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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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Limbus
영어
Limbo
한국어
고성소(古聖所)
1. 개요
2. 구약의 고성소
3. 유아 림보
3.1. 가톨릭 교회의 입장
4. 기타


1. 개요[편집]


가톨릭의 내세관 중 하나이자 신학적 가설. 본래 서양 표현인 '림보(Limbo)'의 어원은 '경계' 혹은 '가장자리'라는 뜻의 라틴어 'Limbus'이다. 지옥의 가장자리라는 의미에서 '변옥(邊獄)'이라 부르기도 한다.

죽은 영혼들이 지복직관(至福直觀, 직접 하느님을 뵙는 최고의 행복)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벌을 받고 있지도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연옥 교리와 비슷하게 가톨릭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나, 연옥과는 달리 공식으로 채택된 것은 아니고 "이런 곳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에서 가설로서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정교회개신교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개념이다.

고성소 개념은 구약의 고성소와 신약 이후의 유아 림보로 나눌 수 있다.

2. 구약의 고성소[편집]


파일:external/www.artbible.info/duccio_maesta_limbo_grt.jpg

신약 이전의 고성소는 구약에서의 성조(聖祖)들을 포함한 조상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뜻한다. 즉 원죄로 인해 궁극적인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강생하여 구원을 이룰 때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함으로써 이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간 상태. 즉 더 이상 이러한 의미의 고성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 사도신경 중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고"(La.: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가 이 부분을 말한다. '저승'은 inferos의 번역어로서, '고성소'의 개정된 표현.[1] 참고로 1960년대까지 읽히던 가톨릭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에서 종도신경(사도신경)은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라고 되어있고, 이 '지옥'은 고성소를 의미한다. 이는 영어 번역본 사도신경이 inferos를 'hell'[2]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3. 유아 림보[편집]


라틴어
Limbus Infantum
원래의 고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후 한동안 이 문제는 별다르게 거론되지 않았는데, 초기 교회 이후 죽은 영혼의 거처는 극단적으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양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연옥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이 고성소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간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깨끗한 상태로 죽은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
  • 물론 그렇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
  •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큰(大罪) 죽을 죄(死罪)는 안 짓더라도 본의 아니게 사소한 죄(小罪)들을 짓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그런 사소한 잘못들을 물어 지옥에 떨어트릴 것인가?[3]
  • 세례는 받았는데 자잘한 죄를 다 씻지 못한 영혼이 정화되는 장소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 성서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연옥 교리를 이번 기회에 확립하자.
  • 그런데... 세례는 못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죄 말고는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유아들은 어떻게 될까?[4]

이에 따라, 원죄 이외의 죄를 지은 적은 없지만, (원)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방법인 세례 또한 받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장소로서 고성소가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지옥에 갈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죄를 포함한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 또한 받은 적이 없으므로 천국에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이 처음에 나올 때부터 순조롭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교부(敎父)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처럼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이 '감각적인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는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이렇게 고성소(유아 림보)에 들어간 유아들에 대해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자연적으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받아들여지면서 체계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5]

그러나 이러한 림보 개념은 로마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교황청에서는 위에 해당하는 림보 개념을 9품천사 개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학적 가설'로 취급하였으며, 따라서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은 가설로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실은 이러한 림보 개념을 두고 현재까지도 신학자들 사이에 격론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림보를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신학자들 모두 합당한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러한 가설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는데, 이는 많은 경우 칼뱅주의의 구원 예정설(預定說)을 배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 전폭적으로 림보 개념을 지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때까지도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림보 가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상관 없이, 논쟁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지 않았다.

3.1. 가톨릭 교회의 입장[편집]


공인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 이후 폭넓게 받아들여지던 이러한 림보 개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부정적인 의견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일부 예정론자들의 논리를 한큐에 싸잡아 뒤집어버리는 것으로, 쉽게 말해 "세례 못 받은 유아들이 왜 구원을 못 받는데?"[6] 혹은 니가 뭔데 유아들의 운명을 결정하냐[7]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어찌보면 림보라는 개념도 일종의 오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구원 예정설'은 애초에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천주교 교리상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이유이다. 이는 점차 교회가 말하는 "세례"의 개념과 정의가 점차 보편적인 의미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많은 개혁적인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물론 림보 개념의 거부가 가톨릭 신자에게 강제된다는 건 당연히 극단적인 결론이다. 위에서도 한 번 말했듯이 여전히 림보 개념을 둘러싸고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믿을 교리(dogma)로 확정되어 장엄선포된 상태가 아닌 신학적 가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각 신학자들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아우구스티노파(派):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즉 림보 따윈 없으며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그 수가 소수에 불과한 상태이다.
  • 림보 지지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은 받을 수 없지만 림보에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제외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이 상대적으로 다수를 이루었다.
  • 구원 긍정파(?): 림보와 무관하게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주장한다. 근대 이후,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이 의견을 지지했다.
림보 지지파의 의견이 아직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위에도 말했듯이 '세례'의 의미 때문이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세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역설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세례'의 의미는 점차 확대되고 있으나, 그 확대된 의미조차도 태어나자마자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수많은 가설들이 오가고는 있으나,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한 세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림보 개념은 오히려 가톨릭 신학자들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현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애매모호한 상태에 빠뜨리지 말고 가능한 한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줘라.

2007년, 국제신학위원회는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이 일반적으로 어떠한지는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교회는 계시된 것과 관련해서만 가르치고 판단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희망하며, ...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문서를 발표하였고, 교황 베네딕토는 이를 승인하여 유아들의 림보 개념에 대해 기존 견해보다 더 넓은 천국으로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4. 기타[편집]


이슬람에도 바르자크와 아라프라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다는 기독교의 림보 내지는 연옥 비슷한 견해가 있다.

단테신곡 지옥편에서는 이 림보에 아기 뿐만 아니라 예수가 태어나기 전의 고대인이나 타종교인인 현인들이 머무는 것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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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에 번역이 개정되기 이전의 사도신경에서는 '고성소에 내리시어...' 로 되어있었다.[2] hell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본래 기독교 전래 이전의 게르만 제어에서 hell 과 그 cognate들은 헬(북유럽 신화)에서 보듯이 한국어의 '저승'에 대응되는, 단순히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다.[3] 어떤 이들은 구약의 야훼를 보고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이미 보편 윤리를 주장하며 만인의 구원을 약속하게 된 이상 이 문제는 가만히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슬람교 같은 경우엔 아예 웬만큼 큰 죄가 아니고서는 그냥 낙원에 간다고 말한다.[4] 현대에서야 어지간히 낙후된 국가가 아니면 영아사망 0~1% 수준이지만, 전근대의 영아 사망률은 엄청났다. 이미 근대에 들어선 19세기 미국에서도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같은 사례도 있었는데("영아사망률이 높아 부모들은 아이가 사망하더라도 질병이나 영양실조로만 보았기 때문에 진정 시럽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14세기 영국의 경우에는 무려 22%에 달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영아기에 죽는다는 얘기니 영아기 뿐 아니라 유아기에 죽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많은 수의 영유아들이 원죄 빼고 아무 죄도 없는데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반발이 클 수 밖에 없다.[5] 스콜라 신학자들은 "고성소에서의 영혼들은 실향(失鄕)의 슬픔을 제외하면 자연 상태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경지에 머무른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이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으로 퍼져나가면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6] 세례받지 못한 유아들의 책임은 세례를 내리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지 유아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왜 유아들이 림보에 떨어짐으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가?[7] 평범한 사람으로 예시를 들자면 "난 신부님 말씀 잘 들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 지키며 살았는데 내 아이가 유산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라는 반발심리가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