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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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목록
2.1. 왕과 왕후의 능(陵)
2.2. 추존된 왕과 왕후의 릉
3.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려의 왕릉들.

1대부터 34대까지 모든 왕릉의 위치가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려사 기록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능호들이 전해진다.[1] 그나마 100년 전까지 전하던 고려왕릉 모습

삼국시대고구려 왕릉, 백제왕릉, 신라왕릉, 가야왕릉이나 남북국시대발해왕릉, 조선왕릉이 그렇듯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근처에 모인 편인데 잠시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했던 대몽항쟁 시기와 공양왕의 경우만 특이한 케이스로 다른 지역(현 남한)에 위치한다. 능 4기는 대한민국,[2] 나머지는 북한에 있는데[3] 아쉽게도 남한의 고려왕릉들은 고려가 힘들 때(여몽전쟁)나 망한 뒤(공양왕)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식이 매우 초라하다.

북한 소재 고려왕릉들은 태조의 현릉이나 공민왕의 현릉 등 일부를 제외하면 관리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북한의 산들이 흔히 민둥산이라 자료사진들을 보면 봉분이 마치 반사막지대 같은 황무지 가운데 덩그러니 있거나 한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북한 치하인 지금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후손으로서 조상의 능을 관리해야 할 개성 왕씨몰락해 주요 왕릉을 제외하고 그다지 관리를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개성 동쪽의 교외 지역인 장단군비무장지대 안에 갖혔기에 몇몇 고려왕릉은 비무장지대 내에 소재했을 가능성도 있어 상황이 더욱 암울하다.[4] 이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꾸준한 관리를 받으며 랜드마크가 되고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조선왕릉[5]과는 상당히 대비된다.

구조적으로도 석회를 두껍게 바른 조선왕릉이나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돌무지가 무덤을 보호하는 신라왕릉에 비해, 고려왕릉은 별달리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 돌방구조라 도굴하기 쉬워서 굉장히 도굴피해를 많이 당했다. 또한 후대의 조선왕릉은 귀족적 풍조를 배제하려 한 조선왕조의 기풍 때문에 무덤 안에 상징적 물건만 넣고 사치품은 부장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귀중품만 노리는 도굴꾼의 표적이 될 일도 적었다. 그러나 귀족정치 시대였던 고려의 왕릉에는 고려청자 같은 사치품을 많이 부장했기 때문에 더욱도 도굴범의 표적이 되었다.

도굴은 특정시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왕릉은 고려[6], 조선 구한말, 일제강점기, 광복 후 모두 도굴당해서 남북한 각자의 발굴조사기록에도 그야말로 발굴된 유물이 별로 없다고 나온다. 현재 고려왕릉에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고려왕들의 얼굴들 정도이다. 그런데 왕릉의 보존 상태나 북측의 부실한 관리 상황을 보면 이조차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왕건이나 공민왕정도를 제외하면 왕들의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다.

고려왕릉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시기 정립한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불탑을 모방해 봉분 주변을 둘러싼 난간석, 12지신을 봉분 아래에 부조한 병풍석, 무덤 주변의 석물 배치는 확실히 원성왕릉 같은 신라 후기 양식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분 벽화 같이 고구려 양식 영향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일부 포함되었다. 이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를 모두 이어받으려고 했던 국가라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고려왕릉을 수호하는 인물석들은 조선왕릉은 커녕 전대의 신라왕릉보다도 대체로 섬세한 기교가 부족한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원래는 더 정교한 석상들을 세웠었는데 거란, 몽골 등의 침략으로 날려먹자 후대에 대충 복원했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7] 불상석굴암 본존불 같은 통일신라 불상이 더 사실적이고[8] 고려 불상은 투박하다는 일각의 평가처럼, 고려시대 조각 풍조의 변화에 왕릉 석물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허나 현릉과 현정릉을 제외한 대다수 고려왕릉들은 석상이 투박함을 넘어 정성과 퀄리티가 심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이상하고, 그 대상이 다른 권력자의 무덤도 아닌 하필 왕릉이기에 더욱 의문이 남는다.[9]

고려왕릉에 대해 자세히 정리된 글

2. 목록[편집]



2.1. 왕과 왕후의 능(陵)[편집]


능호
피장자
승하
봉릉
소재지
형식
사적
비고
현릉(顯陵)
태조(1대)
신혜왕후(태조 后)
943.5.29(음)
미상
943.6.26(음)
경기도 개성시
합장릉
북한 국보 179호
-
수릉(壽陵)
신정왕후(태조 后)
983.7.9(음)
983년
-
단릉
-
-
정릉(貞陵)
신성왕후(태조 后)
-
1009년 3월
경기도 개성시
단릉
북한 보존유적 573호
-
순릉(順陵)
혜종(2대)
의화왕후(혜종 后)
945.9.15(음)
945년
경기도 개성시
합장릉
-
-
안릉(安陵)
정종(3대)
문공왕후(정종 后)
949.3.13(음)
949년
경기도 개성시
합장릉
북한 보존유적 552호
-
헌릉(憲陵)
광종(4대)
대목왕후(광종 后)
975.5.23(음)
975년
경기도 개성시
합장릉
-
-
영릉(榮陵)
경종(5대)
헌숙왕후(경종 后)
981.7.11(음)
981년
경기도 개성시
합장릉
북한 보존유적 569호
-
유릉(幽陵)
헌애왕후(경종 后)
1029.1.3(음)
1029년
-
단릉
-
천추태후
강릉(康陵)
성종(6대)
문덕왕후(성종 后)
-
-
경기도 개성시
-
-
-
의릉(義陵)
목종(7대)
선정왕후(목종 后)
-
-
위치 유실[10]
-
-
-
선릉(宣陵)
현종(8대)
-
-
경기도 개성시
-
-
-
숙릉(肅陵)
덕종(9대)
-
-
경기도 개성시
-
-
-
주릉(周陵)
정종(10대)
-
-
경기도 개성시
-
-
-
경릉(景陵)
문종(11대)
-
-
경기도 개성시
-
-
-
성릉(成陵)
순종(12대)
선희왕후(순종 后)
1083.10.23(음)
1083.11.19(음)
경기도 개성시
-
-
-
인릉(仁陵)
선종(13대)
사숙왕후(선종 后)
-
-
경기도 개성시
-
-
-
은릉(隱陵)
헌종(14대)
-
-
위치 유실[11]
-
-
-
영릉(英陵)
숙종(15대)
-
-
경기도 개성시
-
-
-
유릉(裕陵)
예종(16대)
-
-
경기도 개성시
-
-
-
장릉(長陵)
인종(17대)
-
-
경기도 개성시
-
-
-
희릉(禧陵)
의종(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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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유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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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릉(智陵)
명종(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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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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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릉(陽陵)
신종(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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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릉(碩陵)#
희종(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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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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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厚陵)#
강종(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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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유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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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洪陵)#
고종(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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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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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韶陵)
원종(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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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경릉(慶陵)
충렬왕(25대)
-
-
경기도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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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릉(德陵)
충선왕(26대)
-
-
위치 유실[14]
-
-
-
의릉(毅陵)
충숙왕(27대)
-
-
위치 유실[15]
-
-
-
영릉(永陵)
충혜왕(28대)
-
-
위치 유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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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릉(明陵)
충목왕(29대)
-
-
경기도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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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릉(聰陵)
충정왕(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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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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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릉(玄正陵)[17]
공민왕(31대)
노국대장공주(공민왕 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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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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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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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불명[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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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3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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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릉(高陵)#
공양왕(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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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19]
-
-
-
# : 현재 남한 지역에 소재한 왕릉
임금 34명의 능 중에서 9기의 위치가 불명이다.


2.2. 추존된 왕과 왕후의 릉[편집]


아래는 사후 추존된 왕들의 능호이다.
  • 온혜릉(溫鞋陵): 의조의 능. 위치 미상[20]
  • 창릉(昌陵) : 세조로 추존된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의 능.[21]
  • 태릉(泰陵) : 대종으로 추존된 성종(고려)의 아버지 왕욱(王旭)과 추존왕후 선의왕후의 능.
  • 무릉(武陵)[22] : 안종으로 추존된 현종(고려)의 아버지 왕욱(王郁)의 능.[23]
왕건의 증조할아버지 국조와 그의 부인 정화왕후의 무덤은 기록이 전혀 없어서 알려져 있지 않다.


3.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편집]




4. 기타[편집]


개풍군 지역의 이명(里名) 중에는 왕릉의 이름을 딴 곳이 꽤 있는데(광복 당시 행정구역 기준이다), 토성면 여릉리[24], 영남면 소릉리, 청교면 유릉리, 양릉리, 남면 창릉리 등을 들 수 있다.

위의 왕 또는 왕족이 구체적으로 비정된 왕릉들 외에도 칠릉떼(칠릉군, 七陵群)이나 명릉떼(명릉군), 동구릉, 서구릉, 화곡릉 등의 묘주를 알 수 없는 왕릉급의 대형 무덤들이 개성 시가지의 외곽을 따라서 분포되어 있다.[25]

개성시 내의 역사유적들과 함께 고려왕릉들도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16년에 북한에서 신성왕후정릉을 정비 및 실측 조사하고 약식 보고서를 등록한 바 있다. 단군릉 같은 어처구니 없는 프로파간다를 제외하면 고구려나 낙랑 유적도 지속적으로 발굴 보고[26]하며 공식적으로 한국에도 입수된다.

2019년 10월 22일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발굴팀이 개성 송도저수지 근처에서 혜종왕릉을 발굴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2022년 5월 20일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문화성 민족유산보호국 조선민족유산보존사, 송도사범대 역사학부가 공동으로 진행하여 충렬왕릉을 발굴했다고 한다.#

5. 같이보기[편집]



[1] 다만 왕들의 무덤은 모두 능호가 전해지므로, 능호가 전해지지 않는 왕후들의 무덤인 듯하다[2] 왕릉으로는 희종의 무덤 석릉(碩陵), 고종의 무덤 홍릉(洪陵)이 있으며 정순왕후의 무덤 가릉(嘉陵), 강종의 2비 원덕왕후의 무덤 곤릉(坤陵)이 있다. 그 밖에 발견되지만 않았지만 강화도에 매장된 강종의 후릉(厚陵)도 강화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양시에 공양왕릉이 있다.[3] 다만 우왕창왕은 현재의 남한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들은 남한에 묻혔을 가능성도 꽤 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이들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어디 묻혔는지는 알 길이 없다.[4] 허준, 윤두수 등의 무덤이 비무장지대 내에 갇혔고, 그나마 남측에 있어 재단장을 할 수 있었던 허준 묘와 달리 윤두수 묘는 북쪽에 위치하여 유실되었다.경순왕릉은 바로 뒤 언덕이 비무장지대로 설정되며 간신히 벗어났다.[5] 단 북한에 있는 태조 이전 4대조의 왕릉, 신의왕후제릉, 정종정안왕후후릉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6] 고려사에만 고려왕릉 도굴 기록이 꽤 많이 나온다.[7] 예를 들어 고려-몽골 전쟁에서 왕릉 석물들이 훼손되었다고 가정하면, 전쟁이 끝난 뒤인 원간섭기공민왕 이후 시기는 고려왕조의 재정이 바닥을 치던 시대라 옛 임금들의 능원 복원에 쓸 여력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이미 지나간 왕조의 무덤이라 퀄리티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다. 또한 신라의 왕성 박씨, 석씨, 김씨 등과 달리 고려의 왕성 왕씨는 조선왕조에게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문중에서조차 고려왕릉을 관리할 형편이 못 되었다.[8] 사실 통일신라로 한정해도 대체로 앞 시대인 8세기 미술이 9세기 미술보다 더 정교하고 사실적인 풍조를 추구한다. 반드시 이후 시대라고 점점 정교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9] 사실 신라시대에 비해 고려시대의 불상이 다소 투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가 고려왕릉의 조잡한 석인상에 비할 바는 아니며 같은 시기 고려청자를 보면 매우 정교하고 예술적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세워진 각종 비석이나 석탑 등 다른 석물 문화재도 상당히 세련된 편이다. 그런데 정작 권력의 정점인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석물이 심하게 조잡하다. 그나마 남한에 남은 강화도 천도 시기의 왕릉만 그렇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북한 개성 소재 왕릉들도 태조의 현릉, 공민왕의 현정릉,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은 칠릉군의 몇 기 정도를 제외하면 죄다 이 모양이다.[10] 참고로 당대에는 공릉(恭陵)에 매장되었고 의릉은 이장된 곳이다. 하지만 현재 공릉과 의릉 두 곳 다 위치 유실 상태로 대략 개성 동쪽이라고는 하나, 현재는 알 수 없다.[11] 개성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2] 개성 동쪽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3] 강화도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4] 경기도 개성시 서쪽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5] 경기도 개성시 광명사 인근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6] 경기도 개성시 서쪽에 위치했다고 하나,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17] 공민왕의 능 이름은 현릉(玄陵), 노국대장공주의 능 이름은 정릉(正陵)이다.[18] 우왕과 창왕은 폐위되어 왕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조선왕조는 이들을 신씨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다른 왕릉들이 대부분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위치가 유실된 것과 달리 의도적으로 매장지가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매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인으로 강등된 후 사사되었기 때문에 능호는 물론 시호, 묘호도 없다. 심지어 기록이 없어 능도 조성되었는지 알 수도 없다.[19] 강원도 삼척시에 가묘가 있는데 정확히는 공양왕이 사사당한 후 유배지인 삼척시에 가묘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고양시의 현 위치로 이장한 것이다. 그래도 기존의 가묘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20] 왕건의 할아버지로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 등에 의하면 개성 광명사(廣明寺)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자기 부인 원창왕후의 무덤은 발견되었으나, 본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의조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제건이라는 이름은 오직 고려 의종 때 야사집인 고려 편년통록에만 나오는 기록으로서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 왕대종족기, 고려 성원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고로 작제건이란 이름은 가공의 인명일 가능성이 높다.[21] 고려사에 의하면 왕륭이 금성군(金城郡, 지금의 북한 김화군)에서 죽자 예성강(禮成江)변에 있는 영안성 인근 석굴에 매장되었다. 훗날 아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그를 세조로 추존하고 그의 묘를 창릉(昌陵)이라 했다.[22] 최초에는 건릉(乾陵)이라는 능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무릉으로 능호가 변경되었다.[23] 조카 헌정왕후와 불륜을 저질러 현종을 낳은 바로 그 사람이다.[24] 태조 현릉과 공민왕 현릉 소재지.[25] 그 외에도 황진이의 무덤이나 여러 신하들의 무덤으로 비정된 무덤들이 왕릉급 무덤들의 근처로 자리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비정일 뿐 정확한 묘주는 확실치 않다.[26] 발굴보고 내용도 나름 볼 만하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의 논리가 쫌... 없는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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