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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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高句麗
고려 | 高麗

Goguryeo(Koguryŏ)

파일:고구려 군기.svg
군기[1]

파일:대한민국 국가지도집 고대 강역도.png

기원전 37년[2]~서기 668년 12월 3일[3] (70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조선
현도군[4]
고구려현
당나라
안동도호부[5]
발해[6]
부여
소고구려[7]
고구려부흥운동[8]
예맥계 소국들[9]
통일신라[10]
패서 호족 보덕국
국호
졸본부여[11] → 고구려[12] → 고려[13]
위치
한반도 중 · 북부, 요동, 만주 일대[1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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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1년 서안평 점령[1]
313년 낙랑군 정복
314년 대방군 정복[2]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성 천도
475년 위례성 점령
494년 부여 병합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왕조 멸망

수도
졸본성[15]국내성[16]평양성[17]
삼경
국내성[18] · 평양성 · 한성[19]
종족
예맥[20], 한(韓), 말갈[21], 거란, 실위
언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구결
종교
토속 종교[22], 불교[23], 도교[24]
정치 체제
제가귀족제 →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태왕(太王)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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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고(高)[25]
계승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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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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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북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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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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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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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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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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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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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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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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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호
2.1. 표기
2.2. 발음
7. 경제
9. 국력
10. 영역과 행정구역
11. 외교
12. 멸망 이후의 고구려인들
14. 관련 사료 목록
14.1. 한국
14.2. 중국
14.3. 일본
15. 고구려/문화재
15.1. 유적
1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22. 기타
2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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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또는 고려()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왕조 중 북쪽에 있었던 군주제 국가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점유했던 나라다. 넓은 북방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국가라는 점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의 또 다른 왕조인 발해와도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신라(991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다.[26]


2. 국호[편집]



2.1. 표기[편집]


언어
명칭 및 해설
한국어
고구려(高句麗, Goguryeo, Koguryŏ) / 고려(高麗, Goryeo, Koryŏ)

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고정하여 불렀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왕건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른다.
중국어
가오거우리(高句丽, Gāogōulí) / 가오리(高丽, Gāolí)[27] 현대 관화 기준이다.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丽'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28]

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kˤaw kˤo rˤe",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ɑu kəu liᴇ"로 발음했다.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kˤaw rˤe", 중고한어로는 "kɑu liᴇ"로 발음했다.
일본어
코쿠리((こう((, Kōkuri) / 코라이((こう(らい, Kōrai) / 코마(((, Koma)[29]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 등으로 써 놓고 '코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베트남어
까오 꺼우 리(Cao Câu Ly)[30], 고구려(Goguryeo)[31]
전자는 한자의 베트남식 독음이고 후자는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를 따른 것이다. 베트남의 문자는 로마자를 기반으로 한 쯔꾸옥응으이기에 외래어를 표기할 때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살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KBS World에서는 이에 준하여 표기한 듯하나, 전근대의 한국 관련 고유 명사를 베트남어로 칭할 때는 한자음의 베트남어 독법을 적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대 티베트어
케우리(Ke'u-li)[32]
고대 튀르크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33]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
그리스어
무크리(Moúkri)[34]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35],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36]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일반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37]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38]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39] 또 일각에서는 고구려를 일컫는 고대 돌궐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40]그리스어 '무크리(Μούκri)'에 주목하여 구려가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였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 발해, 궁예가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41],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마다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자세한 건 후고구려, 발해, 태봉, 고려 문서로.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42]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ŏ로 표기했다.

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43], 구려(駒驪)[44]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45]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46]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이에 발해라는 국호는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발해의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학설도 있다.[47]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2.2. 발음[편집]


한편 당나라 대의 음운학책에는 고울 려(麗)자의 발음으로 '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말선초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일부 문헌에서도 麗는 '리'로 발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1445)》 제6장에 '麗運이 衰ᄒᆞ거든(고려의 운이 쇠하거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려(麗)는 리(离)로 발음하고 고려를 말한다(麗音离, 高麗也)"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한마디로 '고려'로 읽지 말고 '고리'로 읽으라는 소리다. 이 설에 따르면 지금처럼 '려' 음으로 바뀐 것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도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한편, 중국어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이 글자를 /lí/로 읽는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가 다른 문헌에서 '고리(高離)'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나, 한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부르는 '코리아(Korea)', '코리(Coree)'라는 이름, 돌궐에서 뵈퀼리[48], 인도에서 무쿠리, 중국에서 가오거우리(가오리), 일본도에서 코우리 등으로 불렀던 것을 참고하여 '본디 발음이 고리였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당대 한국어 발음과는 상관없이 단지 고려를 가리키는 중국어 음가가 각국에 전파된 것으로도 볼 수 있어 명확하지는 않다.

전자의 설을 토대로 고려의 원래 발음이 '고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용비어천가의 "麗音离" 주석을 위와 같이 해석하면 안된다는 반론이 있으며[49], 《삼강행실도언해(1481)》 등 동시대에 간행된 다른 한글 서적에는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이 한글로 '고구려', '고려'라고 분명히 적혀있기도 하다. 따라서 '고구려', '고려'라는 발음 역시 상당한 역사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전술한 귀납적인 몇 가지 사례만으로 '고구리'라는 음가만이 정당한 발음이라고 제시하고 이를 단정하거나, 나아가 현대에 통용되는 발음까지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 것은 학문적으로는 위험한 일이다.[50]

3.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문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정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경제[편집]


고구려의 초기 경제는 약탈 중심의 경제 체제였다.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오녀산성 지역은 농경에 불리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인구 역시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고구려는 현재 흔히 생각하는 중유목[51]국가가 아니었고, 그 적은 인구에서는 대규모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동원할 능력 또한 없었으며, 부여나 옥저와 같이 당시 이미 국가로서의 형성이 끝난 강대 세력을 공격해 이길 능력은 더더욱 없었다.

파일:17c926b60f430b4f.jpg

이 때문에 초기의 고구려가 했던 약탈은 쳐들어가서 대규모로 분탕질을 하는 식이 아니라, 부여 같은 강대한 집단의 변방으로 군소집단이 들어가서 말이나 소 같은 가축을 훔쳐서 달아나는 좀도둑질에 가까웠다. 위의 그림이 사실을 매우 잘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커뮤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을 재밌게 그린 거지, 사실은 군대로 쳐들어가서 대규모로 노략질한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부여의 말을 훔친 흔적은 확인되지만, 부여에 공세를 가한 역사적 흔적은 보이지 않기 때문. 고대사에서 수백 단위의 병력을 동원해서 노략질을 하면 임금께서 정벌했다는 식으로 기록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행적 과장법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대규모 노략질보다는 소규모 좀도둑질이 흔했음을 시사한다.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에 말이 충분해지자, 고구려는 적극적인 약탈 전쟁에 나섰고 대무신왕의 시기에 두드러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기마민족형 약탈이 시작되었다. 부여, 낙랑, 대방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 다수에게 고구려는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고, 전쟁터에서 화살촉, 갑옷,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은 고구려 약탈경제의 기본이었다.

약탈경제가 고구려 경제의 중핵으로 남는 것은 고구려가 만주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하는 시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위서 동이전(東夷傳)에서는 고구려의 3만 호 가운데 1만 호가 좌식자(坐食者)라 기술하였다. 이것은 "앉아서 먹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전투가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약탈해온 물건과 고구려의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먹고사는 일종의 상비군이었으며, 전쟁이 터지거나 약탈물이 필요하면 전장의 최선두에 서는 세력으로 추정된다. 전쟁에서 약탈물을 공출해오는 집단이 지배계급으로 세금을 걷고 그것으로 생활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세금을 군대에 희생시켜도 될 정도로 군대가 적극적인 약탈과 노략질에 동원되었음을 암시한다.

옥저, 동예, 읍루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던 고구려의 노략질은 2세기 말엽으로 접어들면서 천천히 그 규모와 방식이 온건하고 작아졌다. 이미 그동안 행한 노략질로 성장한 고구려군은 태조왕 시절에 약탈 중심의 군대가 아닌 정복전쟁을 위한 군대로 변모했고, 주변국들을 무너뜨리고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넓히고 가축과 특산품의 산지를 확보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인구 대부분은 농경으로 경제 체제를 전환하였으며 거대하던 약탈집단 좌식자는 기록에서 사라진다[52]. 그러나 고구려가 자리잡은 북부 지역이 농사짓기에 좋지 않은 장소라는 것은 당시에도 그랬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고국천왕의 치세에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국가주도 복지정책이자 환곡의 원조격인 진대법을 시행한다.

진대법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고국천왕의 시기에 고구려의 경제 체제가 중심을 약탈에서 농경으로 전환했고, 고구려군은 약탈군이 아닌 정복군이자 국방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회상을 시사한다. 이전의 고구려가 시행하던 축제는 대부분 약탈지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축제들은 대부분 추수감사절과 유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 체제 역시 확보되었으며, 동천왕의 시기에는 서안평을 공격하여 바닷길을 뚫으려고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 체제의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 확인된다.

그 결과, 미천왕의 시기에는 외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어서 그것을 내륙 지역에 가져다 파는 소금장수가 등장하고, 새경을 받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대적인 노동자의 사회상까지 확인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매우 고도로 발달한 경제적 편린이다. 소금장수가 있다는 것은 물건을 팔고 대가를 받는 체제가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경제 교역 체제가 확보되었다는 것은 곧 시장이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무너뜨리며 한반도 북부 최대의 농경지인 평안도 지역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서안평을 완전히 복속시키며 바닷길을 열어낸다.

광개토대왕의 시기에 고구려가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감행하며 삼베, 소금, 생선이 많이 나는 지역을 지속적으로 손에 넣었고,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면서 곳곳으로 도로망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인구가 많아야 수백만이었을 고구려가 수만 단위의 군대를 쉬지 않고 외부에 투사하고 성 수십 개를 지속적으로 깨뜨리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가가 고사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고구려의 경제가 이미 본궤도에 올라 백제와 신라를 압도했고, 나아가 3~5만 정도의 상비군만을 끌고 전 국토의 동서남북 대외 지역들로 종횡무진 누빌 수 있을 정도로 도로망이 정비되었음을 확인하는 근거다.

장수왕 시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력에서도 명백하게 중국의 왕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침투왕조의 전형을 보여주는 북위는 거대한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남송은 말이 부족하여 그들에 맞설 수 없었는데, 송서(宋書)에 의하면 고연에게 말 800필을 받아 그제서야 맞설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초창기 말조차 부족하여 좀도둑질로 충당하던 고구려는 이제 중원왕조조차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강대한 경제력을 갖춘 것이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넓은 평야가 있는 지역에 국가의 중심을 이동시켰다. 금속 세공, 도제의 기술은 갈수록 발달하여 호우명 그릇 등 삼국시대 전방위적으로 고구려의 물건이 확인되며, 모피와 삼베 등을 일본에 수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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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압도적인 수군력은 백제와 남송의 연결을 차단하고 사신선을 돌려보낼 정도로 확대되었고, 당시 수군력이란 곧 무역로를 지키는 세력으로서 기능하였다. 가야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 남부는 진흥왕이 가야멸망전으로 그 광산과 항구들을 접수하는 그 순간까지 고구려에게 제철량과 제철기술, 무역량과 해상력에서 압도당했다.

고구려는 경무법(頃畝法)을 이용하여 땅의 비옥도에 따라 땅의 면적을 분류했고, 정복지의 땅을 국유화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인구에 따라 밭을 나누었다 하여 구분전(口分田)이라 한다. 고구려의 농업 생산량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비록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안원왕의 시기에 평양성에서 내전을 벌여 2,000여 명이 죽을 정도의 접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물자가 생산되었다.

이후 고구려의 마지막 끗발이었던 삼국통일전쟁 시기 요동성을 무너뜨린 당 태종은 그 안에서 곡량이 50만 석이나 나와 놀랐다고 하므로,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고구려의 경제력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고구려의 무역로 역시 유지되어, 거란도, 신라도, 일본도 등의 무역로는 발해 시기까지 이어진다.

8. 군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국력[편집]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영명 7년[53]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54]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55]

에 세종[56]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7]

는 섭라[58]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59]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60]

《전당문》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는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한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디.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 만큼 위상이 높았고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생산력
건국 직후 고구려는 인구 3~6만호 남짓한 현도군의 변방, 압록강 상류의 험준한 산지에서 인구를 부양하며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판국이었다.[61] 그러다가 초기에는 간도를 차지하고 송화강과 요하 일대에 있는 동북 평원과 평안도, 황해도 등의 비옥한 땅을 석권하면서 전성기에 접어들고 높은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고 멸망 당시에는 대전을 치르고도 70만호의 남기는 여력이 구당서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 남조 대다수의 국가의 집계 인구가 50~90만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체급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고 또 그것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는지 알 수 있다. [62]

  • 군사력
고구려 초기에는 20,000~30,000명의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후에는 이 정도의 병력이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 되었다. 또한 일거에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야전에 투입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체급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대외적으로 백제와 가야를 굴복시키고 신라를 복속했고 중국으로부터도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63] 일부는 멸망 때까지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하고 발해 건국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후대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중/삼중 전선의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기에 고구려는 끝내 백제나 신라를 완전 병탄하여 자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 국제적 위상
초창기 중국의 대 고구려 외교 및 무력 투사는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선에서 정리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황제를 위시한 중앙 관료들이 직접 나설 뿐 아니라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중원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정도의 상대가 되었다.[64] 고구려 자신은 유목민족 세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중국의 북쪽 및 북동쪽 유목민족 전반에 대해 강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의 국왕은 중국 황실에게 동이교위라는 관작을 받았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 국왕을 동이 지역의 최고 패권국 수장임을 공인한것이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탁발선비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했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신라), 말갈, 거란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이웃 국가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고, 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65]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인상은 그 뒤로도 깊게 남아있어서 여몽전쟁 당시 몽골 제국쿠빌라이고려가 항복하자 당태종도 어찌하지 못한 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며 기뻐했고[66], 조선 초기에 조준을지문덕살수대첩으로 시를 써놓자 명나라 사신이 굴욕을 느낀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니 명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20여 일 만에 수도를 뺏기고 의주까지 도망쳤을 리가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이었으며 동시에 여러 유목민족을 자기 뜻대로 거느린 국가였다. 고구려는 중국이 여러 난세를 거칠 때도 꿋꿋이 세력을 키웠고 5호 16국 같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는 후연과 직접 겨루는 등 중국 안쪽으로도 영향력을 끼쳤으며(광개토 대왕) 중국이 남북조 시대로 개편되자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당히 밑으로 들어가면서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 했다.(장수왕) 중국 통일 왕조가 들어선 후엔 유목민과 연합하여 직접 선제 공격을 하는 등(영양왕)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10. 영역과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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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guryeo_seong.jpg
전성기의 영토
고구려의 주요 도성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눴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했고,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파일:천재 고구려.png
파일:비상 고구려 강역.png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太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太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파일:대한민국 국가지도집 고대 강역도.png
대한민국 국가지도집에 실린 강역도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북벌을 지양하고 남진에 몰두했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요하~송화강 선을 국경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등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권 안에 두고 중원 세력과 요서의 지배권을 다투면서 동몽골, 북만주, 요서 등지의 진출을 단행하였다.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구체적인 비정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팽창 시도는 역사 기록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파일:이인철 고구려의 부여와 말갈 통합 지도.png
말갈 영역 상당부분이 고구려에 포함된 지도[67]

고구려의 강역은 성곽을 깔아놓고 조밀하게 통치하는 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거점을 두고 통치하는 구역, 세력들의 복속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통치되는 구역도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이한 강역 비정이 나오곤 하는데 이 지도는 후기 부여, 말갈이 위치한 연해주와 동북만주 일대에만 신경을 썼지만 흥안령, 동몽골, 요서 등 다른 지역에도 비슷하게 견해 차이로 강역 비정이 달라지곤 한다.

파일:조선력사_고구려.jpg

북한의 경우에는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통합시켜 매우 방대한 영토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68]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 동부, 북-흑룡강 남쪽 류역, 동북-우쑤리강 류역을 넘어 흑룡강 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 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아래 표는 《삼국사기》에서 확인가능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시대의 성이다.

조리비서
북부여성
무자홀
절성
초파홀
풍부성
구차홀
신성/돈성
안동도호부 신성주도독부
파시홀
도성
비달홀
대두산성
오열홀
요동성
안동도호부 요성주도독부
옥성
백석성
다벌악성
안십홀
안시성/환도성
안동도호부 안시주
양암성
안동도호부 창암주
목저성
안동도호부 목저주
수구성
남소성
안동도호부 남소주
감물이홀
감물주성
안동도호부 가물주도독부
능전곡성
거시압
심악성
국내성/위나암성
초리파리홀
설부루성
골시압
후악성
자목성
내물홀
연성
면악성
개서압홀
아악성
감미홀
취악성
적리홀
적리성
안동도호부 적리주
소시홀
목은성
가시달홀
이산성
갑홀
혈성
절홀
은성
소시홀
사성

안동도호부는 9도독부+42개 주=51개 주[69]로 구성되어 있지만 32개만 확인되는데, 압록강 이북으로 서술을 한정한 영향으로 보인다. 나머지 19개 주는 확실하지 않지만 압록강 이남 한사군의 현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70]. 또한 발해의 행정구역으로도 족보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1. 외교[편집]


파일:고구려 삼족오.png 고구려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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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멸망 이후의 고구려인들[편집]


중원 왕조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간 총력전부터 시작해서 이남의 신라와 전선을 수십년간 맞대었던 고구려는 멸망 시점인 668년에 인구가 69만 7천여 호(戶)로 급감하게 된다.[71] 그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주로 신라, 발해,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토에 잔류하거나 을 탈출해 발해에 합류한 유민들은 훗날 발해 유민의 형태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더러는 말갈, 돌궐, 왜국 등으로 도피하였지만 수는 위의 세 부류[72]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는 대규모 망명, 강제 이주, 부흥운동의 여파로 여러 국가에 걸쳐져 있었다.[73] 타향으로 끌려가거나 객지에 머물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이 희석돼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을 잇게된 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보존해 종국에는 고려를 건국한 신라 내의 일파들이다.[74] 이들은 동족인 발해인들의 합류에 힘입어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의 원류(原類)를 구성하는 세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나아가 통일신라가 실패했던 세분화된 종족 정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된다.[75]

  • 신라 고려
첫째로는 신라에 흡수된 일파이다. 신라가 영역화해서 그대로 편입된 인구[76], 멸망 직전 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77], 안승을 따라 신라로 남하해 귀부한 4천여 호[78], 고구려부흥운동 세력[79]의 대다수와 이들하고 연계한 고구려의 반당(反唐) 백성들, 그리고 당나라 영주에서 탈주한 고구려 유민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고 패서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80]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듯 진흥왕 대부터 고구려 멸망 직후인 검모잠안승고구려부흥운동 시기까지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인들의 규모는 무시못할 정도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1][82]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신라가 무탈하게 차지해서 편입시킨 한성(漢城) 일대[83]와 패서(浿西) 지역[84]은 고구려의 심장부이자 내지(內地)로 일컬어지는 인구 밀집지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부의 부흥운동 세력[85]이 한성과 패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고, 먼 훗날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패서 호족들이 태동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직접 통치를 피해 달아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86][87], 고구려 부흥운동의 잔당 세력[88], 당나라에서 이탈해 신라로 탈출한 무리들[89]까지 합세하면서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은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을 주류로 하는 반자치적인 보금자리 혹은 엔클레이브로 남게된다.[90][91] 한편, 안승고연무를 위시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한 일파는 구 백제의 수도권 지역인 금마저보덕국을 세우면서 존속하다가 신문왕에 의해 서라벌과 남쪽 변방[92] 등으로 철저하게 사민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93] 상술한 두 부류의 고구려 유민들에 비하면 존재감은 낮지만 영동의 고구려계 유민들도 신라에 편입되면서 존속하다가 훗날 고구려계 호족들이 세운 고려에 합류하였다.[94] 종합해보면,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 중 보덕국을 구성했던 이들과 전쟁 포로로서 서라벌로 사민된 이들[95] 외의 대다수는 현재의 임진강과 그 이북인 패서 지역에서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다가 몇백년 뒤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를 세웠다. 그리고 이는 최종적으로 왕건[96]이 세운 고려로 이어지게 된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고구려의 적통은 사실상 신라에 편입되어 훗날 고려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계승된다.[97][98][99] 이러한 계승 의식은 훗날 직계 후손인 한민족에게로 이어져 고구려가 국내외에서 온전히 한국사로 인정받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100][101][102]

  • 발해 거란고려 금나라
둘째로는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뒤에 건국되었고, 발해 건국의 주체들은 한때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음에도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영주에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퉁구스계 말갈족[103]과 함께 탈출, 동쪽으로 이동해 동만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한다. 이후 발해가 초기 영역을 중심으로 확장하면서 요동과 동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옛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고 주변 말갈족들을 복속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발해인들은 보통 세 갈래로 또다시 갈라져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자신들을 정복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속된 부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남방의 또다른 고구려계 왕조인 고려에 대규모로 이주한 부류, 발해 고토에 잔류해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금나라 건국 이후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된 부류가 그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 유민들은 성향에 따라서 정체성을 유지한 쪽[104]거란족 혹은 여진족에 협조하면서 동화된 쪽[105][106]으로 또 나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해인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꾸준히 일어나 내부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다만 발해인들이 해당 나라 내에서 전체 인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한인(漢人)들과 더불어 선진 문물의 전수를 통해 요나라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만 한 점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최종적으로 여진족이나 거란족, 그리고 한족 집단으로의 동화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융화된다. 한편, 고려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인들과는 달리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질감과 고려 태조 대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된 포용 정책 덕분에 쉽고 빠르게 고려 사회에 적응하였다.[107][108]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발해 유민들의 수[109][110][111]에도 불구하고 신라계나 백제계처럼 부흥을 명분으로 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고려 내의 발해인들이 일찍이 주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112] 이는 툭하면 현지의 거란족이나 여진족과 갈등을 빚었던 요나라, 금나라의 발해인들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일각에서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발해 유민들을 꼽기도 하는데, 수뇌부의 다수가 전사하고 왕건 본인이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온 공산 전투의 궤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태세를 정비할 수 있었음에는 고려에 유입된 압도적인 수의 발해 유민이라는 인적 자원이 있었다는 것이다.[113] 고려에 정착한 발해인들은 주로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금 개척된 북방 지역[114]과 패서 지역[115]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남쪽 영토[116]에도 대거 자리잡아 훗날 한민족의 원류에 흡수,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 된다.[117][118][119]

  • 당나라
셋째로는 당나라 내부로 옮겨진 인구 중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집단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 및 연비 등 그 후손들, 그리고 당나라 군인으로 활동한 고선지이정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갈라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725년 당현종의 태산 봉선의식 때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구 왕족을 '고려조선왕'과 '백제대방왕'으로 형식상 존치시켜 당나라 경사(장안)에 거주시키는 등 내신지번으로 삼아 이용했다. 이들은 당에서 대를 거듭하고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사회에 동화, 중국인 집단으로 스며들었다.[120] 당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의 수[121][122]가 수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의 존재는 당 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낳았다. 당나라의 내지 각지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이용되거나 빈 땅을 채워 주민 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어 당나라 황실에서조차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당장 고선지나 이정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당의 팽창과 발전에 기여했고, 반대로 자치적인 항거 세력을 구축해 당 조정에 도전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처럼 상당수가 당에서 이탈해 발해, 신라, 말갈 등에 투화하였다. 그러나 탈주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 다수는 타국의 피지배층이 된 이민족으로서의 궁핍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123] 당장 당나라 조정에 입신양명한 몇 안되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신하였던 왕모중도 처음에는 노비였다. 궁극적으로 당나라 내지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발해에 편입되었던 고구려인들과 달리 고구려인으로서의, 나아가 고구려의 유예(流裔)로서 최소한의 자각조차 없는 채로 한족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 잔류 고구려인
넷째로는 요동평양, 평안도 지역에 계속 남은 집단인데 여기는 본래 황해도/평안남도와 함께 고구려의 삼경(三京)[124]을 이루는 핵심 지역[125] 중 하나였지만 수나라-당나라고구려 부흥군, 신라군이 얽히고 설킨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신당서》에 의하면 나당전쟁까지 끝난 시점의 요동에는 늙고 빈곤한 자만 남겨두고(弱窶者留安東), 나머지는 당나라 내지로 가능한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 사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특히 수도였던 평양성은 황폐화되었다.[126] 당나라로 강제이주 조치된 요동의 유력 민호들은 당나라의 관할에 들어간 항복한 11개의 성(城)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동과 압록강 이북의 안시성, 요동성, 오골성, 신성 등 항복하지 않은 성(城) 11곳은 고구려부흥운동이 실패한 시점에서 신라에 귀부하거나 당나라에 의해 점거당했을 때 말갈 등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127] 요동과 평양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거주 인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고려가 복원하기 전까지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인들은 고려 왕조에 의해 수복되어 한국인의 원류에 합류하였지만 발해 멸망 당시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던 요동의 잔류 고구려계들은 이민족 치하를 거치며 만주, 중국인 집단에 동화되었다.[128]

  • 북방 초원
다섯째로는 몽골 고원 방면 북방 유목민 사회인 돌궐 제국으로 유입된 집단으로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끌던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강토에서 먼 만큼 그 인구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후일 고문간과 고공의 모두가 돌궐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에 망명할 때 규모가 모두 합해서 만여장(萬餘帳)[129]에 달했음을 보면 적어도 일본으로 이주한 무리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돌궐 등의 초원 일대에서 생활하다가 당나라 측에 망명한 고구려 유민의 수만 합산한 경우이기 때문에 당나라에 귀부하지 않고 북방 유목민 사회에 잔류한 고구려인들도 상당수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당나라에 망명한 부류와 돌궐 등 북방 유목사회에 잔류한 부류 모두 현지에 동화되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몽골 고원 방면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대다수가 고구려의 내지(內地)나 핵심 거점 출신이 아닌 지리적으로 북방과 인접한 북만주 일대 성읍들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고구려의 주요 성읍 32곳 가운데 내미홀성(乃勿忽城)처럼 도망한 성읍이 7곳이나 되었으니 상술했다시피 몽골 등지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은 이들 도망한 성읍들을 출신으로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왜국
여섯째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집단으로, 《신찬성씨록》에서 52개의 고구려계 씨족이 확인된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됐지만 코마 후미야스처럼 일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130][131] 고마 신사 등이 일본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다. 다만 지리적 여건도 여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상 위아래로 나당 연합군에게 공격당하는 고구려의 상황 때문에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멸망을 전후로 적지 않은 수의 백제인[132]과 가야인[133]이 왜국으로 피신했을 때의 규모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13.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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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관련 사료 목록[편집]


고구려 관련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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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한국[편집]




14.2. 중국[편집]




14.3. 일본[편집]




14.4. 금석문[편집]




15. 고구려/문화재[편집]




15.1. 유적[편집]




16. 연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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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왕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동명성왕 고주몽을 시조로,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있으며, 일본에는 보장왕의 아들인 고약광의 후손 고마씨가 있고,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가 있다.


18. 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편집]




20. 고구려부흥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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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멸망 직후부터 활발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부흥운동에 투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등이 있다. 이때의 부흥운동 세력은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을 세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30년 뒤에는 발해가, 200년 뒤에는 고려가 건국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한 부흥운동이 되었다.


21. 고구려/창작물[편집]





22. 기타[편집]


  • 해외에서는 통일된 한국(Korea)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 지역의 역사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이유로 고구려도 북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134] 평양 등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도시를 비롯해서 상대적으로 남한보다 북한 지역에 고구려의 흔적이 훨씬 많은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낳는 이유다. 실제 북한에서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 북부의 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은 북한이라고 규정하고 교육 및 선전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할 목적도 내포되어 있다.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10,000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135]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 1999년 4월 동양 철학을 전공한 교수인 김경일[136]은 유교 문화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을 출간하여 국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김경일 교수는 "고구려가 있던 만주는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가까우며, 아울러 만주의 중심 도시인 하얼빈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에는 백인종인 슬라브인, 즉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여 살았으니 고구려인들은 러시아인과 혼혈이 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뉘앙스가 담긴 내용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말이다. 우선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된 때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였고,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그 이후의 일이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러시아인들이 진출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16세기 중엽에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활동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137]까지 러시아인들의 조상격인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 차지도 못했을 때였으며, 고구려에 백인종의 유입자체는 있었지만 주로 토하라인, 소그드인 계통의 종족들이었지 슬라브족은 아니었다 ,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혼혈이 될 일도 없었다. 아마 연해주나 시베리아 동부가 원래부터 러시아 땅인 것으로 잘못 알고서 이런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듯하다.[138][139]


23. 같이 보기[편집]






[1]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2]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문서로.[3] 무진(戊辰)년 계해(癸亥)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10월 21일, 율리우스력에서는 11월 30일이다(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중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했다.[4]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했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 졸본, 조나, 구다 등의 소국들이 군장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5] 나당전쟁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통치기관이다. 단, 아직 건재하던 때 약 22,800에서 33,200여 호(戶)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영주와 중원 일대로 강제 이주시켰다.[6] 영주 일대에서 탈출한 걸걸중상대조영의 고구려 유민 세력, 그리고 만주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들 외에도 속말말갈을 비롯한 친고구려 성향의 말갈 부족들이 힘을 모아 건국했다.[7]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다만 발해선왕 대에 이르러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발해 건국 세력 이외에도 패서(浿西)와 요동(遼東)에서 활동한 남북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들. 남부에서는 한성검모잠안승이, 북부에서는 북부여성의 고정문과 오골성의 고연무 등이 있다. 나당전쟁 당시 부흥운동이 꺾이자 이들 대다수는 신라에 합류했다.[9] 잘 알려진 동예, 옥저를 비롯해 비류국, 조나국, 개마국, 구다국, 주나국, 해두국, 행인국, 황룡국, 대수맥, 소수맥, 양맥 등 수많은 소국들이 초기 고구려 형성 과정 중 병합되었다.[10] 전북 일대의 보덕국민, 호로하 일대와 그 이북인 패서의 고구려인, 영동 일대의 고구려 유민, 그리고 요동 등 북방에서 대량으로 귀부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이 있다.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왕건 등 이들의 후손인 패서 호족들은 훗날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250여 년만에 부흥운동의 결실을 맺게 된다.[11] 동명성왕~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12] 동명성왕~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13] 장수왕~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태봉 궁예, 고려 태조가 이어갔으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 세계에서 한국의 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14] 영남의 신라와 그 주변부 그리고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흑룡강성, 연해주 남부의 유목, 수렵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후속 연구는 수십년 째 전무하다.[15]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6] →환도성→국내성[17] →장안성.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명왕 대에 국내성(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국내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평양 동쪽 황성(혹은 평양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이후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18]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 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환도'(丸都)의 '환'(丸)을 '중'(中)으로 잘못 표기한 기록으로 보인다.[19] 패서 지역에 속하는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인근으로 비정된다.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수도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설치됐으며 안승검모잠이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서는 통일신라가 차지했고, 이후의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비롯한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 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20] 주류 민족.[21] 흑수말갈, 속말말갈, 백산말갈 등.[22] 고구려/종교, 무속 문서로.[23] 소수림왕 시기부터[24] 연개소문 시기부터[25] 연노부 → 계루부. 건국 초기에는 연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왕위를 맡았으나 계루부가 진입한 뒤, 초대 동명성왕 혹은 늦어도 제6대 태조대왕부터는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동명성왕 또는 태조대왕 이전의 군주들이 해(解)씨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해씨 고구려설 문서로.[26] 같은 시기 중국대륙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등장했다.[27] '高句丽', '高丽'로 쓰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丽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28]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로.[29] 삼국시대 고구려를 가리킬 때[30] 베트남어 위키백과.[31] KBS World.[32]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33] 돌궐 〈퀼 테긴 비문〉[34] 《Historiam》, 자세한 설명은 해당 항목으로.[35] 《범어잡명》[36]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37]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38] 한편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39] 일각에서는 이를 현대 한국어 '고을'과 연관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중세 한국어에서 'ᄀᆞ옳'이었으며, 중세 한국어 자료인 용비어천가에서는 '조ᄏᆞᄫᆞᆯ(粟村)'이라는 지명 표기가 나와 본래 어형이 '*ᄀᆞᄫᆞᆯ'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ㅸ'이 'ㅂ'이었을 고대 한국어 시기의 자료에서도 기부리(己富利: 일본서기), 거벌(居伐: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으로 문증된다. 따라서 어중에 ㅂ이 있었던 '고을'은 고구려어 '*고로(溝漊)' 및 '*골(忽)'과는 다른 어원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40]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41]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42] 구글 검색결과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43]고려사》 〈윤관 열전〉.[44] 《고려사》 〈묘청 열전〉. 대화궁 팔성당에 모신 신의 명칭에 붙어 있다.[45] 태자사낭공대사비, 《대각국사 문집》.[46]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 장군문〉.[47] 《발해 국호 연구》[48]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49] '高麗'를 '고리'로 발음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50] 특히 '고구리 예찬론'자들 가운데서는 환빠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 유사역사학자들도 섞여 있고 이들이 기존의 주류사학계에 대해 '한민족의 위대한 고대사를 왜곡하는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라 매도하는 식의 선동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와 관련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51] 경유목은 양, 염소 등을 키우는 시스템으로 대표적으로는 옛 헤브라이와 외몽골 북쪽 지역의 몽골인, 조선 중기 해서여진 등이 있다. 반면 중유목은 말, 소 등을 키우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중부 몽골 지역의 몽골인(=몽골 제국을 세운 종족), 스키타이, 한나라 시기의 흉노, 조선 중기의 건주여진 등이 있다.[52] 논쟁의 여지가 다소 있는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 해체되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이후로도 다수 존재하여 고구려군의 한 축을 차지하였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다.[53]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54]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 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따지고보자면 남조의 국력이 고구려 북위 어느쪽에 가깝냐면 전자에 훨씬 가깝기도 하고[55]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56]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 선무제 [57] 마노 혹은 옥[58]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59]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60] 645년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에서 이에 맞서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모습이다. 중국의 기록은 물론 역사서에서 이와 같이 적군의 위용을 기록자 스스로도 공포스럽게 기술한 경우는 손에 꼽힌다. 대개 적군의 진영을 두고 어떤 진을 쳤다, 혹은 어디에 진을 쳤다는 식으로 기술하였고, 그 위용을 당대인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했다고 해도 대개 "~~하였으므로 XX가 두려워하였다"라는 식으로 기술하게 마련이다. 반면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마주한 당나라는 직접적인 감평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들이 느낀 감정을 기록에 그대로 투영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당나라인들에게 고구려군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공포성이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정사 기록에서 적군의 위용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포스럽게 표현한 경우는 사서를 통틀어도 한나라 시기의 흉노에게서만 나타난다.[61]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62] 북쪽에 자리잡은 고구려가 남쪽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떨어졌음은 자명하지만 하지만 워낙 영토가 넓은 탓에 실질적 가용 면적이 적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땅들 중에서도 요동과 서북한은 한반도 남부보다는 못해도 충분히 좋은 땅이었으며 전성기 한정으로는 한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까지도 보유했다. 동시대 중국의 하북 지역과 화춘 평야,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강남에 비했을 때 고구려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손가락 안에 꼽힌다.[63] 지배 성격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이 강성해지지 못하고, 상국으로 대접받으며 어떨 때는 고구려의 전쟁에 동원될 정도로의 역량이다.[64]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다가 그만두었고, 당나라도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아예 나라가 멸망해버렸다.[65] 결국 이는 신라와 전쟁을 벌인 나당전쟁에서 열세인 신라에게 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66]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고 국호를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주변국들에게 사실상 고구려 시즌2로 여겼다. 이를 실리적인 이유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바로 거란족의 요나라였고, 나중엔 외교 담판으로 인정하게 된다.[67] 흑수말갈이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사료들의 기록들과는 상반되게 중국과 한국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안거골부를 흑수말갈의 서남쪽에 비정하 것과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다.[68]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9094[69] 도독부에 직속한 현이 있어, 주 단위로 볼 경우 9도독부 역시 한 개의 주에 해당한다.[70] 영양왕 본기에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수군의 좌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방면으로, 우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나와있다.[71] 호당 구성원의 수를 5명으로 잡으면 약 350만의 인구가 집계된다.[72] 신라, 발해, .[73]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부흥군 수뇌부 일부와 당나라로 끌려간 12,807명을 제외한 인구의 절대 다수가 신라에 편입된 백제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백제인들처럼 고구려인들도 오늘날 현대 한국인, 나아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는 맞더라도 백제인들처럼 '절대 다수'가 한민족의 역사권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74] 정확히는 패서 호족과 주민. 검모잠 등이 주도한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실질적인 후계 집단이다. 전라북도 일대로 남하한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은 현지에 동화되었고 영동의 고구려인들은 패서의 고구려인들만큼 유의미한 세력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대개는 고려의 건국 이후 합류하는 식이었다.[75] 고구려인들이 삼한일통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76] 호로하(瓠盧河), 즉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인 송악, 정주, 파해평사현 등을 비롯한 경기 북부, 고구려 삼경(三京) 중 하나인 한성(漢城)과 고구려의 수도권인 패서 지역에 해당되는 황해도 전체와 평안남도의 일부, 그리고 영동 일대 등이 있다. 진흥왕 대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신라에 귀속된 국원성(國原聖)이나 남평양(南平壤) 등 한강 이남의 고구려인들은 논외로 한다.[77] 삼국사기 기준으로 연정토의 망명 당시 따라나선 귀신(貴臣), 즉 고위 관료들은 집과 땅을 하사받고서 서라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78] 670년대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고구려부흥운동을 후원하던 신라에 귀부한 집단과는 별개의 무리로, 이들은 보덕국을 따로 세워 대당 항쟁을 남쪽 지역인 백제 영토에서 이어나갔다.[79] 검모잠의 무리들로 일컬어지는 패서요동의 고구려 부흥군.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은 안시성부터 오늘날 파주까지 고구려 전역(全域)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만주 북부에 위치한 부여성(扶餘城)의 대수령(大守令)이었던 고정문(高定問)은 당나라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구려 백성 69만 8천여 호(戶)를 쉽사리 통제하지 못하면서 은 계속 애만 먹다가 발해 건국을 시점으로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만다.[80] 신형식 교수의 『통일신라사』 등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산말갈 출신으로 비정되지만 아직 비주류에 속하는 주장이다. 다만 일부 고구려에 동화된 백산말갈 등을 비롯한 여타 말갈족들은 더러는 신라에 합류해 구서당 중 흑금서당을 구성하기도 하였다.[81] 신문왕 대에 완성된 중앙군 체제인 9서당 가운데 말갈족의 흑금서당까지 합하면 총 네 개의 서당이 고구려계들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셋은 신라인, 둘은 백제인으로 구성되었다.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는 황금서당, 벽금서당, 그리고 적금서당이 있으며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에 망명한 말갈인들로 구성된 흑금서당도 있었다. 넓은 의미의 고구려계를 여러 분류로 구분했는데 신라에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따라 집단이 구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분할통치(디바이드 앤 룰, 소위 갈라치기)의 의도도 배제하기는 힘들다.[82] 삼국통일전쟁나당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내몰려 사상당한 것을 감안하면 신라로서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삼국을 통일할 실리적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인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개입 이전까지 양면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데에는 유능한 명군들과 뛰어난 명장들의 활약, 그리고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하고 강력한 방어망으로 둘러싸인 덕택이 컸다. 하지만 김유신이 사망하고 그와 함께했던 신라의 황금세대도 늙어가자 나당 전쟁을 기점으로 그 단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신라 본토 바깥의 전쟁에서는 소맥산맥의 도움은커녕 오히려 동고서저라는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지리적 방어막 역할을 제한적으로밖엔 못 해주는 구릉지나 평야에 최대한 인구를 때려박으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당전쟁 초창기 부족한 인구를 메우기 위해서 신라가 당장 조치한 일로는 투항한 고구려백제 귀족에 대한 관등 및 관직 하사 외에도 김품일, 김문영, 김천존, 죽지 등을 위시로 한 웅진도독부 정벌이 있었다. 이들 넷이서 옛 백제의 심장부이자 수도권이었던 웅진도독부의 82성(城)을 취한 뒤 해당 성읍들의 지배층과 백성들을 모조리 신라 내지로 이주시켰을 정도로 신라는 나름 절박했다.[83] 황해남도 재령군으로 비정. 고구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로서 평양성, 국내성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대성(大城)이였기 때문에 다수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과 비교하자면 경인 지역의 일부로 취급되는 인천광역시 같은 위상이라고 보면 쉽다.[84] 서울특별시하고 인천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 수도권 지역인 경기도 같은 위상이다. 본래는 낙랑군대방군의 영역이었지만 미천왕 대에 고구려가 정복하면서 성장한 배후지다.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요동, 국내성 일대와 더불어 고구려의 핵심 영토이자 실질적인 수도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85] 북부에서는 부여성(扶餘城)의 고정문(高定問)이나 오골성(烏骨城)의 고연무(高延武)와 같이 책성 • 안시성 • 요동성 • 신성 등 일대의 대성(大城)과 성읍들이 고구려 부흥세력으로서 대당 항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86] 주로 요동(遼東)압록강 일대, 그리고 책성(柵城) 등 동만주(東滿州)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로, 고구려부흥운동나당전쟁을 촉발시킨 신라군의 요동 공격 및 일시적 점유 과정에서 고연무(高延武)가 이끌던 오골성(烏骨城) 주민들처럼 신라로 남하한 이들이다. 이들은 나당전쟁 기간에 걸쳐 꾸준히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87]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예군 묘지명 中
[88]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이후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부흥군 세력 등.[89]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한 무리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무리와 더불어 안동도호부에 잔류하던 요동의 고구려인들.[90] 역설적이게도 나말여초에 이르러 신라가 잦은 민란, 천재지변(가뭄, 홍수, 지진 등), 삼림파괴,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쇠락하고 인구가 급감할 때, 패서 일대는 비교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윤순옥, 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91] 선덕왕 시절에 신라인들을 일부 패서로 사민시킨 바 있지만 원(原)신라 지역이 쇠락하면서 찰산후 박직윤(朴直胤)처럼 패서(浿西)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왕경인(王京人)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경우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 사회에 동화되면서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謨達)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신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후에는 김(金), 정(鄭) 등의 신라식 성씨들을 차용하는가 하면, 신라식 관등 체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였던 패서의 고구려 유민인 왕륭사찬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왕건의 조상이면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자 가운데 스스로 골품제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각간(角干)을 자처한 두은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무려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다.[92] 예를 들어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경(南源京).[93] 물론 일부는 전주 최씨나 일부 성씨들처럼 뿌리가 북방에 기인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94] 통일신라 당시 영동 지방은 원(原)신라 지역이 아닌 예맥의 땅 혹은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이쪽 지역은 실직국이라는 독자적인 나라가 있기도 했고 영서 지방의 맥국을 비롯해 기원을 따지면 동예의 후예로 엄연히 고구려의 가까운 친척이긴 해도 약간 다른 정체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에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한 패서호족과는 별개로 태봉이라는 약간 다른 정체성을 주장한 궁예의 홈그라운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는 상기했다시피 그냥 예맥인들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옛 영역으로 봤고 궁예가 몰락한 뒤에는 좀 남쪽에 있던 왕순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흡수되었다.[95] 사천 전투평양성 전투 당시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등.[96] 송악 출신의 고구려계 해상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의 후예다.[97]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고려는 고구려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신라와 백제의 병합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발해 유민들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이백여년에 걸쳐 대거 수용하면서 삼한 내의 개별적인 종족 정체성을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후기로 가서는 삼국을 모두 일정하게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고구려에 편중된 계승 의식은 희석되고 특히 고조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기에 몽골 제국의 침탈로 인한 우울하고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유구하다는 자존심을 위해 더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 또한 역시 평양을 기반으로 했던 왕조였기에 후대에도 삼국 중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가장 강조되었고 그래서 해모수는 아예 시조 단군과 동일한 신격으로서 합쳐지게 된다. 이런 인식에 힘입어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서 같은 사당에 합사되었다. 또한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단군에게 고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던 기자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다.[98] 고구려를 정신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된 북진 정책, 서경 중시, 강동6주 획득,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처하고 멸망 이후에도 이백여년 동안 부흥 운동을 전개한 발해 만큼이나 고려도 끈질기도록 선조들의 유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주변국들을 복속했듯이, 고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전성기 시절 요나라북송을 상대로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외교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탐라국, 여진족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등을 밑으로 두어 조공을 받는 해동천하를 일구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북송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궐에서 요나라 사신을 모욕해도 두 강대국들이 고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식은 아예 고려인들을 '고구려인 도적'이라는 뜻의 맥적이라 깐 적이 있다.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호령하던 여진족금나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와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을 정도로 고려를 경계하였다.[99] 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음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주체인 고려의 건국 세력, 즉 신라 출신의 고구려인들에게 합류하는 형식이었다.[100] 혈연 및 정신적인 계승의식은 차치하고서 논하자면, 오늘날 한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로 상당수는 고구려에서 유래하였다. 김치, 불고기, 젓갈, 된장 등의 식문화가, 온돌, 치성 등의 건축 문화가, 한복 등의 의복 문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악기로는 대표적으로 대가야가야금과 함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거문고가 있으며, 무형(無形) 문화로는 한때 고려시대 때 무신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수박의 후신으로 씨름 등이 전해진다. 언어의 경우 이병도와 이기문의 학설을 주류로 취급하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현대 한국어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이나 제임스 웅거 같은 해외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논증한 바로 신라어가 아닌 고구려어가 한국어의 뿌리라는 주장이 2013년부터 유력시된다.[101]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여전히 반도 일본어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 일본어설은 한반도를 원향(原鄕)으로 삼던 고대의 일본어족고조선부여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족에 의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을 골자로 한다.[102] 여담으로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三韓)을 모두 이었다고 해서 정한 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킬 때 한국인(韓國人)이라고 부르지만, 애초 해외에서의 한민족의 명칭은 신라인(Sillan)도, 백제인(Baekjean)도 아닌 고려인(Korean), 즉 고구려인(高句麗人/高麗人)이다.[103] 주로 속말말갈, 백산말갈 출신 등.[104] 대연림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한 유민들.[105] 고모한, 고청명, 곽약사처럼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자리잡은 유민들.[106] 금나라에 합류한 발해인들의 경우, 금나라 황제에게 시집가 황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금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해릉양왕의 어머니는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였으며, 또한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금나라 세종도 어머니가 발해인 추와지(雛訛只)의 딸로 발해계 혈통이었다.[107] 당시 고려는 발해인들의 인심을 얻고 반(反)거란 의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거란의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들을 굶겨죽인 적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 문서로.[108] 상술했다시피 고구려계라는 의식이 강했던 초기 고려인들은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가 고려인 이상 따로 발해 출신으로 적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예시가 유충정(劉忠正)이다. 발해 유민으로서 국내(고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고영기(高英起), 고적여(高積餘), 양규(楊奎), 지채문(智蔡文) 등과 달리, 유충정은 사료에서 발해 출신이라고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상 유충정 혹은 그의 선대가 당시 발해로 여겨지던 정안국에서 979년 고려로 망명한 수만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이름을 전한 발해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신라계 • 백제계와 대등한 조건으로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우와 조치들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족 계열의 탐라인을 여겼던 방식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들이다. 1105년 숙종 시기,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탐라인들은 발해인과는 달리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외국인들만이 응시하는 빈공과를 거쳐야 했다. 설령 빈공과를 통과해 중용되었어도 태자 고말로의 아들로 전해지는 고유의 사례처럼 탐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관직을 겸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고유는 심지어 한낱 속국에 불과할지라도 엄연히 자견왕의 혈통을 잇는 왕족 지위에 탐라인 최초로 관직을 얻은 인재였음에도 말이다. 고유가 탐라인 최초로 임용된 1057년 이전에 등장하는 고씨들은 사실상 고구려계 • 발해계로 보아도 무방하다.[109] 934년 한해에 귀부한 세자 대광현의 무리만 해도 그 규모가 수만이 아니라 수만 호(戶)였다.[110] 정몽주의 시(詩)인 발해고성(渤海古城)에서도 발해 유민들의 귀부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渤海昔爲國, 於焉遺址存, 唐家許相襲, 遼氏肆幷呑, 附我全臣庶, 于今有子孫, 遺民那解此, 嘆息住歸軒.'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요것들이 함부로 병탄하였네. 우리의 신하와 백성이 되어, 여지껏 그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거늘. (옛 발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어찌 알리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
[111] 고려에 귀부했다가 죄를 지어 다시 거란으로 도망친 고모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한의 출신지인 요동성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에 이르기까지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소수의 거란군이 점유한 일부 지역까지 모두 포함해 일어나고 있었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112] 대표적으로 고려 목종 대의 신료였던 유충정(劉忠正), 여요전쟁 당시 맹활약한 대도수(大道秀), 대회덕(大懷德), 고적여(高積餘) 등이 있었다. 무신정권 때는 권력자이자 간신배로 이름을 남긴 대집성이, 여몽전쟁 때는 고려군의 군관으로 활약한 대금취(大金就) 등이 전해지고 있다.[113] 각자 사병들을 거느리던 호족들이 난립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왕건 본인에게만, 즉 고려 왕실에게만 직속으로 신속된 발해 유민들이라는 기반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114] 서경 일대와 그 이북인 강동 6주 등.[115]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북인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일대.[116] 특히 구 후백제 영토.[117] 그러나 건국 주체(고구려인)와 이념(고구려 계승), 그리고 역사적 연고권(패서평양성)이 분명했던 고려의 정통성과 연속성 덕분에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건국 주체부터 속말말갈인지 고구려인인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맥계인 고구려인과 숙신계인 말갈족의 인구 구성에 대한 토론이 결론나지 않아 국내외에서 순전히 한국사로서만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중국인들의 넷상에서의 역사왜곡이 가장 빈번하기도 하다.[118]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발해는 고구려계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쥔 지배계층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끌어간 나라였다. 속일본기의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발해에서 발해인(예맥계)과 말갈인(숙신계)이 따로 구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인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들이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역관들이었음을 보면, 적어도 말갈인이 아닌 발해인들은 신라인들과 말이 통하는 한국어족 집단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곧바로 지배층의 다수를 포함한 인구의 상당수가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 귀부한 점, 고려왕건이 이들을 친척의 나라 혹은 혼인한 나라로 여겼다는 점,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발해의 말왕(末王)이었던 대인선을 구출하기 위해 후당측에 협공을 제의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인과 발해인은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계만의 영향력을 앞세울 수도 없는 것이,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을 말갈족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려악(高麗樂)에 포함된 발해 음악의 제목도 다름아닌 신마카(新靺鞨)다. 이는 발해의 건국세력이 비단 고구려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속말말갈백산말갈도 포함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119] 오늘날 전해지는 나말여초 대의 성씨들만 보아도 대씨(大氏) 외에도 사료상 신라에는 없었고 발해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지씨(智氏), 곽씨(郭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기씨(奇氏)(이쪽의 경우 1033년 11월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의 내투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씨는 이미 후삼국시대 고려에 속한 호족으로 여러 명이 등장한다.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오씨(吳氏) 등 여러 성씨들, 하물며 뿌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본(性本)들이 발해계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씨(李氏)와 고씨(高氏)의 경우 일부 본관들이 정황상 발해인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늘날 남한의 1만 태씨(太氏)들만이 발해의 후손인 것은 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히 가장 수가 적었을 왕족만 1만이 넘는다는 걸 나타낸다.[120]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121]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200여 호(戶).[122]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바이두에서는 약 40만의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이주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주 써먹는 역사왜곡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안동도호부의 영문 항목에서 약 78,000여 호(戶)가 끌려갔다고 하는 등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자의든 타의든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는 유력한 민호 출신들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의 상당수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배층 한정으로 본국으로 거의 대부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고구려도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의 사례처럼 당나라를 탈출한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나 신라로 피신했지만 조선과는 달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 모두가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123] 당나라의 문인인 장작(張鷟)이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평양성 출신의 절세미녀로 당나라로 끌려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의 종이 된 옥소(玉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곽정일의 독살을 시도하고 그의 전택(田宅)을 벗어나, 연인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고구려인,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착마노(捉馬奴)라는 곽정일의 노비(본명이 아니라 마굿간지기라는 뜻)와 함께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나란히 참수당했다고 한다.[124] 국내성, 평양성, 한성.[125] 사실상의 수도권.[126] 다른 게 아니라 서해의 섬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부흥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육지로 돌아온 뒤 전쟁 중 지나가면서 (아마도 그가 나고 살았을) 평양성 일대를 보고 폐허가 되고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고 슬퍼한 기록이 적혀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기 전 시점으로 나당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각 방어선이 무너지며 전황이 악화되자 이미 상당한 고구려인들이 이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27] 말갈로 탈출한 이들은 발해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8] 이성계의 요동 정벌 당시 고려군에게 다시 귀부해 고국으로 돌아간 1만여 호(戶)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다.[129] 천막 만여 개의 규모.[130] 다만 이 정체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구려인 선조를 두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기린다는 의식에 가까운 것이다. 고구려인 선조들을 두었고 그들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131] 몇몇 진짜(상당부분은 중화사상으로 인한 사칭이고 한국 토성(土姓)이지만 일부분은 진짜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두고 있다) 중국계 본관 성씨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옛 중국계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음과 같은 맥락이다.[132]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다만 멸망을 전후로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들은 얼마 안 되며 이전부터 교류나 이주 목적으로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수가 더 많다.[133] 고구려의 신라 구원신라의 침공을 계기로 왜국으로 대거 망명한 가야인들. 가장 대규모로 이주했던 경우로 추정된다.[134] 같은 이유로 한반도 북부, 만주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북한의 역사로, 남부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남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고대에 별개의 국가였던 북부 왕조와 남부 왕조가 고려시대부터 하나가 되어 통일을 유지하다가 냉전 이후 다시 분리됐다는 인식이다.[135]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다.[136] 도올 김용옥 교수처럼 동양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비롯한 동양 철학을 굉장히 낮게 평가하고, 민족민족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이다.[137]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의 연도를 넣으면 서기 10세기 초반, 그래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보다는 훨씬 오래 전이다.[138] 출처: 《르네상스의 어둠》,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73~274쪽[139] 사실 이밖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 많았는데, 로마가 외국인들을 개처럼 멸시해서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배타적인 태도 때문에 망했다는 황당한 내용을 버젓이 집어넣기도 했다.# 서로마의 역사까지만 보아도 1,200년, 동로마까지 합치면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했던 로마가 외국인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감안한다면, 세계사에 너무나 무지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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