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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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과천시 CI_White.svg 과천시 행정구역 변천사
과천군 군내면
(果川郡 郡內面, 1896)


시흥군 과천면
(始興郡 果川面, 1914)


과천시
(果川市, 1986)


1. 개관
2. 시대별 역사
2.3.1. 구한말 당시의 과천군 산하 행정구역
2.5.1. 대한뉴스 영상자료
3. 관련 문서


1. 개관[편집]


과천이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당시 과천현에서 유래되었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시흥군에 흡수당했다. 이때의 과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1], 관악구 남현동과 경기도 과천시 전역, 그리고 안양시군포시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겁많은 선비는 (과거시험 보러갈 때) 과천부터 긴다"라는 속담처럼 서울의 관문으로 여겨지나 그 과천이 지금 과천이 아니라는게 함정. 물론 인덕원-선바위-남태령길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2][3] 조선시대에는 과천현감은 평안(평양)감사, 나주목사와 함께 지방관으로서 3대 요직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옛 과천군은 남태령 고개를 기준으로 남, 북으로 갈라져있었지만 조선후기 시흥행궁 건설 이전까지 남부지방에서 서울(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있던 고을이었기에 남태령 이북이 다른 고을로 분리 합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강 건너편에 있는 용산구도 고려 초기까지엔 과천(과주)의 일부였다.

공무원 시험 한국사 강사들이 조선시대 군현의 예시로 과천현을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공시족의 성지인 노량진이 과천현 소속이었기 때문.

2. 시대별 역사[편집]



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편집]


백제가 건국된 이래로 백제 영역이었으나 백제 시대의 지명은 남아있지 않다.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율목군(栗木郡)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 시기의 과천은 동사힐(冬斯肹)[4]이라고도 불렸으며, 율목이라는 명칭은 과주, 과천의 어원이 되었다. 사실 율목이라는 단어는 '밤나무 열매['''果''']'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이 차지한 후 통일신라에서 한주에 속했으며 신라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했다. 율진의 진(津)은 노량진 내지는 용산 한강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래의 과천 영역뿐만 아니라 곡양현(지금의 서울 영등포권 및 경기 광명시)[5], 공암현(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및 영등포구의 양화동), 소성현(제물포, 관교동을 비롯한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부 및 시흥시 북부)을 속현으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속현들은 이후에 고려 과주현으로 강등되면서 앞서 언급한 곡양현, 공암현, 소성현은 수주(지금의 인천 부평)의 속현이 되었다.


2.2. 고려[편집]


과주(果州)로 불렸는데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일대도 과주에 속했다[6]. 후에 용산구 일대가 부원현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나갔다가 남경(한성부, 서울의 전신)에 편입되었다. 나머지 지역은 그대로 쭉 과주. 고려 성종 때에는 '부림'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부림동의 '부림'이 바로 이것.


2.3. 조선[편집]


14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果)으로 명칭이 바뀌었다.[7] 조선초기에 인근의 금천현(지금의 영등포, 금천, 광명)과 합병하여 '금과현'이 되기도 했다가 관아 위치 등이 문제가 되어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도로 과천현으로 환원된 흑역사가 있다(...).

정미사화의 발단이 된 양재역 벽서사건이 벌어진 고을이기도 하다.

과천현의 진산(鎭山)은 관악산이었다.[8] 현재의 안양시석수동, 박달동은 원래 시흥군 소속이다. 군포시 대야동 일대는 1906년에 광주군에서 안산군[9]으로 편입되었고, 의왕시 일대는 광주군 소속이었다.


2.3.1. 구한말 당시의 과천군 산하 행정구역[편집]


파일:Gwacheon-Hyeon_Eupji_1899.gif
과천현읍지에 나온 1899년 과천군 지도.

  • 군내면 :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제외 전부)
  • 동면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신원동, 양재동, 원지동, 우면동,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일대
  • 상서면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비산동, 평촌동 일대
  • 하서면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및 동안구 호계동 일대
  • 남면 : 경기도 군포시(대야미동, 도마교동, 둔대동, 속달동 제외)
  • 상북면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잠원동, 방배동 및 관악구 남현동 및 동작구 사당동, 동작동
  • 하북면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본동 및 흑석동


2.4. 일제강점기[편집]





[[일본 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일제강점기 경기도의 폐지된



파일:고시치노키리.svg

과천군
果川郡
Kasen County


파일:1913년의 과천군.png

1913년의 과천군 관할 구역
상위 행정구역
경기도
폐지 이후
시흥군

현 과천시 지역의 역사만 따져보면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과천군이 폐지되면서 시흥군에 편제되었다. 이때 군내면이 과천면으로 개칭되었고, 이와 함께 구 과천군 동면 중 현재의 주암동 지역이 과천면에 편입되었다.

동작구 일부,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일대의 역사는 서울특별시/역사, 영등포구/역사, 시흥군 문서를, 안양시, 군포시의 역사는 안양시, 군포시, 시흥군 문서를 보면 된다.


2.5. 대한민국[편집]


파일:1975 서울특별시_개발제한구역도.jpg
1975년 서울특별시 개발제한구역도. 정부과천청사가 들어선 원도심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과천시 행정구역의 92%가 그린벨트로 규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과천면이 바로 과천시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10] 사실 1963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면서(1991년 해제) 정부과천청사 건설 계획 이전까지는 고양시 신도읍과 함께 잠정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로 지정된 그린벨트 지역이자 '남서울 계획'에 속한 지역으로 취급되었다.[11] 과천시내에 서울특별시 관할의 서울대공원렛츠런파크 서울이 이전해온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어 과천 토박이들은 서울 편입에 대한 기대를 가졌지만, 1970년경 과천시 일대가 그린벨트로 묶이는 바람에(...) 같이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으면서 대부분의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이지 않은 광명시 북부(이쪽은 아예 개봉대단지 건설로 본격 베드타운화 시작)와 다르게 개발이 지지부진했다. 당시의 서울시 도시계획 관련 지도나 문서를 보면 정부청사 건설 이전의 과천 일대는 공업지대나 주거지대가 아닌 자연녹지로 계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 때문인지 광명시와 다르게 서울통화권이 아닌 안양통화권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에는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어 정부과천청사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82년 5월에 일부 정부기관이 이전했다.

사실 지금의 과천시에 정부과천청사가 건설된 것은, 북한의 안보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강남 개발계획(속칭 '남서울 계획')과 맞물려서 그런 것이다. 만일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거나 인천상륙이후 북진통일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과천시 일대는 그저 안양시의 일부로 남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12]

1985년 8월에 시흥군 과천면의 안양통화권(0343)에서 서울통화권(02)으로의 변경이 이루어졌고[13] 1986년에 과천면이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1991년에는 과천시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어 과천시 도시계획구역이 신설되었다.

2023년 5월 1일 행정구역조정으로 인해 갈현동 북부지역이 원문동에 편입되었다.

2.5.1. 대한뉴스 영상자료[편집]


1958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관악산을 답사했다.#

1978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갈현 1리[14]에서 모내기를 도왔다.#

1982년 3월,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대공원 건설 현장을 시찰했다.#

1982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이 과천 정부 제 2청사 신축현장을 시찰했다.#

1986년 8월, 전두환 대통령이 국립현대미술관 준공 및 개관행사에 참석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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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곡동을 행정동으로 하는 3개 법정동인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을 제외한 서초구 전역이었다.[2] 참고로 문제의 인덕원이 있는 안양시에서 편찬한 안양시지에서는 안양시가 옛 금천현과 과천현의 결합이라고 적고 있다.[3] 다만 정조 때 남태령길(과천군쪽)이 아닌 시흥동(시흥군쪽) 경유 길이 별도로 개설되었다. 이 길이 현재의 시흥대로-경수대로와 선형이 비슷하다.[4] 해가 하늘에 솟아오른다는 뜻의 ‘돋-’과 마을을 가리키는 고구려말 ‘홀’이 합쳐진 말을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즉 해 뜨는 동네라는 뜻이다.[5] 이 지역이 조선시대의 금천현(시흥현) 일대이다.[6] 같은 시기에 금주(조선시대의 시흥)도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된 여의도 일대까지 관할했었다.[7] 먹물을 아끼려고 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중소군현의 이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州)에서 점 3개 때내고 천(川)으로 바꾼 것. 이때 인천(현 시흥북부 포함, 부평-계양-부천 제외)과 금천(지금의 서울 영등포+경기 광명+안양 석수동, 박달동)도 같은 이유로 명칭이 각각 인주, 금주에서 인, 금으로 변경되었다.[8] 시흥현의 진산이 관악산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시흥현의 진산은 관악산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삼성산이었다.[9] 이후 수원군 → 화성군으로 갔다가 1995년에 군포로 편입.[10] 때문에 과천 시내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이 비닐하우스 천지인 농촌 풍경이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11] 과천시, 고양시 신도와 함께 잠정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광명시 북부는 과천, 고양 신도와 다르게 평야지역은 그린벨트에 편입되지 않았다.[12] 참고로 과천시 승격 당시에 안양시에서 반대했다고 한다.[13] DDD 지역번호 체계 본격 도입 이후로 유일하게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된 사례다. 똑같이 02를 쓰는 광명시의 경우는 DDD 지역번호 체계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던 시절에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된 지역이었고, 그 시기에는 서울통화권 준가입지역에 전화가 신설되면 그 장소가 서울전화로 편입되는 식이었다. 다만, 주암동 장군마을일대는 애초부터 서울통화권(02)이다.[14] 현 지식정보타운 일대