벡) 등이 참여했다. 아쉽게도 게임업계 종사자가 발표를 맡지는 못하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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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Benayoun, <World Skin, a Photo Safari in the Land of War>, 1997

돈 리터나 모리스 베나윤의 경우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게임 소프트웨어나 코드를 사용해 어떤 작업을 했는지 보여주었다. 한 예로 베나윤의 작업 <World Skin, a Photo Safari in the Land of War>의 경우 가상현실 공간에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으면 찍힌 부분이 하얗게 변하는 작품이다. FPS게임의 구조를 가져와 전쟁이 종군기자에 의해 생중계되는 오늘날의 상황을 표현했다.[46]

다만 게임업계 종사자들 입장에서는 '저게 뭔가' 싶은 작품들이라 문제가 있었다.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방청객들의 경우 현학적인 예술적 가치에 대한 발표보다는 실무에 적용되는 기교나 노하우를 원했기 때문이다.[47] 때문에 행사에 참여한 게임업계 출신 방청객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당장 수익을 낼 수 있게(즉,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게) 게임을 만드는 데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이런 미디어 아트 작품에 얼마나 공감하고 영감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게임은 대중예술이고 상업예술이다. 상업영화, 광고, 방송 등이 그렇듯 대중을 겨냥해 팔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업예술은 사람의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다루는 것보다는 당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더 집중한다. 이런 상업예술은 철저하게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가치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48] 마치 패스트푸드가 영양보다는 자극적인 맛에 집중하듯 말이다.[49] 결국 적당히 상업성을 추구하면서[50] 예술성도 충족시켜주는 게임이 나와야 한다.

2013년 열린'게임은 문화다!' 토론회에서도 상업성과 예술성의 타협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진중권 교수[51] 등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게임공포증의 원인에 대해 진단했고, 이는 상당히 타당했다. 하지만 발표자들이 다들 게임은 예술이다 라는 구호는 외쳤는데, 구체적으로 '게임이 다른 예술과 비교해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고, 그래서 이런 점들이 게임의 예술성을 확정지어주는 구체적인 요소들이다' 라는 식의 정리가 거의 없었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타협에 대한 내용도 없었고 말이다. 문제는 이런 구체적인 사례는 직접 다른 예술을 접해보고 공부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것이다. 당장 미술, 사진, 음악, 영화를 깊게 파본 적이 없는 개발자들(특히 프로그래머 출신 개발자들)은 왜 사람들이 그 예술을 좋아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왜 그 예술을 좋아하는지 또는 싫어하는지 알아야 그걸 게임에 적용하든 빼든 할텐데, 그에 대한 구체적 원리나 이론, 실행지침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게임은 종합예술', '게임은 단순한 쾌락이 아닌 고차원적 욕구 충족'같은 식의 주장도 상투적인 구호에 그치게 된다. 단순히 그래픽, 음악, 스토리가 들어간다고 예술일까? 이는 논리가 빈약하다. 그냥 '온갖 맛좋은 재료들을 섞어 만든 요리는 당연히 맛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온갖 달고 쓰고 맵고 짠 재료들을 섞으면 음식쓰레기가 완성되지 명품요리가 완성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미 예술인 것을 재료로 게임을 만들었다고 게임도 예술이라고 주장하는건 논리적으로 오류이다. '게임은 어떠어떠한 방식을 써서 이용자에게 감각들을 전달하고, 이때 이용자는 만족을 느끼게 된다'라는 식의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영화를 예로 들면, 소비에트 연방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편집을 어떻게 하고, 그걸 통해 어떻게 긴장을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의 예술성이 결정된다 봤다. 그래서 그는 포템킨호 반란사건을 다룬 영화 《전함 포템킨》을 만들면서 시민들을 진압하는 러시아 제국 군인과 그에 진압당하는 오데사 시민들의 모습이 계속 대비 되도록 편집을 했다. 그렇게 해서 '권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관람자가 가지게 만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구체적인 방안을 통해 게이머가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가치가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들이라면, 페이블처럼 게이머가 선악행위를 선택해 그 행위에 따른 결과를 경험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저 놈들은 나쁘니까 몇 마리 잡아와' 이런 단순 노가다 퀘스트로는 이런 감정이나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예를 들어,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는 교육대상자가 좌절을 느낄 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면, 이 이론에 따라 게이머가 이득(캐릭터의 성장, 아이템 획득)을 경험하지 못하고 손실을 입도록 만들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학생, 선생님, 학부모들의 가치규범에 맞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플레이어의 레벨에 맞는 도전과제를 점층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는 이런 좌절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전과제를 제시하는 게임 제작 방식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구체적 이론과 지침을 만들지 못한다면 게임은 종합예술이라는 말은 허술한 주장에 그치게 된다.

다만 이 토론회에서 이화여자대학교의 이인화 교수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김광삼 교수가 지적한 부분은 의미가 있었다. 이인화 교수는 “게임업계가 한참 산업적으로 성장할 때 어느 누구도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고민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문화적 가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찾으라며 노골적으로 산업적 가치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 ‘게임은 문화다’는 말은 기성세대 대다수가 거부감을 나타내는 프레임이 됐다. 업계 스스로 자신들의 가치를 깎아 내린 셈이다”고 말했다.# 김광삼 교수는 중독법 논란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화난 사람’들과의 싸움인 만큼, 방법은 다양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광삼 교수 또한 중독법을 반대하고 있는 업계가 산업적인 성과만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성장과 성취만으로 칭찬받고자 하는 유년기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논리 등으로 대응하는 것은 화난 사람들끼리의 힘 싸움이고, 기회가 보일 때 손을 내미는 동작을 취하는 것 또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사실 대다수 일반인들은 그 사람이나 기업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느냐를 보고 그 기업을 옹호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출이나 수익성과와는 상관없이 그 기업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 기업이나 산업을 좋아하게 된다. 보통 우리가 군수기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아무리 수익을 많이 올린다 해도 '죽음의 상인'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이상 인식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 지금 게임 규제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도 이런 낙인효과다. 게임을 스트레스와 답답함을 해소하고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잠재노동력인 청소년과 청년들을 게으르고 폭력적으로 만든다고 묘사함으로서 유해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김광삼 교수의 말처럼, 그냥 자기 좋을대로 하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떼쓰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게이미피케이션을 적용해 교육 게임을 만들면 좋은 인식을 심는데 도움이 될텐데, 자신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방식을 유년기 아이처럼 고집하는 것이다.[52] 예술가라면 모를까 상업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면서 이런 마인드로 게임을 만들면 당연히 산업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업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소비자의 취향과 가치관이 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인화 교수나 김광삼 교수 역시 구체적인 사례나 가정을 들지는 않았다. 사실 한국 게임업계에는 게임을 안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게이머들도 불만이 많다. 강화나 캐시템같은 과도한 수익행위, 사행성 요소를 도입하거나, 노가다와 반복행위로 게이머를 질리게 만드는 게임 기획, 무엇보다 (MMORPG 장르는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천편일률적인 게임 문법을 고집하면서 다양성을 상실한 게임 시장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한, 화난 일반인 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쉽지 않다. 게이미피케이션이 당장 구체적인 방안이지만, 과연 그동안의 게임 개발 방식에 익숙한 개발자들이 이를 실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업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문화적 가치를 고민하고, 게임이 대중에게 문화 콘텐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 현재 게임 개발자들은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른다. 회사에서 개발만 하던 사람이 과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얼마나 알겠는가? 게임업계와 게이머라는 내집단이 공유하는 가치(폭력의 쾌감, 짜릿함 등)는 잘 알지 몰라도, 그 외의 외집단의 가치(안정, 평온, 훈훈함) 같은 것은 모를 가능성이 높고, 그걸 어떻게 게임을 표현할지 제대로 시도해 본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2014년에 열린‘게임 중독인가, 예술인가?’ 정책 토론회의 경우도 해외 사례들을 나열하고 가능성을 따져보는데 그쳤다. (당시 영상) (당시 나왔던 언급들) 게다가 '중독인가 예술인가' 토론회의 경우 국회에서 열려서 다분히 한국게임기업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자리같은 느낌이 강하였다. 그 결과 현재 한국 게임의 부정적인 면은 감추고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방청객 중 일부는 이런 토론 분위기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발언권을 획득한 한 방청객은 토론자들에게 금일 토론회의 주제가 모호하다고 먼저 지적했다. 게임의 중독성과 예술성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상호배타적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게임 중독법을 막기 위해 '예술'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다. 이어 방청객은 "애니팡을 해보면 예전에 어디선가 해봤던 게임같아요. 그런 게임들은 저에게 있어 예술이 아니에요"라고 발언하며, 새로운 창조물이 아닌 기존의 문화 콘텐츠와 유사한 게임은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너무 예술적인 사례만 말하는 것 아닌가? <리니지>같이 중독적인 게임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애니팡>을 하며 예술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답변한 진중권 교수의 대답이 사실 예술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진중권 교수는 “포르노가 잘나간다고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질문한 방청객 같은 인식이라면 그 어떤 예술도 저질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거 회화도 비너스 여신을 그렸다고 하면서 여성의 나체를 그려 남성 관람자의 성적 욕구를 채우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고, 연극 역시 디오니소스제 같은 경우 종종 쾌락과 방종으로 빠지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순수예술이라 생각하는 '고상하고 철학적이며 교훈적인 예술'은 지극히 일부다. 이것도 사실 대중이 예술에 가지는 일종의 편견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예술의 절대다수는 상업예술이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순수예술조차 상업화되어가고 있다.[53]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 관심을 끌려는 짓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 있었다. 그리고 그 관심끄는 방법도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바 없다. 폭력성, 선정성, 사행성 같은 초정상자극(Supernormal Stimuli)은 예나 지금이나 핫아이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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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4-20)

당장 카라바조젠틸레스키유디트 그림을 보면 엄청나게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그림들을 명화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이 성서의 유디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 때문에 면책을 받았고, 더불어 각 작가의 생애나 내력 때문에 또 면책을 받은 것이다. 카라바조의 경우 살인자이기도 했지만, 바로크시대의 주요 작가중 한 사람일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빛과 어둠 대비가 뚜렷한 카라바조의 방식은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젠틸레스키의 경우는 여성 화가였고, 당시에 여자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성폭행까지 당했었다.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그래서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여전사 같은 여자가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목을 베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자기가 그런 힘을 가지고 남자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림에 반영된 것이다. 이런 표현을 회화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에 페미니즘 미술에서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선정성이나 사행성도 사실 과거 문학이나 회화도 만만치 않게 얘기가 많이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통속소설을 금지할 정도였다. 아녀자들이 허무맹랑하고 선정적인 소설을 본다고 뭐라 한 것이다. 사행성도 마찬가지.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가진자들만의 것이었다. 이에 대비해서 하류층의 예술이라고 해야 할 민속공예품을 한번 생각해보라. 상류층은 자기들 자랑하고 뻐기기 위해서라면 돈을 쳐바르는데 아낌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직인(craftman)들은 상류층에 빌붙은 것이고, 이후에 이 직인들이 자신들의 기교와 제작철학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점차 장인(artisan)이 생기고 예술가(artist)가 생긴 것이다. 진중권의 언급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마사치오 같은 화가들은 어떻게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표현할지 고민했고, 원근법으로 이를 성공시키면서 자기네들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그게 폭력적, 선정적, 사행적인지 여부가 아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작품과 연관시켜서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었는가에 따라 폭력적, 선정적, 사행적인 작품도 명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54] 영화에서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영화로 이해받는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카타르시스도 비극을 통해 도리어 정화되고 치유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현재 한국 게임업계는 그런 자기합리화 노력조차 제대로 안한다는 것이다. 일부 한국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 대해 고민하고 발전시키려는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 기껏해야 '우리 게임을 보세요. 그래픽 죽이죠? 정말 싸움하고 총쏘고 전쟁하는 것 같죠? 이 액션의 쾌감을 함께 즐겨보아요.' 정도의 논리를 펼치며 양산형 게임을 팔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래픽은 영화나 방송이 더 좋은데 왜 굳이 실시간 연산 때문에 질이 떨어지는 게임 그래픽을 봐야 하는가? 액션영화에서도 액션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데 왜 굳이 액션게임을 해야 하는가? 누군가 이렇게 반론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지금까지 한국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문학, 음악, 미술, 영화처럼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들의 편협한 취향을 계속 반복하고 몰두하려고만 했다. 전투나 간단한 퍼즐 같은 '검증된 취향'에만 계속 호소하는 게임을 양산해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리니지나 애니팡도 예술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리니지가 폭력적이고 사행적이냐의 여부가 아니다. 그것을 통해 만족을 얻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과연 많은 사람들이 리니지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리니지가 예술인지는 의문이 된다.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훌륭한 즐길거리'인지 생각해봐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게임업계에게 중요한 건 현재 자기 위치를 아는 것이다. 단순히 '게임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네요. 편견에 가득찬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건 그야말로 애같은 생각이다. 이미 많은 즐길거리를 즐겨본 사람이 있다면? 게임만 즐겨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예술이나 즐길거리도 즐겨본 사람이 있다면? 굳이 게임에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광고카피처럼 '게임은 좋은 것입니다', '게임은 즐거운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학, 미술, 영화, 스포츠같은 기존 즐길거리, 인터넷같은 새로운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게임은 그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한국 게임업계가 지닌 게임성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은, 마치 과거 추상화가들이 조형성에 가졌던 환상적 자부심과 다를바 없다. 사람들에게 기회비용 면에서 게임을 선택하도록 게임의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가 결국 궁극적인 문제인 것이다.

현재 한국 게임업계의 문제점은 이런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게임 외에는 (또는 기존 게임에서 다뤘던 것 외에는) 잘 모른다. 다른 예술이나 즐길거리가 어떤 전략을 취하고 호객행위를 하는지 진지하게 연구한적이 별로 없다. 매체와 매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관심병자처럼 싸운다는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MBC 방송에서 PC방 전원을 끄는 걸 이들은 그냥 한심한 기자의 소양 문제로 돌려버린다. 그 이면에는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견제하려는 방송 매체의 의도가 깔려있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게임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한 창구로만 활용되고 있다. 전쟁 영화나 방송의 전쟁보도를 재소비하는 매체처럼 되고 있다. 그러면서 게임업계는 게임을 만들고 운영해야할 이유나 근거를 대거나, 현재의 게임 상황에서 발전하려는 노력 없이, 계속 엇비슷한 게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 결과 게임은 하위문화로 취급받고 있다. 오해할까봐 말하지만 이는 게임이란 매체 자체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사행적이어서가 아니다. 벽창호처럼 특정 분야에만 몰두한 결과,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매체를 뒷받침하는 하위매체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예술은 즐길거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예술은 고상한 것마냥 취급받는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이 폭넓게 다양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술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는다. 그렇게 계속 관심을 받으니 예술이 예술로 남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현상면에서 보면, 예술은 오래 기억되는 즐길거리다.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는 오늘날에도 각종 패러디의 수단이 된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수 있느냐? 만족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늘릴 수 있느냐? 그 만족이 오래 지속되느냐? 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란 허울에만 관심을 둔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만족을 주는 건 어린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이 인정하고 예술이라 인정해주는 작품을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임은 두 번째 문제, 만족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늘릴 수 있느냐의 문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젊은 남성층 같은 한정된 계층에 취향이 머물러 있고, 이는 게임업계가 특정 장르의 게임만을 만들기 때문이다. 당장 모험물 등은 마이너 장르가 되어버렸고,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새로운 게임 장르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에 질리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즐길 수는 없다. 그 전에 관심이 시들해지거나, 내가 죽게 된다.[55] 질림은 만족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서 소비자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예술은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그 자체이다. 왜 현대예술이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생각해보자.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 질리는 문제에 예민한 예술가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는 작업이 상투적이고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후대에 어떤 식으로든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예술가들이 했던 시도가 후대의 대중예술이나 상업예술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56] 결과적으로 예술은 상업적으로는 저평가 될지 몰라도, 그 가능성(potential)은 계속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게임업계는 기존의 장르 형식과 상업적 안정성에 얽매여서 새로운 시도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혁신없는 상업예술은 한때의 유행이 되어 사라진다.

이에 대해 이동연 교수는 다음과 같은 뼈있는 지적을 하였다.

회의 막바지에 산통을 깨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게임사가 지금보다 매출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게임산업의 규모는 크지만, 그에 비해 문화 연구 수준은 중세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정도다. 전부터 게임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말해 왔는데 이득만 추구하는 현재 상황을 보니 어쩌면 게임 중독법 발의가 당연히 벌어질만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매출을 줄이고 기업들이 문화 연구에 힘쓰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중독법이 나타나 업계의 목을 죌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게임과 문화에 대한 연구도 기업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중권 교수는 몇주 뒤 열린 제1회 대한민국 게임포럼에도 참석해 '미디어로서의 게임'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을 발표했다. 해당 강연을 정리한 글 진중권 교수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예술에 대한 세대간의 인식차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플라톤이데아론을 교조적으로 밀었는데, 플라톤의 그 논리대로면 형이상학적인 궁극의 존재를 배낀 것이 현실이고, 다시 그 현실을 배낀 것이 예술이 된다. 즉 순도가 떨어지는 저질이라고 본 것. 이런 태도는 당장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반박하기도 했다. 이런 논리 하에서는 새로운 것은 결코 나올 수 없다. 그저 과거에 얽매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외에 언론에 기고된 글 중에서, 김윤명은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법제도의 문제 등을 들면서 설명하기도 했다. 게임인은 예술인, 게임은 종합 예술

4.2. 향후 방향[편집]


인간의 감각은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감각을 만족시키려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 한국게임계에서는 이런 새로운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존에 안하던 것, 외부의 요소를 받아들여 융합시켜봐야 새로운 것이 나올텐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형식과 내용만을 반복하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내러톨로지스트들이 내러티브를 통해 시간상 다양한 감각경험을 계속 공급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게임성 지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유희, 놀이, 재미는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을 반복하는데 기반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한계가 쉽게 드러나게 된다. 게임에서 이는 양산형 게임의 반복과 게임불감증으로 이어지기 쉽다.


4.2.1. 현대 예술의 참고[편집]


게임이 예술의 영역에 다다르고 인정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현대예술들이 갖고있는 맥락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즉, 다른 분야의 예술들을 참고하고 발전방향을 찾아나가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기술이나 노하우, 철학 등을 익히고 배울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문학이나 영화등 기존 예술과 비교하면서 어떻게든 이런 기존 예술들 수준에 게임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해외 게임의 예를 들면, 비욘드: 투 소울즈 같은 것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물론 이런 예술성 지상주의 태도에도 단점은 있다. 예술성을 추구한 나머지 자칫하다가는 (게임성 지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놀이와 같은 재미 등의 요소는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에는 다수의 대중지향적인 작품들과 소수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있듯, 게임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4.2.2. 게임의 특성에 대한 연구[편집]


AAA 게임들은 '영화 같은 연출이나 스토리'에 집중되어 있다. 가령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대표적인 레일 슈터 장르로써, 영화적 경험을 줄 수 있는 작품들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런 영화적 연출이 게임에서 구현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이나 프레이, 메탈 기어 솔리드 5 같은 게임들은 연출이나 스토리보다 게임플레이를 부각시켜 플레이어와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또 역시 게임플레이와 내러티브, 사운드트랙이 완벽히 합치된 경우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둠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믹 고든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한 음악의 다른 부분이 연주되게 만들어 사운드트랙에서조차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부각시켰고, 이는 큰 호평을 받았다. 포탈 2에서도 이러한 인터랙티브 사운드트랙이 적용된 바 있다.


4.2.3. 주류 장르에서 벗어나기[편집]


한국 게임업계는 기존 게임 장르에서 벗어나 다른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다. 인디 게임은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아쉽게도 한국의 인디게임은 그동안 '소규모의 제작팀이 취미로 제작하는 게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해외의 경우 마인크래프트의 예처럼 성공적인 사례도 있지만, 한국은 아직 외국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게임이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인디 게임에 우호적이지 않은 게임 심의 문제 등도 있어 이와 관련된 반대 움직임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인디게임은 독립영화처럼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예술성 추구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 대다수다.[57]

이를 지원하는 메이저 업체의 지원이나 공모전등의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58] 공모전의 경우 해외는 인디펜던트 게임 페스티벌 같은 공모전이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제대로 된 공모전이 없는 상황.[59]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기능성게임 아이디어 공모전이 있다.# 2014년에는 'Out Of Index'라는 실험게임 페스티발이 열리기도 했다.#


4.2.4. 다학제간 연구하기[편집]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소비자가 되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가치있어 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기존 인문학, 사회과학의 연구 결과를 참고해도 좋고, 아예 이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해 봐도 좋을 것이다. 예술 전공자와 공학 전공자의 협력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제 부부관계이기도 한 크리스타 조머러(Christa Sommerer)와 로랑 미뇨노(Laurent Mignonnea) 듀오가 있고, 아니면 공학이나 예술 전공자가 다른 쪽에 통달하여 그것을 원래 자기 쪽의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도 있다.

물론 이쪽은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렵다. 이건 다시 말해, 게임 개발자들(특히 프로그래머들)이 기존 예술들에 통달하고 그걸 자유자재로 코딩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예술가나 디자이너가 프로그래밍에 통달하는 것) 하지만 일부 해외 미디어아티스트들을 보면 의외로 예술적인 면과 공학적인 면을 둘 다 가진 사람도 있다.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은 셈.


5. 참고자료[편집]


게임과 예술에 대해 언급한 자료를 적어주기 바람. 웹문서, 영상 항목에는 게임 관련 웹진이나 게시판에 작성된 좋은 글들을 적어주기 바람.


5.1. 웹문서, 영상[편집]


'건전한 게임'이라는 오래된 유령에 대해
대한민국 게임 평론의 단편성과 저널리즘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
낯설게하기에 대하여
비디오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왜 '구린'가?
[EBS 다큐프라임] 게임에 진심인 편 3부 -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


5.2. 웹사이트[편집]


예술로서의 비디오 게임
게임학
아트 게임
논게임
게임학회 홈페이지
예스퍼 율 루돌로지스트 홈페이지
엘리스온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게임의 예술화? 예술의 게임화? 이제는 게임도 예술이 되는 세상 (PDF)
게임, 이젠 '문화'다 ③: 해외에선 이미 '게임의 예술화' 시작됐다
게임과 예술, 서로 영향을 주는 중: 제2회 뉴미디어 아트 국제 심포지엄 개최
게임과 예술성 :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5.3. 책[편집]


예스퍼 율, 캐주얼 게임 : 야스퍼 율, 제스퍼 율, 제스퍼 주울 등 표기가 다양하다. 덴마크어 표기법에 따르면 '예스페르 율'
제스퍼 주울, 하프 리얼
제인 맥고나걸, 누구나 게임을 한다
곤살로 프라스카, 비디오 게임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르면 '카유아'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호이징아, 호이징어 등 표기가 다양하다.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르면 '하위징아'
유원준, 뉴미디어 아트와 게임 예술
이상우, 게임 게이머 플레이
미구엘 시카트, 컴퓨터 게임의 윤리
김겸섭, 디지털게임의 재발견
이경혁,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번역 이동휘)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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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C는 비디오 게임의 '예술적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전형적인 인간 찬가. 이 영상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게임시장을 보고 한 이야기지만 국내 게임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2] 문서명으로 '예술로서의 게임', '게임 예술', '예술 게임', '게임은 예술인가?', '게임의 예술적 가치', '게임의 예술성에 대한 논란'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으나, 검색이 용이하게 하기 위해 편의상 간결한 '게임과 예술'로 문서명을 잡았다.[3] 학식이 있음을 자랑하는 것.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4] 예술 쪽의 경우 영화나 만화 분야는 그나마 덜하지만, 문학이나 회화나 조각 분야는 정말 호불호가 극명하다. 시간 대비 제공하는 정보의 차이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전자는 역동적인 움직임이나 묘사를 통해 바로 이해할 수 있지만, 후자는 정적이고 시간이 짧기 때문에 대부분을 관객의 해석에 의지하는 것. 예술이 돈지랄 소리를 듣는 것은 이렇게 뜬구름을 잡는데도 명작이라며 고가에 거래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게임은 모두들 알듯이 드러내놓고 돈을 추구하기 때문.[5] 기업 입장에서는 게임을 활용한 마케팅은 어찌보면 장기 농사의 결실을 맺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6] 서구권의 프로게이머들이 증언하듯이 유럽이나 미국이라고 반드시 더 관대하지만은 않다. 정확히는 서구에는 50~60대에도 게임을 이해하는 계층이 '소수 존재'하지만, 한국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게임에 적대적인 대중적 분위기는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젊은 세대에서는 한국이 더 우호적인 반면, 중요한 정책결정이나 자본투자 학술이나 예술분야에서는 서구의 경우 게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포진한 반면 한국은 거의 멸종수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7] 물론 이 양방향 소통이 완전히 동등한 관계의 양방향 소통은 아니다.[8] 물론 신세대도 나이가 들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성세대의 즐길거리를 즐기게 되기도 한다.[9] 정확히 말하면 여성층이 더 많이 즐긴다. 남성 장년층은 영화관에 잘 가지 않고, 방송도 뉴스 위주로 보니까. 따라서 드라마를 대중매체라 부를 수 있다면 게임도 대중매체로 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10]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데, '인디게임은 비상업적이고 예술을 추구한다' 라고 성급하게 묵어버리면 안된다. 인디게임은 개발자의 독립성를 추구하는 게임의 포괄적 개념이고, 개발자의 성향에 따라 대중성을 추구하는 게임이 될 수도 있고, 예술적이거나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임이 될 수도 있다.[11] 물론 인디게임이 대자본의 간섭을 받는 대규모 개발 게임보다 예술적,실험적 시도를 하기는 훨씬 쉽다.[12] 참고로 모든 인디 게임이 새로운 예술 형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AAA 게임 등에 비해 경영진의 발언권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예술성을 추구하기 훨씬 쉽다는 뜻이다.[13] 순회전시를 한 박물관 목록과 전시 기간은 다음과 같다.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Washington DC (March 16, 2012 – September 30, 2012), Boca Raton Museum of Art in Boca Raton, Florida (October 24, 2012–January 13, 2013), EMP Museum in Seattle, Washington (February 16, 2013–May 13, 2013), Phoenix Art Museum in Phoenix, Arizona (June 16, 2013—September 29, 2013), Everson Museum of Art in Syracuse, New York (October 25, 2013–January 19, 2014), Hudson River Museum in Yonkers, New York (February 15, 2014–May 18, 2014), Toledo Museum of Art in Toledo, Ohio (June 19, 2014–September 28, 2014), Flint Institute of Arts in Flint, Michigan (October 25, 2014–January 18, 2015), Chrysler Museum of Art in Norfolk, Virginia (February 13, 2015–May 10, 2015), Memphis Brooks Museum of Art in Memphis, Tennessee (June 6, 2015–September 13, 2015), The Patricia and Phillip Frost Art Museum at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in Miami, Florida (October 9, 2015–January 25, 2016) [14] 이게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다. 미국은 이미 디자인 제품도 예술로 생각하고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미국은 생각보다 예술로 인정하고 전시해주는 분야가 넓다. 어쨌든 자국 문화와 예술을 넓혀준 '문화유산'이니 말이다. 사실 게임이야말로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고 발전한 '문화산업'이자 '예술'인 셈이니 이정도 대우를 해주는 게 무리는 아닌 셈. 참고로 영화는 지금은 할리우드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처음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에서 시작됐다.[15] 굉장히 단순하지만 인생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게임이다. 게임에 대한 정보는 디자인과 플레이 번역소 참고.[16] 게임에 대한 정보는 네이버 블로그 참고.[17] 해외 이용자들의 반응은 Nostalgia Critic이 유튜브에 올린 Are Video Games Art? 에 달린 댓글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8] 그리고 이버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19] 사실 이버트 본인도 게임을 몇번 해봤고, 완다와 거상도 호평하는 등 게임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건 절대 아니지만, 최근 들어 몇몇 게임들이 유사영화 형식을 띄자 게임과 예술의(그 중에서도 영화) 경계를 헷갈려 발생할 혼란을 우려해 저런 평가를 내린것이다.[18][20] 재밌는 건 코지마 자신이 굉장한 영화광이었고, 대표작 메탈 기어 솔리드부터 시작해 코지마의 작품들은 컷신이 매우 길게 들어가 있고 상당히 영화적인 연출이 강조된 게임이 많아 작가주의 개발자의 대표자로도 많이 거론된다는 점이다.[21] 존 카멕도 이전에 게임의 스토리는 단순해야 한다는 식으로 비슷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22] 한 예로 카누도의 분류법에서 조각은 건축에 부속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회화도 마찬가지다.[23] 이는 당연히 하수 디자이너의 이야기. 고수나 지존 디자이너는 예술가 못지않게 자기 작업을 철학적으로 풀줄 안다. 당장 에코디자인을 철학없는 공산품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게다가 디자이너와 예술가를 넘나든 작가들도 많다. 마그리트워홀은 애초에 상업 디자이너였다.[24] 반대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드벤처/시뮬레이션의 요소가 없이 선택지 분기로만 진행하는 비주얼 노벨을 게임이 아니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25] 프라스카와 에스펜 오르세트, 예스페르 율(Jesper Juul) 등이 루돌로지의 주요 연구자들이다.[26] 향간에는 존 카멕이 이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런 말을 했더라도, 현재 하드웨어 한계상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27] 이는 칸트가 주장한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칸트 문서의 미학 문단을 참조.[28] 이는 4번째 문단과 이어진다[29] 게임의 스포츠화에 대한 시선도 이와 동일하게 바라보기도 한다.[30] 특히 게임규제, 게임중독법, WHO의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록 등과 같이 게임규제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31] 사실,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마인크래프트 이용불가 사태가 마인크래프트 자체가 청소년에게 유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XBOX Live로의 계정전환에 따라 미성년자의 이용이 제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32] 2016년 출시되었던 둠 리부트가 고평가 받은 이유를 생각해보자. 베데스다와 이드는 '가장 둠스럽고 클래식 FPS스런, 어찌보면 요즘 AAA급 게임과는 동떨어진' 방식을 선택했다. 컷신이 나올만한 상황에 NPC가 뭔가 지껄이려는 홀로그램 패널에 죽빵을 갈기고, 머리 아프게 퍼즐을 풀어야 할 법한 상황에서 닥치고 주먹질과 발길질로 전부 때려 부수고, 게임 내내 악마를 찢고 죽인다라는 게임성 하나를 강조했다. 컷신과 퍼즐에 질려하던 유저들은 이 화끈하고 심플한 이드의 방식에 전례없이 찬사를 했다.[33] 스토리 전달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오는 것에서 나아가, 게임이라는 매체 그 자체를 통해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게임이 영화로부터 독립한, 진화라면 진화라고 할 수 있을듯. 이 방식을 제대로 구현해낸 초창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하프라이프 시리즈.[34] 독자가 작품 내 상황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것. 몰입을 방해한다기에 왠지 쓸모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독자로 하여금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자면 작품이 과격한 내용을 다루는 경우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독자가 캐릭터에 빠져서 작품의 의도를 놓치기 쉽다. 거리두기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은 사실상 프로파간다나 마찬가지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미학이나 극문학 등을 배워볼 것.[35] 한 예로, 컷신과 주인공의 대사가 전혀 없는 데드 스페이스1을 들 수 있다. 컷신과 대사가 생기는 2, 3편에 비해 몰입도가 압도적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36] 물론 분기점에서의 선택이 뒷이야기나 결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첫 플레이 기준으로' 플레이어의 몰입을 돕고 게임 내 상황에 대해 플레이어가 깊은 고민과 사색을 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의 기능을 한다.[37] 다만 2000년대 들어 게임의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다.# [38] 하지만 예술의 담론은 애당초 상식이라는 범주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39] 오바마 대통령은 게임에 부정적인 모습과 긍정적인 모습을 둘다 보여준 바 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은 Grand Theft Auto IV를 비난하였지만,# 18개 게임 안에서 선거 흥보를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게임 분야 전체보다는 GTA같은 폭력적인 게임에만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건 미국에서는 대선을 주제로 한 정치교육 게임도 나왔다는 것.# [40] 당연한 얘기지만 예술계에도 게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은근히 많다. 솔직히 30대 이하 젋은 작가들 치고 게임을 아예 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41] 디자이너 출신인 이은석 실장은 게임의 가치가 우발적인 상호작용성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한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우발적인 상호작용성은 계획대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경험,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문학이나 영화는 정해진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친다. 그래서 오래 즐기기 어렵다. 하지만 게임은 유저가 직접 참여해 과정을 변화시키고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 그 결과 적어도 문학이나 영화보다는 플레이타임 면에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다. (물론 만족감이 지속되는 시간 면에서 보면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특히 마인크래프트 같은 샌드박스 게임은 이런 다양한 가능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다만 FPS나 RTS 게임 등의 경우 이런 우발적 상호작용성이 있지만 게임 규칙과 방식 면에서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의 다양성이 상당히 제한된다. 2014년에 공개한 야생의 땅: 듀랑고의 경우를 보아도 이은석 실장은 창발(創發, Emergence)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창발 개념은 우발적인 상호작용성을 구현하기 위해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도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온 개념이다.[42] 참고로 경기도미술관에는 건덕후도 있는 모양인지 작은 전시실에서 건담 프라모델 동호회의 프라모델을 전시하기도 했다.[43] 모더니즘 미술 이후 미술의 역사는 회화의 한계와 기존 미술의 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역사를 거쳐온 시각예술계의 입장에서 보면 바츠혁명전의 그림들은 되려 19세기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온갖 시도를 거친 1970년대 이후의 현대 미술에서는 고전 회화의 형식이나 서사를 빌려오는 등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바츠혁명전의 그림들처럼 고전 미술의 양식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아니다.[44] 근데 사실 이렇게 따지면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대중들도 딱히 각자가 혁명의식을 공부하고 참여한 건 아니다. 애초에 이 당시 혁명은 소수 지식인 및 상공인(부르주아)이 대중들을 선동시켜 일으킨 일이니.[45] 뒷 이야기에 따르면, 행사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지원비도 부족해 원래 계획했던 발표자를 섭외하지 못했다고 한다. 해외의 유명한 게임 디렉터들을 부르려면 항공비나 숙박비 등 돈이 많이 들어 어려웠고,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들 중에서는 행사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고.[46] CNN 등 주요 방송사들은 걸프전쟁 이후 전쟁터를 생중계 해왔다.[47] 하지만 이런 태도도 문제인 게, 그 기교나 노하우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공감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예술적 가치에는 서사성, 조형성, 사회비판 등 여러가지가 있고, 이 가치에 따라 표현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 일례로 추상미술은 조형성을 중시해 서사성과 사회에 대한 언급을 배제한다. 반면 사회비판 영화는 조형성보다는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을 강조한다.[48] 사실 대다수 예술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은 이런 감각적 요소에만 집착하는 것도 사실이다.[49] 물론 상업예술도 삶의 가치에 대해 말하긴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가치는 양념으로서만 사용된다. 상업예술의 1차 목적은 돈을 버는 거지 사람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다.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니까 상업예술을 그렇게 만드는 거란 얘기다. 돈을 포기하고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상업예술은 없다. 심지어 요즘은 순수예술도 이렇게 상업화되고 있다.[50] 게임으로 치면 강화나 캐시템이나 랜덤박스 같은 요소가 상업성 추구에 해당할 것이다.[51] 진중권은 이미 90년대부터 미디어 아트 및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추구하는 UAT(Ubiquitous Art & Technology)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디어 아트에 대한 책도 몇 권 낸 바 있다. (진중권 문서가 편집제한 상태여서 이 글에 각주처리함)[52] 다만 모든 게임 회사가 교육 게임을 만든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53] 물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54] 심지어 약간 무리수이긴 하지만 GTA 시리즈를 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볼 여지가 없는건 아니다. GTA5의 경우 트레버 필립스가 정부 관련 미션에서 외국인 전기기사에게 행하는 고문 장면을 애국자법으로 인해 인권이 침해당할 가능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게임이니까 가능한 표현이고,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현이라는 주장. 하지만 그에 반대되게 너무 혐오스럽다는 의견도 많으니 보편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내용으로 주장하기는 어렵겠다. 사실 예술계쪽에서 엽기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렇게 하지 말자' 또는 '이걸 보고 한번 현실을 생각해봐라' 정도이지 진짜로 그렇게 하자는 건 아니다. 반면 게임은 가상이지만 생생하게 거북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55] 마약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56] 대표적으로 MTV의 뮤직비디오는 비디오아티스트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고, 턴테이블 믹싱은 사운드아티스트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57] 헌데 이럴 수밖에 없는게 그만큼 한국 인디게임은 사정이 열악하다. 일단 팔 수 있어야 게임을 멋지게 뽑아내든 할 텐데 그게 안되고 있는 것. 국내 인디게임의 문제점은 다음 슬라이드에 요약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58]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인디게임인데 메이저업체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것이다.[59] KGDA에서 대한민국 인디게임 및 아이디어 공모전(http://www.gamecompo.or.kr/, http://www.ggdc.or.kr/)을 연다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