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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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기독교도(기리시탄) 다이묘 중 하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라틴어: Augustinus, 가톨릭 교회).[4]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이라 국내에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인물. 물론 역사책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 장수 중에서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 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평행장(平行長)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도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는 앙숙지간이다. 자세한 것은 밑의 내용을 참고.
반면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일본의 장수들 중에서는 한국에 알려진 것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 종종 비중있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임진왜란의 선봉장보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임진왜란 때 악명을 떨쳐서 한국사에선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당시 일본내에서는 도요토미가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차세대 자원으로 육성하던 젊은 다이묘였으며, 임진왜란 개전 당시 불과 30대 초반이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본래 사카이[5] 의 상인 고니시 류사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를 정벌하기 위해 미키 성을 치던 중 사자로 히데요시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처음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처음 다이묘가 될때 하사받은 땅은 시코쿠 근처의 쇼도섬(小豆島, 소두도)이라는 작은 섬이었다. 이후에는 지금의 규슈 구마모토현에 있는 우토(지금의 우토시)를 하사받아 그곳의 다이묘가 된다. 상인 시절에는 약종상(藥種商), 즉 약재를 주로 취급하였다.
다만 이런 이력 때문에 고니시와 사이가 나쁜 가토 기요마사는 그를 가리켜 약장수라고 자주 놀렸다. 한 번은 임진왜란 무렵, 고니시와 가토가 군사 작전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가토가 고니시더러 "당신은 이곳을 공격하지 그래?"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짚은 지도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약가게 거리였고, 또 고니시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하자 가토가 "아하! 과연 약장수다운 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어서 분노한 고니시가 "약장수답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나를 모욕하려 드는가?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라며 칼을 뽑아들어 하마터면 가토를 죽이려고 덤벼들 뻔 하다가, 주위의 다른 장수들이 말려서 겨우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한 앙금이 일방적이지는 않았으며 고니시 역시 가토를 무식한 무장으로 취급하며 서로 앙숙이었고, 고니시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를 앞질러 간 것으로 가토를 골리거나 가토의 패전을 떠들기도 하는 등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인 관계였다.[6]
2.2. 가톨릭 신자[편집]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7]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다가 순교한다. 그는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8]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2.3.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 소 요시토시의 신변과 관련된 무역 문제[9] 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하던 쪽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을 꺾는 데 실패하자 굳이 전쟁을 하겠다면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자원,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부산진, 동래성, 탄금대 등에서 조선군에 대한 공격을 거의 도맡아서 수행했는데도 수도 한성을 일본군 중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까지 북상하였다.[10]
그러나 무리한 진격으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면서 평양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서 의주에 있던 선조를 잡는데도 실패하고 남쪽의 조선 각지에서 군세를 수습한 조선 육군과 의병의 승리로 어려워지는 전세 상황.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의한 보급문제와 명나라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 때도 고니시가 거의 혼자서 조명연합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고니시의 한 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11] 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 보급부족 등의 설도 있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
성중의 유민들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생존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안색이 귀신과 같았으며, 사람과 말이 즐비하게 죽어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성 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공사간의 집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으며 오직 불탄 기왓장들뿐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4월 1일 #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조명 연합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기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분풀이로 여성을 제외한 한양에 있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이후 행주대첩에서 왜군은 3만의 병력을 7차례 나누어서 공격하였는데 이때 1군으로 선봉에 서서 공격하였으나 권율의 3천 병사에게 패하였다.
이후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고니시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나라와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완전 철군 및 사과를 요구하는 명나라와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삼겠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2.4. 정유재란[편집]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나라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나라가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도요토미가 문맹임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발각,[13]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다만 최근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건 야사고, 실제로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 책봉식을 받은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과 조선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한것에 불만을 품고 뒷통수를 친 것이다. 그러니 고니시가 무사했던 것.
이후 고니시는 평소에 원수 같던 사이인 가토 기요마사를 조선의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올리고 이는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바로 이순신을 파직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조선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60척을 날리게 되니, 고니시 유키나카 입장에선 진짜 말도 안되는 수확인 것이다. 사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일본 측 사료가 적은지라 이 시기 고니시의 의도를 완벽하게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고니시가 이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고 각종 매체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는 양국 간의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 문제라 고니시의 의도를 함부로 단정짓긴 어렵다.
고니시를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고니시가 일종의 반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고 조선 수군의 전력 약화에 성공했다고 본다. 가토 기요마사와 아무리 정적 관계라고는 하나 그래도 같은 편에서 싸우는 아군이므로 히데요시 몰래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시 둘로 해석이 나뉘는데, 하나는 가토 기요마사는 아무 것도 몰랐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니시가 독자적으로 일을 계획했다는 설이다. 이 경우 가토에 대해선 고니시가 고의로 죽일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걸로 이순신을 처리하면 대성공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눈엣가시인 가토를 죽일 수 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고니시가 '우리 둘 사이가 나쁘다는 걸 잘 이용하면 저 웬수 같은 이순신을 처리할 수 있다. 어차피 실패해도 가토 당신이 손해볼 일은 없으니 악감정은 잠깐만 접고 한 번 해보자'라고 설득[14] 하여서 가토가 미끼 역할을 받아들여 고니시와 가토가 사전에 이 모략을 협의하였다는 설이다.
고니시를 우호적으로 보는 쪽은 애초에 전쟁에 반대였던 고니시가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주작질이 모두 탄로났다는 이유로 갑자기 전쟁에 우호적으로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고 본다(죽을 때조차도 할복을 거부할 정도였던 사람이니). 따라서 화친 실패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가토 기요마사를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의 손을 빌어 몰래 알려 제거하려 했다고 본다. 한편 가토가 상륙한 뒤에 고니시가 조선 측에 아쉬워한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있다.[15] 물론 고니시를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선 이 발언도 '악어의 눈물' 같은 거짓말이라고 해석한다.
고니시의 행동은 오로지 가토 제거 하나에만 확실히 고정되어 있다는 설은 일본 사학계에도 존재한다. 고니시는 당시 심유경과 함께 협상 중이었고, 협상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는 증거는 조선군과의 전투 중단 또는 최소한 확전 중지다. 어찌되었건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가 격렬해지면 협상이 결렬된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순신의 존재가 해상을 원천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군 간의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협상 무드는 그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가 이런 이순신을 제거해 버린다면 당연히 순식간에 힘의 균형이 붕괴되어 버리고 일본군은 거칠 것이 없이 확전을 벌여 전쟁은 더욱 격해진다. 당연히 이것은 고니시의 협상의 파탄과 직결된다. 그리고 협상의 파탄은 고니시에게 있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즉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고니시의 행동은 단순히 라이벌이자 협상의 악조건 중 하나인 가토 제거에 전적으로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니시의 입장이 진심이든 아니면 반간계이든지 간에, 그가 흘린 정보로 이순신이 가토를 잡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가토가 정확히 몇 시에 바다를 건너올지 알 수도 없었고, 더구나 당시 겨울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파도와 바람이 강해 조선 수군이 무작정 부산 바다에서 가토를 기다리는 건 자살 행위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어명을 받아 부산으로 출정은 한다. 출동을 했지만,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라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에 선조가 알고도 낚이는 바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16]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고 칠천량 전투 이후 남원 전투로 남원성을 함락하여 남원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과 조선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공으로 왜군은 전라도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왜교성에서 이순신 함대에 포위당해 큰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고니시군은 명군을 매수하여 퇴로를 겨우 확보했고, 거기다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조명연합수군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지면서도 시간을 끌어준 틈에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전군이 퇴각을 완료한 시점은 11월 25일.
2.5.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최후[편집]
세키가하라의 고니시 유키나가 진영 터
이후 고니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임진왜란 당시 육로에서의 병력 소모와 이순신에 의해 대패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력을 크게 상실하여 7천 정도만 겨우 이끌고 참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규모가 대국을 결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나마 3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끈 우키다 히데이에도 가신단 대부분이 배신한 상황에서 본인은 원래 무능하여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총사령관이 지휘관으로써는 최악인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따라서 그냥 싸워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판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까지 겹치자 결국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말 그대로 전멸했고, 고니시 본인도 병력을 거의 다 잃고 후퇴하다가 전장을 이탈한 지 4일 만에 도쿠가와의 부하들한테 붙잡혀 1600년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했다.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았고[17] , 참수를 선택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에야스에 의해 죽기전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심지어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 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기독교인)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18]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와 결혼한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혼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19]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20] 고니시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21]
정작 사위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회복에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살아남았다.
3. 평가[편집]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면 돌아보지 않는 전형적인 전국시대 영주였다. 이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음에도 조선에 끼친 피해 자체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컸으면 컸지 적지 않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한다.[22] 일단 일본에서는 고니시보다 가토가 더 유명한 편인데, 둘이 라이벌격으로 대립한 건 사실이므로 가토가 좀 비중이 있으면 거기에 딸려가는 편이다. 그래서 인지도나 인기에서 가토에게 밀리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한양과 평양, 남원 등을 점령해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과 전쟁 반대, 화친을 위해 국서를 위조, 조선인 양녀 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한국에서는 다른 일본군 장수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미묘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는 고니시에게서 어떤 좋은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등청정,소서행장을 양적(兩賊)이라 칭하며[23] 항상 그 둘은 함께 언급되었으며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적의 괴수 가운데에서도 흉악하고 교활한 자[24] 라고 부르며 주륙해야한다는 표현까지 등장하였다.[25] 그 둘을 어떻게든 이간질하려고 하였지 고니시 유키나카를 좋게 본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고니시는 한자를 전혀 읽고 쓸 줄몰랐다.[26] 고니시가 문자를 몰라 겐소가 대신 읽어 옆에서 전달했다는 기록이 실록에도 나와 있다.[27] 고니시는 최선봉에 서서 조선의 최전선을 모두 무너뜨리고 구원병 또한 몰살시키며 수도 한양과 평양성까지 점령한 인물이다. 뿐만이 아니라 한양에서 종묘를 비롯한 공공기관 건물 대부분을 불태우고 학살까지 저질렀는데 이러한 고니시가 한문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 조정에서 좋게 볼 이유가 없다.
송상현한테 길을 비키라는 팻말 내놓듯이,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 몰래 미리 조선 측에만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뿐 아니라 일본의 사료인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교차검증이 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일본군이 심유경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긴 하지만 정황상 일본군=고니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이 부산에 왔을 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다.『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해석: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28]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29]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고니시가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주군 히데요시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러나 평양성에서 패전한 이후에는 한양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따지고보면 이쪽도 가토 못지않은 만행을 저질렀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제스처를 취한 것은 사실이나 일관적인 태도로 보기는 어려운 것.
오늘날 일본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다룬 대중매체에서도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30] 높이 평가되지 못하며, 임진왜란이 그닥 소재가 되지 않기에 기회주의자나 상인의 면모가 더욱 돋보인다. 에도 시대 당시에도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의 반란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인식이 좋지 않았기에 이후 재평가되기도 힘들었다는 추정도 있다.
다만 평가 절하되기에는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31]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32]
임진왜란을 반대해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아시아 삼국을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했으며, 병술적으로 조선인 전쟁고아들과 포로들, 그리고 순왜 등[33] 을 거두기도 한 인물이기 때문에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대우가 조금 더 괜찮다.[34] 단순하고 과격하게 묘사되는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 더 영악하며 말이 통하는 쪽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선 조선과 적대한 일본인들 중에선 드물게도 적이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은 면도 있는 사람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인물.
4. 기타[편집]
- 조선 땅을 밟은 네임드급 기독교(정확히는 가톨릭) 신자다 보니 반기독교 측에서는 그가 임진왜란에서 벌인 학살을 기독교와 연관짓거나 "기독교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찬양하고 이순신을 사탄으로 여긴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았고 정반대로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 측에서는 고니시의 악행을 가톨릭과 연결지으며 "예수회나 교황청이 배후에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런 식이면,다리오 소 요시토시도 거기에 해당된다. 소위 이순신 사탄설의 허위에 대해 잘 분석해 놓은 글이다.# 애초부터 교황이나 가톨릭 사제들은 임진왜란에 대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치고 나면 다음은 명나라까지 치겠다"고 하는 시점부터 이미 그들에게 이 전쟁은 허황된 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건 가톨릭이 조선에 우호적이어서 혹은 크리스천으로써의 양심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일본보다 먼저 마테오 리치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작에 명나라에 들어가 선교하면서 가톨릭은 당시 명나라와 일본의 국력 차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칫 일본의 조선 침략군이 명나라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예수회가 유형 혹은 무형으로 일본과 커넥션이 있다고 알려졌다가는 명나라에서의 선교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고니시 역시 이들 선교사나 상인들과 생각이 같았다. 사실 많은 일본 영주들 상당수가 고니시처럼 개인적으로는 임진왜란을 반대했지만 히데요시에 의해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전장에서의 학살과 잔혹 행위에서까지 그들의 윤리나 신념을 내세우며 튀려고 하지도 않았고 특히나 가톨릭 신앙이 두터웠으며 상인 집안 자제로써의 계산적인 두뇌로 '이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믿었던 고니시도 마찬가지였다.
- 안토니오 꼬레아의 경우처럼 조선에서 잡혀온 많은 사람들이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매매되기는 했지만 1598년 9월 4일 나가사키에서 세르게이라 주교가 일본 각지의 선교사들을 소집하여 조선인 노예 매매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고 인신매매에 종사한 포르투갈 상인에 대하여는 선교사에게 주어진 권한에서 최고의 형벌이라 할 수 있는 파문에 처하는 동시에 노예 한 사람의 매매에 10쿠루자아드의 벌금을 징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을 보면 적어도 가톨릭 사제들은 인신매매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면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에 대해서 트집을 잡았던 적이 있었으니 제 몸 사릴 필요도 있었다.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서 기리시탄들을 탄압한 것도, 전쟁에 불교 승려들을 동원한 것도[35] 그러면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나쁜 놈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모두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우선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경우 서양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이국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서양으로부터 조총,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36] 동시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종교적 지도자로써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 일본에서 승병들은 조선이나 명나라의 승려와 달리 예전부터 종교 세력을 넘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사병을 육성해 전국시대 때 다이묘들과도 대등한 군사력을 과시했던데다[37] 당시 일본에서 고급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승려는 말하자면 군사력뿐 아니라 지식까지 갖춘 고급 인력으로 그런 인력을 히데요시가 우선적으로 전쟁에 동원하자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명나라를 치는 것이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에 키리시탄 포교를 허락하겠다"며 회유하려 했지만 애초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38] 사실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성직자로써의 양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센고쿠 시대의 전란기를 거친 일본군의 공격 전술이나 전후처리 패턴이 제3자 입장에서 보기에 실드 쳐주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악독한 것도 사실이었다.[39]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40] 가 1592년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히데요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1592)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 안코쿠지 에케이 이외에 일본 승병들과의 어떤 교전이나 피해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안코쿠지 에케이 자신도 조선의 선비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모리 데루모토의 모주(작전 참모)로써 히데요시와 데루모토 사이를 중재하거나 전장에서 작전 기획을 세우는데에 활약했지, 일선에서 자신이 나서서 사람을 죽인다거나 하는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으며[41] 정유재란 때에 종군해 전란의 참상을 일기로 남긴 승려 케이넨처럼 "산도 강도 불타고 있다. 지옥의 옥졸조차도 죄수를 저렇게까지 학대하지는 않을텐데..."라며 조선인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을 슬퍼한 이도 있었다.
- 발리냐노는 예수회의 동인도 선교 구역 관찰사의 위치에 있었고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인 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 적이 있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는데 바테렌 추방령을 내린 시점에서 히데요시는 예수회를 좋게 보고 있지 않았고 이건 어느 정도 예수회가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1586년 5월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료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줄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을 나한테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코엘료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할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죠"라고 제안했다.[42] 코엘료로써는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선교를 더욱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도리어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코엘료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 놈들 봐라? 위험한데?"하는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코엘료는 다시 자신의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만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는데 히데요시가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보고 "이거 군함 아니냐?"라고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 이 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 선교사로써 코엘료는 선교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지고 있던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걸 "우리 예수회는 이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히데요시 네가 권력자랍시고 함부로 나대지마라."로 받아들인 것이다.[43] 이후 코엘료는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호하고 나가사키 등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무력으로 히데요시에 대항하려 했고 몰수당한 영지를 되찾기 위해 기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군수 물자를 얻으려 했지만 기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선교 구역 관찰사였던 발리냐노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발리냐노는 히데요시를 찾아 그를 달랬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4]
- 박철 전 한국외대 총장은 1930년 일본 역사학자 야마구치(山口正之)의 ‘세스페데스의 서간문 연구’ 논문에서 왜군의 ‘종군신부’라고 단정지은 것이 세스페데스 신부를 일본군 종군 신부로 보게 된 것으로 이를 역사 왜곡이라 지적하면서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온 것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그 배경에는 1566년부터 가스파르 비렐라 신부가 ‘꼬라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숙제를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이라 불리는 선교사 추방 명령을 발표한터라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도착한 후에도 1년 동안 웅천 왜성의 은밀한 곳에 칩거하면서 때를 엿보았지만 1년만에 체류 사실이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자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을 도왔던 일본의 지방 제후(키리시탄 다이묘)들이 그를 황급히 일본 땅으로 돌려보냈다는 것.[45] 박철 총장은 이어 "그가 귀국하는 와중에 쓰시마 섬에서 조선 귀족의 자손으로 보이는 어린 포로를 데려가 비센테(Vicent)라고 세례를 주고 보살핀 점이나 임진왜란의 참화에 대해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에 있던 예수회 부관구장 신부에게 알림으로써 유럽에 전쟁의 진상을 최초로 알린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이며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간단히 종합해보면 평화가 금방 이룩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제의를 시작했던 중국의 중요한 인물(沈惟敬[46]
)이 중국이 당초에 허락하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해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中 #
-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며 그 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타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타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가톨릭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인 복자 권 빈첸시오는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의 연줄로 신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호오를 떠나서 당시 안식교[47] 와 더불어 한일교회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물임은 분명하다.
- 임진왜란의 선봉장 경력 때문에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 많이 등장한다. 행적 때문에 그나마 개념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편.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한국에는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 가토 기요마사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석고 자체는 가토가 한끗발 더 높았지만 둘은 도요토미의 충신으로 별로 위상에서 차이는 없었다.[48] 도요토미는 규슈를 정벌한 후 서양과의 무역으로 경제력이 강력한 규슈의 다이묘들를 견제하기 위해 히고국을 삿사 나리마사에게 내렸다. 하지만 삿사가 점령지 관리에 실패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도요토미는 실망해 삿사에게 할복을 명하고, 그 영지를 믿을만한 심복인 두 가신에게 동등하게 나눠 내린 것이다. 고니시가 처음부터 가토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 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는 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조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베시마(鍋島) 가문[49] 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 있는)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간베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결정적으로 둘의 사이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 요청을 일부러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때 가토는 태화강물이 끊기고 먹을 것도 떨어지는 등 온갖 고생을 한터라 이 때의 트라우마가 단단히 맺혔는지 귀국 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 공급용 우물을 120개나 팠고 성 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토란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52]
이렇게 둘의 사이가 불구대천이라는 것은 매우 유명해서 조선 사람들조차 이 둘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과 가토 기요마사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작전에마저 써먹기까지 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고니시와 가토만이 알겠지만 말이다.
- 전술했듯이 고니시는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할복하지 않았고, 불교나 신도가 아닌 서양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존재가 말살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1980년에 고니시의 영지였던 구마모토현 우토시에 동상을 세웠다가 반대파의 공격이 두려워 하루 만에 가림막으로 감춘 일도 있었다고 한다.[53]
- 그러나 이후 일본 지방 구석까지 국제화 바람이 불며 고니시가 지역 상징 인물로 내세워질 정도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한 에피소드에 따르면, 고니시 연구가 도리즈 료지가 시민 강좌를 열었을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라고 했더니 어느 노인이 "고니시 공이라고 해야지!"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 그의 가신 중에는 모리 소이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에 참전했으며 마계전생 등의 창작물로 유명해진 인물로, 막상 임진왜란 때는 난파당하는 바람에 조선 땅을 밟지도 못했다(...).
삼천포를 넘어 오란다로 가버렸다소이켄이 일본으로 귀국한 건 고니시가 죽고 나서였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니시 유키나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