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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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구조
5. 조선 시대의 후속작: 검선, 맹선, 창선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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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와 이희가 수군을 재건 하고 함선을 개조한뒤후 과선에 모습이다. 사진속중 충파중인 함선이 고려에 과선이다.


과선. 戈船. Dagger-axe Ship.[1]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군함. 단, 고려 후반기에는누전선과 주력으로 쓰였다. 과선이 유명해진 까닭은, 한선 중에서도 거북선처럼 꼬챙이를 꽂아서 적들의 도선을 차단하는 돌격선의 발전 과정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김재근 박사는 고려말기에 과선의 역할을 이어받았던 검선(劍船)의 존재를 근거로 하여, 뱃전에 창을 꽂아 적이 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여 과선이라 이름지었다고 보았으며, 이런 학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2. 역사[편집]


처음 과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 문헌이다. 하지만 고려의 과선에는 명칭에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남아있는 것도 한자 명칭 뿐이라서 학자에 따라 주력 돌격선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는 주장도 있고, 창()을 든 군사들이 빠르게 적선에 접근하여 접근전을 벌이는 선박이라 과선이라 이름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 현종 2년 ~ 숙종2(1011~1097)이다. 당시 고려는 동해안 지역에 횡행하는 도이적(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일명 도부서)라는 일종의 해상방위 사령부를 각지에 두고 해적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이 때 등장한 배가 바로 과선이다.고려말기에는 진포대첩에서 누전선가 함께 주력선으로 왜구를 격파했다.관음포 전투에서 주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흔히 여진족을 기마민족으로만 여기기 쉬우나 이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인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배를 사용해 장거리 해상 약탈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도이적(되놈+도적)으로 불렸는데, 어느 정도냐면 일본 왜구들의 본거지 중 하나인 규슈가 털릴 정도였으며, 한 번은 일본에 엄청난 해상세력이 쳐들어와 "고려 해적들이 쳐들어왔구나!" 해서 격전이 벌어져 일본이 힘겹게 싸워 이기고 적병들을 사로잡았는데 포로 중에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고려인이 있어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보니 고려인 왈, "나는 고려 수군이고, 저놈들은 도이적(여진해적)인데 저들과 싸우다가 사로잡혔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하 한국해양사 고대편 참조.[2]

1419년 대마도 정벌때 200척 이상 투입되었으며 방패를 설치하고 고려시절관음포 전투때와 지휘소를 가추어 원정에 나섰다.124척에 왜선을 격파하며 왜구에게 1383년 관음포전투 이후 36년 만에 위험을 보였다.


3. 구조[편집]


과선의 구조는 일본의 기록인 '소우기'라는 책에 실려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도이적들이 일본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일본인들을 죽이거나 잡아들이던 중 고려 수군이 짜잔 하고 나타나 도이적들을 물리치고 잡힌 포로들을 구출했다는 기록 중 고려수군에게 구출된 한 일본 여성의 증언을 통해 구조가 대략적으로 남아 있다.

  • 선체가 크고 넓은 대형선이다. 배 안도 넓고 안을 두겹으로 만들었다.
  • 배 위에 망루가 좌우 각 네 곳에 설치되어 있다.
  • 뱃전에 각각 7~8개의 노가 있으며, 노를 젓는 사람이 5~6명이다.
  • 이물(뱃머리)에 쇠를 씌운 큰 뿔이 있어, 적 배를 들이받아 부순다.
  • 큰 돌을 쌓아두고, 이를 던져 적선을 때려 부순다. 역사스페셜 단행본에서는 입화석타, 즉 돌에 불을 넣어 적선을 때려 부순다라는 내용이 나온 적이 있다.
  • 배 안에 창, 웅수(熊手) 등의 장병기를 배치해 놓았다. 웅수란 짐승의 발처럼 생긴 갈고리 날을 막대 끝에 달아, 이를 휘둘러 적을 할퀴고 끌어당기는 장병기로 삼국시대 가지극이나 조선시대 장병겸과 쓰임새가 비슷하다. 쉽게 말하면 전투용 쇠갈퀴. 하지만 직접적으로 뱃전에 빙 둘러 꽂아 놓았다는 말은 없다. 필요할 때만 설치하거나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원래 한선은 완전 조립식이라 상대적으로 개조/분해/조립이 쉽다. 이 때문에 배의 일부가 낡거나 손상되어서 부분 해체하여 문제가 생긴 부분만 손질하거나 부품을 바꿀 수 있고, 가거도 한선의 경우 어업용으로 쓸 때는 뱃전을 6단(지래배이)까지만 올려서 쓰다가, 수송선으로 기능할 경우 7~8단(윗도리삼)을 추가해 배의 높이를 늘려서 사용할 수 있다.


4. 고려 후기의 주력선: 누전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누전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조선 시대의 후속작: 검선, 맹선, 창선[편집]


검선(劍船): 훨씬 후대인 고려조선초기 문헌에 등장하는 소형 선박. 뱃전에 단검을 빈틈없이 꽂아서 적(당시는 왜구)의 도선을 막은 군함으로서, 과선이랑 비슷하게 해적들의 구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크기가 작았으므로 쾌속선의 성향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우왕 때 '손광우가 왜구와 싸우다 다쳐서 검선을 타고 위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기록도 있고, 탑승인원도 15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더욱 작은 정찰선으로서 비거도선이라는 배도 존재한다. 왜선이 출몰시 검선이 추적하는 동안 비거도선이 따라잡아 검선이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버는 일을 한다. 이들은 여말선초에 조금 보이고 사라진다.

맹선(조운선), 병선, 평선: 시대적으로 고려 전함들의 후계자들이다. 조선초기에는 대/중/소로 나누는 전투선들이 등장한다. 이후에는 조운선의 전투형태인 맹선으로 대체된다. 특징이라면, 이렇게 추가적인 무장에 대한 언급없이 크기만으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전투선이 보조용으로 다수가 존재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개성이 없는 전투선들을 병선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경우가 있다. 판옥선 개발 이후에는 창선과 방패선으로 대체된다.

창선(槍船): 임진왜란 이후인 1599년 나대용이 만든 싸움배로, 기존의 주력선인 판옥선거북선을 소형화한 것이다. 그 구조가 과선과 비슷한데, 3층 구조가 아닌 2층 구조로 배를 낮춘 뒤 사방에 방패판을 둘러치고 창칼을 꽂아 도선을 막은 중(中)소형선이었다. 창선이라는 명칭만을 놓고 보면, 고려시대의 과선이랑 흡사해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거북선이나 판옥선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많이 발전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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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戈)는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된 장병기인데, 일반적인 창이랑 달라서 꺾창이라고 불렀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옆의 괴상한 명칭이 된다. 왜 이런 명칭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데, 시대적으로 '돌격선'을 의미하는 중국식 명칭의 영향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아래의 역사 문단 참조.[2] 비슷하게 기마민족으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의 코자크들도 조그만 배들을 타고 흑해를 들쑤시며 오스만 제국의 배들을 탈탈 털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